[설 특별기획] MB정부 출범, 그 이후…③대형 사건·사고 풀스토리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2.07 18: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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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펑펑' 하루도 편한 날 없었다

[일요시사=사회팀] "이보다 더 바쁠 순 없다." 한 경찰 관계자는 MB정부 5년을 평가해달라는 얘기에 이렇게 답했다. 유난히 대형 사건이 많았던 지난 5년.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을 모아봤다. 


MB정부 5년은 말그대로 다사다난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민주화 정부 출범 이후 MB정부만큼 경찰력이 바삐 돌아간 적이 없었다"며 지난 5년을 회상했다. 그만큼 이번 정부 들어 사건·사고가 많았다는 뜻이다.

항간에서는 MB정부가 '꼼꼼한(?) 정부'로 불리지만 사건·사고 뒷수습에서는 합격점을 줄 수 없다는 게 각계의 중론이다. MB정부의 대형사건 처리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건 지난 2008년 소위 '명박산성'으로 대변되는 '촛불정국'이 개시되면서다.

꼼꼼한 그분의
사건·사고 처리

지난 2008년 5월 10대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한·미 쇠고기 협상 결과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 참가자였다. 이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광우병의 위험을 전해 듣고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에 정부는 '전교조 배후설' 카드를 꺼내들었다. 집회 참가자 대부분이 10대인만큼 교육 현장에 있는 전교조가 학생들을 선동하지 않았겠냐는 얘기가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흘러나왔다.

현장에 있던 학생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와 동시에 촛불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20∼30대 청년층이 서울광장에 결합했고, 아이들 '먹을거리' 걱정에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정주부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폭등하는 물가와 불안정한 일자리에 시름하던 직장인들도 촛불 행렬에 대거 합류했다.


치솟는 촛불의 기세가 청와대를 위협하자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하지만 문제가 됐던 쇠고기 위생조건검역 장관고시 강행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도로를 점거한 채 가두시위에 나섰다. 경찰은 불법시위라며 물대포와 방패를 동원해 이들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와 연행자가 속출했다. 경찰의 진압은 연일 과격해졌고 시위대도 이에 맞서 폭력성을 띄었다. 촛불은 어느새 큰 횃불이 됐다.

당시 경찰 수장이었던 어청수 경찰청장은 "(시위 참가자들은) 폭력 시민이기 때문에 강경 진압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시민들은 '쇠고기 재협상'에서 '이명박 퇴진'으로 구호를 바꿨다. 매일 밤 서울 종로 일대에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전·의경과 경찰 호송버스가 진을 쳤다. 정부와 시위대 간 끝을 알 수 없는 '벼랑 끝 대치'는 두 달이 지나서야 정부의 승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정권초기 광우병 촛불 시위로 '전국 들썩들썩'
서울 한복판서 현대사 비극 용산참사 벌어져

그러나 광우병 촛불 시위는 우리나라 집회 풍토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살벌한 죽창을 든 폭력 시위가 아닌 종이컵에 촛불을 든 문화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첫 집회였기 때문이다.

시위 기간 서울 곳곳에서는 흥겨운 노래가락이 퍼졌고, 함께 하는 춤사위가 광장마다 이어졌다. 초기 집회 현장에서 시위대가 비폭력을 외치다보니 경찰력과 직접 맞서기보다는 공권력에 대한 날선 풍자와 유머가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선풍적인 인기도 이 같은 사회지형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사회 저명인사들의 반성도 이어졌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온라인을 통해 소통하고 토론하는 새로운 정치집단이 대한민국에 생겨났다" 평한 뒤 "정치권이나 지식인을 비롯한 책임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젊은 세대와의 교감을 더욱 넓히고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촛불서 놀란 MB

용산서 터트렸다

그러나 촛불이 켜진 광화문 일대를 말없이 바라봤다던 이 대통령은 이때부터 시위대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촛불시위의 트라우마는 끝없이 MB정부를 괴롭혔다. '촛불 정국' 이후 경찰은 '명박산성'과 같은 소극적인(?) 대응을 벗어나 방패를 들고 직접 내리찍는 강경진압을 선택했다.

그리고 곧바로 현대사의 비극인 '용산참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2009년 1월 서울 용산4지구 철거민 40여명은 철거가 예정된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은 정부의 재개발 정책을 반대하며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농성에 돌입한 시점부터 비극은 막을 올렸다.

이?날 경찰은 특공대를 동원해 강제진압에 나섰다. 철거민이 올랐던 망루에는 난데없이 불길이 일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절규와 함께 현장은 불바다로 변했다. 이 불길에 고 이상림씨를 비롯한 철거민 5명, 경찰특공대원 1명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전체 부상자는 23명에 달했다.

'용산참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날,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의 사퇴로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용산참사'는 다시 법정공방으로 이어졌다.

검찰은 용산4지구 철거민 대표 이충연씨 등을 상대로 특수공무집행 방해 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기소된 이씨 등은 1심에서 모두 4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민변 등의 사민·시회단체는 검찰의 기소내용을 반박하며 "화재 원인으로 지목된 화염병을 농성자가 던진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고, 경찰 측에도 진압 과정에서 주의의무 위반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대법원은 2010년 11월 기소된 철거민들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

이씨 등이 수감된 후 이씨 가족과 철거민 유가족들은 매해 '용산참사 추모제'를 열었다. 사고가 발생한 용산4구역 재개발은 참사 발생 4년이 지나도록 답보 상태다. 비록 최근 용산참사 수감자들이 설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용산참사 진상규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 공은 박근혜 정부로 넘어간 상황이다.

극심한 좌우분열
천안함 사건터져

용산참사가 벌어진 해와 같은 해인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거하면서 우리나라는 극심한 좌우 분열을 겪게 된다. 해방 공간 이후 최대의 갈등 국면에 접어든 2010년. 북한발 대형 사고가 터졌다.

소위 '천안함 침몰 사건'이라 불리는 이 대형 국가재난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정국을 뒤흔드는 핵심 변수로 급부상했다. 같은 사안을 놓고 각기 다른 해석이 우후죽순처럼 불거졌고, 진보와 보수로 나뉜 정치적 입장은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상호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2010년 3월. 인천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PCC-772(천안함)가 침몰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천안함 피격 사건'이라 지칭했다. 국방부는 "북한 정찰총국이 우리나라 초계함을 침몰시켰다"고 브리핑했다.

당시 천안함에 탑승하고 있던 104명의 군인 중 58명은 구조됐으나 나머지 46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모두 사망자로 확인됐다. 더불어 수색과정에서 UDT 대원인 한주호 해군준위가 작업 중 순직했다. 뿐만 아니라 천안함 실종자 수색 작업을 하던 '금양98호' 역시 인천 서해 부근에서 침몰해 탑승 선원 9명 전원이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점점 늘어났다.

논란도 점차 확대됐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미국, 영국, 스웨덴 등의 국제 전문가 24명이 포함된 '천안함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공식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하지만 합동조사단의 발표를 반박하는 증거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잠수함의 이동 경로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지적부터 어뢰가 북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이에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믿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의혹 제기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북한은 사고 지점에 암초가 많다는 점을 근거로 스스로 좌초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천안함 침몰 원인을 놓고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으나 결론은 '피격설'로 마무리됐다. 남북 간의 긴장은 고조됐으며, 대한민국 안에서도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부정하는 글을 쓴 시민이 국정원으로부터 내사를 받는 등 이른바 '용공 논란'이 점화됐다.

이에 대해 천안함 조사 의혹을 제기한 이승헌 버지니아대학교 교수는 "정부의 천안함 발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고소됐다"며 "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고 비판했다.



천안함·연평도 도발 초긴장
연쇄살인·아동성폭행 잇달아

'천안함 사건'으로부터 8개월 후 북한은 '연평도 도발'을 통해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안보를 건드렸다. 2010년 11월 북한은 대한민국의 영토인 연평도에 예고 없는 집중 포격을 가했다.

북한이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타격하여 민간인이 사망한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보복 사격을 했고 이 사건은 국제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남북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남북 간의 기류가 심상치 않자 언론은 좌우 갈등이 극명한 민감한 이슈보다는 살인·성폭행과 같은 자극적인 이슈에 천착한다. 괜한 걸 건드렸다가 이해당사자로부터 고소를 당하거나 정부기관으로부터 내사를 받는 것에 비해 강력 사건은 비교적 안전한(?) 이슈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향은 지난 2009년 용산참사 이후 "'강호순 사건'을 활용해 여론을 반전하라"고 지시한 청와대발 메일로 한 차례 드러난 적이 있다. 그러나 MB정부 들어 흉악범들이 기승을 부린 건 사실. 그 첫 시작은 지난 2008년 조두순이었다.

2008년 12월. 조두순은 초등학생 A양을 납치·성폭행했다. '조두순 사건'으로 알려진 이 범죄로 피해자 A양은 생식기와 내장 대부분이 파열되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다. 조두순은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2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아동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최대 50년까지 상향 조정하고 공소 시효도 폐지하기로 하는 법안을 입법했다.

2009년 12월. 정부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주도한 아동성범죄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3개월도 되지 않아 '김길태 사건'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10년 2월, 김길태는 예비 중학생인 한 아이를 납치·성폭행·살해하고 그 시신을 유기했다. 범죄의 심각성을 느낀 경찰은 6년 만에 피의자 신상을 공개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범죄 예방 효과는 없었다. 아동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는 더 잔인한 성격을 띠게 됐다.

2011년 4월. 늘어나는 성폭행 사건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커지자 법무부는 모든 성범죄자들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신상공개도 희대의 살인마 오원춘의 범행을 막진 못했다.

2012년 4월. 오원춘은 20대 여성 B씨를 집으로 납치한 뒤 강간을 시도했으나 실패, 이후 목 졸라 살해한 뒤 그 시신을 토막 냈다. 범행의 잔혹함이 가져다주는 충격도 컸지만 경찰의 늦장 대응은 당시 범국민적인 분노를 촉발했다. 이 사건으로 조현오 경찰청장은 스스로 옷을 벗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이가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유족들은 오원춘 사형 판결을 목 놓아 기다렸다. 많은 국민도 오원춘의 사형을 바랬다. 하지만 오원춘은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현재는 오원춘 사건으로 인해 사형수들에 대한 형 집행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천안함 정국 이후
성폭행 보도 봇물

실질적인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됐던 대한민국은 이제 다시 '사형'을 부르짖는 상황에 놓여 있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남·북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금강산 관광은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다. 용산 참사 진실규명은 아직도 멀어 보이며, 전국에서는 철거민과 개발업자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쇠고기 협상으로 물꼬를 튼 한·미 FTA가 2011년 체결됐지만 정부가 약속한 체감 경제 이득은 전무하다. 먼 미래의 누군가는 아마 MB정부를 '잃어버린 5년'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강현석 기자<k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지난 5년간 재난·재해

▲08년 02월 숭례문 방화사건 (사망 없음)
  08년 12월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고 (사망 8명)
▲09년 02월 화왕산 억새태우기 사고 (사망 6명)
  09년 11월 부산 실내사격장 화재 사고 (사망 10명)
▲10년 01월 한국 중부 폭설 (사망 1명·피해 106억)
  10년 11월 포항 요양원 화재 참사 (사망 10명)
▲11년 4월 구제역 파동 (사상 36명·피해 2000억)
  11년 7월 한국 중부 집중호우 (사망·실종 71명)
▲12년 5월 부산 노래방 화재 사고 (사망 9명)
  12년 8월 태풍 볼라벤 상륙 (사망·실종 25명·피해 80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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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박희영 기자 =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의 검찰개혁에 대해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고 비판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은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고 경고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개혁신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끝으로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있다. <일요시사>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김 전 비대위원장을 만나 그가 제시하는 정국 진단 결과와 향후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들었다. 다음은 김 전 비대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출범 100일을 넘긴 이재명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100일 동안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했다고 본다. 국민과 소통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추석을 앞두고 지급된 2차 민생회복 소비쿠폰에 대한 의견은? ▲민생 경제가 굉장히 어렵고, 우리나라의 총수요가 낮아졌다. 한국은행이 진단한 올해 성장률도 0.9%밖에 안 된다. 쿠폰을 풀면, 약간의 소비 촉진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엔 부족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겉보기엔 훈훈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3500억달러 투자 펀드 조성 요구와 노동자 317명 추방 등 사태와 맞물려 이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불거졌다. ▲우리 경제 부처 장관들이 미국 월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미국의 요구는 보증·대출을 거쳐 이행하면 될 것”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근본적인 시각 차이 때문에 협상이 타결되지 못했다. 그런데 국민에겐 마치 타결된 것 같은 인상을 줬다. 한 달도 안 돼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민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하는 미국의 MAGA 진영은 우리나라 일각의 부정선거론을 지지하면서 “한국이 공산주의에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는가? ▲그들은 미국이 어떻게 위대한 나라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트럼프의 MAGA 프로젝트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우리와도 관계가 없다. “MAGA 진영이 우리 정치에 개입할 것”이란 믿음은 국내 보수 진영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검찰 해체를 서둘러 마무리하려고 한다. 민주당이 새로 구상하는 검찰 체계에 대한 평가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검찰의 문제는 지금까지 권력자가 검찰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때문에 검찰도 못된 버릇이 들어 이렇게 됐다. 개혁보다 “검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짜 문제다.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 -이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주중대사로 임명했다. 노 대사가 어떤 역할을 할 것 같은가? ▲노 전 대통령은 한중 수교를 이끌었다. 노 대사는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으로서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된 많은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이 이를 참작해 중국 대사로 임명하는 신선한 인사를 한 것 같다. 이 대통령도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니 노 대사를 임명했을 것이다. -최근 민주당의 내부 구도를 놓고 ‘김어준 상왕설’이 불거지고 있다. 이 주장은 정국을 강경하게 이끄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대응과 맞물리고 있는데… ▲김어준씨가 유튜브를 시청하는 일정 부류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런데 대중에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상왕설’은 너무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한다. -최근 특검 수사 기간 연장과 관련해 정 대표와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충돌했다. ▲내부 의견 충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내가 보기엔 김 원내대표가 독단적으로 합의한 것 같진 않다. 합의 후 강성 지지층이 반발해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합의를 파기하려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대통령과 정 대표는 과거에 갈등이 많았고, 최근 민주당에 대해선 “친명과 구 친문이 갈등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건 다 괜히 하는 소리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는데, 당 대표가 대통령을 상대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가 쉽진 않다. -민주당 일각에선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에 합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혁신당 조국 비대위원장은 목표가 정해진 사람이다. 합당이 그 목표 실현에 유리할지 많이 생각할 것이다. 아울러 조 비대위원장으로선 혁신당만으로 전국 단위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고민할 텐데, 상황에 직면하면 합당 여부를 정하지 않겠나? 합당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받아들일 의사가 있어야 진행될 수 있다.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합의점에 도달하면 합당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대통령 있는데 당대표가 어떻게 의사 관철?” “장동혁은 대권 욕심 갖고 계속 변화할 것”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이끌던 국민의당과 혁신당은 총선을 치르면서 호남에서 선전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호남 민심이 어떤 선택을 할 거라고 보나? ▲두고 봐야 안다. 호남 민심은 제19대 대선에선 안 의원이 아니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호남 유권자들은 상당히 전략적으로 투표한다. 그들은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 그러니 선거를 치러봐야 알 수 있다. 지금은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다. -장 대표가 취임하자, 강경 보수 유튜버들은 “군소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강경 보수 유튜버들이 너무 밀착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민의힘이 계속 지금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우리 정치 지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변화가 있어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장 대표는 강경 보수와의 밀착과 중도층 공략 사이에서 계속 의견이 바뀐다. ▲장 대표에게도 정치적 목표가 있을 텐데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많은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강경 보수의 지원을 받아 당 대표가 됐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어떻게 결정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강경 보수와 밀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그들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을 긋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에게는 크게 정치적 기대를 하기 힘들다고 본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가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어차피 당 대표가 됐으니, 대권 욕심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언제나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장 대표 스스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많이 변할 것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장 대표가 당선되면서 위상이 많이 훼손됐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 전 대표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국민의힘 당원들은 상당한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강경해졌다. 세월이 흘러 당원들이 당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또 변할 수도 있다. 지금 상황만으로 판단하기엔 굉장히 이르다. 한 전 대표가 당시 여당 대표로서 비상계엄 선포 직후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한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국민의힘에선 가장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본다. -장 대표가 한 전 대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장 대표로선 당연히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쫓아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쫓아내겠나? 오늘의 장 대표는 한 전 대표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과 지방선거에서 연대할 가능성을 내비친다. ▲뻔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서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모두 국민의힘 사람이거나 국민의힘 출신인데 특별한 효과가 있겠는가? -진영 간 대결 구도가 성별·세대 갈등 구도로 번졌다. 정치권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대·사회·경제 구조가 변하고, 새 기술이 도입되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국민 사이에 형성되는 ‘그룹’을 조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이준석·안철수·오세훈? 뻔한 사람들” “국힘, 강경 보수로? 희망 보이지 않아” -일부 정치인은 갈등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후원금을 벌고 있다.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갈등을 전체적으로 포괄한 후 최대공약수를 찾아 정치해야 한다. -과거 정치와 현재 정치의 가장 큰 변화와 차이점은? ▲못 살던 시절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해서 경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은 국민의 의식 구조가 과거와 다르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우리 국민 중 성숙도가 가장 높다.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장 좋다. 이들은 공정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며, 민주적이지 않은 것에 크게 저항한다. 세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극우화됐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4050 남성이 2030 남성에게 가장 불만을 품는 부분은 “너희는 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서 보수화되느냐”는 것이다. ▲2030 남성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최근 국민의힘은 장외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너무 소란을 피우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들 “장 자크 루소가 얘기하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계몽주의가 뭔가? 성숙지 못한 국민을 성숙하게 만들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성숙도는 매우 높아졌다. 이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도 실패했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정치가 이를 따라가야 하는데, 접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정계의 킹메이커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대통령은 정직해야 한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대통령들이 모두 실패한 원인은 너무 탐욕스러웠고, 시대 변화를 제대로 못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정치·사회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봤거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반대가 된 일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제일 시급한 과제는 아주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다. 이를 완화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고, 출산율은 매우 낮다. 경제의 역동성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정치인이 말로만 소통·통합을 외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추석 연휴를 앞둔 <일요시사> 독자에게 남길 덕담 한마디가 있다면?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준이 여론조사에 휩쓸리는 식으로 정해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윤 전 대통령도 그렇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랫동안 검사였던 사람이 지도자가 된 사례가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이들은 남의 부정적인 측면만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창의적·긍정적 역할을 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봤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당시 국민의힘엔 대통령감이 없었다. 그래서 저는 윤 전 대통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은 것을 일컬어 “별의 순간을 잡았다”고 말했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은 제가 우려했던 행동을 했다. 저는 이승만 전 대통령 외엔 모든 대통령을 만나봤다. 직접 자문도 했고,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라는 책도 출간했다.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초심을 관철하지 못했단 것이었다. 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선 오래전에 보수·진보가 사라졌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제15대 대선도 보수·진보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두 보수였다. 19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정치권에 진출한 후 스스로 대단한 진보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들은 진보의 뜻도 모른다. 이들은 정권을 네 번 잡을 동안 양극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무슨 진보 정권인가? 국민이 정치 상황을 냉철하게 관찰하시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자세를 갖추셔야 한다. 대통령·국회의원도 결국 국민이 선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ctzxp@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