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촌 비망록' 출간설 실체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1.25 09: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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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기업인·연예인…'형님수첩' 열면 여럿 다친다!

[일요시사=사회팀] '주먹계 거물' 고 김태촌씨가 지난 5일 생을 마감하면서 '김태촌 비망록' 존재 여부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일요시사>는 김씨의 생전 인터뷰를 통해 비망록 출간 의지를 확인한 바 있다. 당시 김씨는 초대형 폭로가 담긴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이라고 큰소리 쳤다. 그렇다면 김씨의 비망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

"내가 입 열면 여럿 다쳐!"

범서방파 두목, 고 김태촌씨가 지난해 1월 <일요시사>와의 병상 인터뷰 도중 꺼낸 말이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서울대병원에서 '최양석'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투병 중이던 김씨는 인터뷰 후 본지 기자에게 '비망록'의 존재를 털어놨다.

할 말 많은데
누군가 죽는다

고인이 된 김씨는 80년대 '양은이파' 조양은, 'OB파' 이동재와 함께 '어둠의 세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받은 형은 모두 33년 6개월. 인생의 절반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그가 감옥 밖에서 쌓은 인맥은 결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1974년 상경해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전국구 조폭 생활을 시작한 김씨는 1976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 난입사건'에 관여하며 신민당으로부터 중앙당 노동부 차장이라는 직함을 받았다. 당시 김씨는 신민당 의원이자 당 총재 후보였던 이철승 의원의 사주를 받고 신민당 전당대회에 개입해 폭력을 행사하는 등 '정치깡패'로 악명을 떨쳤다.


'5월 전당대회'의 또 다른 총재 후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당시 후보)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감시와 협박을 받고 있었는데 이때 김씨 조직을 실질적으로 움직인 배후가 청와대의 차지철 경호실장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난입사건을 빌미로 깡패들을 동원해 김 전 대통령을 제거하려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김씨를 피해 총재실 밖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거사'를 이루지 못했다는 증언도 김씨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김씨가 직접 몇몇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행동대장'이던 그는 난입사건 전부터 국회의원의 사위, 정계 로비스트 등을 '형님'으로 모시고 있었다. 난입사건 이후 김씨는 '서방파'라는 이름의 독자 세력을 구축했고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를 운영하며 연예계 쪽과도 교류했다. 이처럼 정계의 내로라하는 '형님'들과 연예계 '아우'들을 거느린 김씨는 서울 중구 소공동과 명동을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넓혔다.

유신정권이 끝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 7월. 김씨는 폭력·공갈·범죄단체조직 등의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김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5년으로 형이 감경됐다. 정계뿐 아니라 검·경과도 인연이 깊었던 김씨는 고위 공직자들을 회유하는 한편 측근들을 통해 검찰 쪽 인맥을 뚫었다.

김씨 출감 이후 서울 한강 고수부지에서 열린 '새마을 축구대회'에는 서울고검 P모 부장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P검사와 함께 김씨에게 돈봉투를 건넨 인물은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 중앙본부장이었다. 이후 P검사는 김씨와의 부적절한 커넥션이 드러나 옷을 벗었다.

본지와 병상 인터뷰 당시 출간 의지 드러내
생전 "꼭 책 낸다" 장담…측근도 일부 인정

김씨는 재계에도 발을 걸쳤다. 1986년 3월 프로야구 청보 핀토스 구단주 K씨와 나란히 앉아 야구 경기를 관람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 회자되며, 김씨 조직인 범서방파에 대기업 회장인 K씨가 5공 시절부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소문도 재계에 파다하다.

이밖에도 김씨를 둘러싼 여러 소문들은 그의 사후에도 꼬리를 물고 있다. 한편에서는 김씨에 대해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만 "그의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김씨는 "만약 내가 죽으면 일대기의 형태로 이 모든 것을 공개할 생각이다. (비망록을) 지인들을 통해 집필하고 있다"고 전했었다. 김씨가 병석에서 지난 사건들을 술회하면 지인들이 메모를 해 책으로 엮어내는 형식이다.

김씨 생애와 관련 이미 언론에 알려진 내용도 많기 때문에 그가 준비했던 비망록은 알려지지 않은 사건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담길 것으로 기대를 모았었다.

일례로 김씨가 지난 1985년 인천 뉴송도 호텔 나이트클럽 사장으로 있던 시절,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료도 받지 않고 무대에 섰던 이유가 비망록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다.

김씨 주변인의 실명이 그대로 노출될지 여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만약 김씨가 일대기를 통해 새로운 '검은 커넥션'을 공개한다면 그 칼끝은 가장 먼저 연예계로 향한다는 것이 한 조직원의 설명이다.

김씨와 유착 관계에 있던 '형님' 정치인들 대부분이 현역을 은퇴한 '죽은 권력'인만큼 김씨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거나 김씨 후배들과 사업상으로 묶여 있는 연예계 실력자들이 새롭게 부각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와 관련 한 익명의 조직원은 "연예인들과 건달은 서로 친할 수밖에 없다"면서 "옛날에는 우리들이 연예인들 뒤봐주고 그랬다"고 말했다.

조폭이 뒤봐주고
권력은 이용하고

현재와 같은 거대 연예매니지먼트사가 설립되기 전 조폭들은 연예인과 직접 계약을 맺거나 스케줄 매니저를 조직원으로 관리하는 수법을 통해 연예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뜨는 여자 연예인의 경우는 조폭들의 집중관리 대상이 됐다. 김씨가 활동했던 70년대 무렵 당대의 스타였던 K씨는 김씨 조직과 공생관계에 있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유신정권 때부터 K씨를 포함한 숱한 여자 연예인들은 권력기관의 고위 관계자(대부분 남성)와 부적절한 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그 중간 연락책이 바로 조폭이었다. 권력기관은 비선라인을 통해 조폭에게 연락을 취하고, 조폭은 고위 관계자가 찾는 여자 연예인을 물색해 만남을 주선하는 식이다.

이 같은 관행은 요정 등에서 빈번하게 벌어졌는데 취재 기자들의 접근을 막거나 정보 보안을 유지하는 건 늘 조폭의 몫이었다. 그리고 조폭이 지키는 밀실 안에서는 사회 고위층과 유명 연예인의 끈적한 관계가 맺어졌다.

이처럼 정·관계 고위 인사는 성욕을 채우고, 연예인은 사회 상류층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붙잡게 되는 거래가 뒷세계에서는 공공연히 일어났다. 그리고 이 모든 거래는 중간브로커인 조폭의 입막음 하에 벌어졌다. 이들은 침묵의 대가로 권력의 비호를 받았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서울 도처에 나이트클럽이 성행한 뒤에는 조폭들이 '권력'보다는 '돈'을 취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세력 간의 이권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80년대. 큼직한 조직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클럽에 유명 연예인을 세우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벌였다. 업소마다 연예인 섭외를 위한 담당 연락책이 있었고 이들은 저마다 조직의 이름을 앞세워 연예인 출연을 종용했다.

또 지역 장터나 축제와 같은 이권이 개입된 행사에는 여지없이 조폭이 개입했다. 지역의 작은 조폭이지만 중앙의 '큰 형님'들과도 연락이 가능했던 지역 보스들은 서울에 전화를 걸어 "나 00형님 동생인데, 트로트 가수 누구누구를 불러 달라"고 부탁한 뒤 실제 연예인이 오면 행사를 준비한 업체로부터 관례적인 뒷돈을 챙겨 받았다.

많은 트로트 가수들이 조폭과 남다른 유착을 보이는 건 지역 행사 수입이 쏠쏠한 그들의 스케줄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6일 김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아산병원에는 가수 L씨 등 트로트 가수의 화환이 줄을 이었다.

노태우 정권이 추진한 '범죄와의 전쟁' 이후 범서방파를 포함한 국내 3대 조직원 일부는 합법적인 연예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들과 형·동생하는 사이로 알려진 K씨는 걸그룹을 포함한 유명 아이돌을 여럿 발굴하며 2000년대 업계의 큰 손으로 자리매김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조폭으로부터 피습당한 E씨도 조폭과의 커넥션이 끊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E씨 역시 젊은 조직원들로부터 '형님'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형적으로는 거대 매니지먼트사가 연예시장을 잠식하면서 '주먹'들의 조직적인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2004년 범서방파 출신 사업가 N씨가 검찰에 구속됐을 당시 개그맨 L씨, 가수 K씨 등이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한 사례에서 보듯 개인과 개인 간의 '검은 커넥션'은 아직 유효하다.

비망록 칼날
연예계 조준


개인 사업자 형태의 '연예인 브로커' 행위도 아직 건재하다. 단골고객이 정·관계 인사에서 재계 인사로 바뀌었다는 점 외에는 지금도 암암리에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익명을 요구한 한 브로커는 '연예인 스폰서' 존재에 대해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재벌 3세 A씨가 발라드 가수인 B씨와 만나다가 비서진을 통해 걸그룹 멤버 C씨와의 또 다른 만남을 요구했었다"며 "이들의 만남은 고급 가라오케나 호텔 스위트룸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재벌과 연예인의 만남을 개인 브로커가 주선한다는 것.

또 이 브로커는 "예나 지금이나 연예인 브로커 중에서는 조폭 출신이 많고, 이들이 조직 쪽에 흘리는 정보가 조폭들 입장에서는 좋은 먹잇감이기 때문에 악어와 악어새 같은 구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뒷세계 생리를 잘 아는 김씨는 건강이 악화된 후에도 자신의 후배들을 통해 은밀한 정보를 모아온 온 것으로 전해졌다. 조폭이 입수하는 고급 정보들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8년 전 조직폭력계를 떠난 한 전직 '주먹'은 "이 바닥은 엘리베이터로 일찍 뜬 만큼 일찍 간다(죽는다)"면서 "김씨처럼 라인을 잘 타 이쪽저쪽 다 막아두지 않으면 아무리 떠도 죽는 건 금방"이라고 먼저 운을 띄었다.

이어 "김씨는 내 직계 선배는 아니지만 사람을 잘 부렸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조폭 생활이란 건 결국 밑에 애들 일 잘 시키고, 돈 좀 있고 힘 잘 쓰는 스폰서를 잡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 정도 위치쯤 되면 겉으로는 아무리 개과천선 했다고 하더라도 뒤로는 밑에 애들 만나서 사업 얘기도 하고, 잘 나갈 때 텄던 라인들을 통해 윗선의 정보도 듣고,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주변에서 청탁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죽으면 모든 비밀 공개" 병석서 일대기 형태 집필 확인
각계 유명인사들과 친분, 부적절한 관계 폭로할까 "후폭풍 만만치 않을 듯"

실제 김씨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 서울시경으로부터 폭력배 단속 계획을 가장 먼저 입수할 정도로 정보전에 능했다. 살면서 그가 받았던 각종 청탁과 그 대가로 교환했던 정보들만 나열해도 사회적 파장이 클 것이라는 경찰 관계자의 증언도 있었다.

'머리 쓰는 조폭'이었던 그는 은퇴 후 자신의 후견인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를 선택하면서 로얄 인맥에 방점을 찍기도 했다.

조 목사와 김씨의 친분이 남달랐던 만큼 김씨가 직접 작성한 '비망록'의 칼끝이 종교계로 향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하지만 생전 김씨가 조 목사와의 친분을 자랑스러워했고 본인의 일대기를 쓰는 것에도 비상한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씨가 조 목사와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비망록을 작성할 수는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해까지 김씨는 대외적으로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김씨는 "정치인이나 검찰, 경제인들과 관련된 '큰 사건'이 지금 나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죽기 전까지 고수했다. 지난 1992년 일명 <김태촌 비망록>이 공개된 후 애써 다져 놓은 정·관계 라인이 한 순간에 무너진 상황을 김씨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의 운전사 겸 비서인 K씨가 폭로한 이 비망록에는 지난 1989년 6월부터 8월까지 김씨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돼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검찰, 안기부, 경찰, 교도소 고위 관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김씨와 친분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건이 폭로되자 이들 대부분은 더는 김씨를 비호할 수 없었다.

1986년 민중민주당 창당대회에 부하 수십 명을 이끌고 나타나 국회의원들을 긴장시키던 김씨도 비호세력 없이는 한낱 폭력배나 수감자에 불과했다. 카지노 문제로 모 회장과 등을 돌린 뒤 그의 사돈이던 정치 거물에게 쓴 맛을 봤던 그였기에 "권력의 핵심과 관계된 일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김씨 사후 김씨의 최측근인 L씨는 비망록에 대한 질문에 "아직은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때가 아닌 것 같다"며 "나중에 정리가 되면 고인과 관련된 자료를 따로 모을 수 있겠지만 당장의 출간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비망록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은 셈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은 자를 둘러싼 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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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전국 한의과대학교에는 ‘졸업준비위원회’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졸업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목상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졸준위)는 졸업앨범 촬영, 실습 준비, 학번 일정 조율, 학사 일정과 실습 공지, 단체 일정뿐 아니라 국가시험(이하 국시) 대비를 위한 각종 자료 배포를 하고 있다. 매 대학 한의대마다 졸준위는 거의 필수적인 조직이 됐다. 졸준위는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체(이하 전졸협)’라는 상위 조직이 존재한다. 자료 독점 전졸협은 각 한의대 졸업준비위원장(이하 졸장)의 연합체로 구성돼있으며, 매년 국시 대비 자료집을 제작해 졸준위에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텐’ ‘의지’ ‘의맥’ ‘의련’ 등으로 불리는 자료집들이다. 실제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국시 준비의 필수 자료’로 통한다. 국시 100일 전에는 ‘의텐’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준위가 없으면 국시 준비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한의계 국시는 직전 1개년의 시험 문제만 공개되기 때문에 시험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시 문제는 오직 졸준위를 통해서만 5개년분 열람이 가능할뿐더러, 이 자료집은 공개자료가 아니라서 학생이 직접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전졸협이 자료들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자료집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 졸준위를 결성하는 것이다. 졸준위가 학생들의 투표로 결성되면 전졸협이 졸준위에 문제집을 제공한다. 이 체계는 오랫동안 유지돼왔고, 학생들도 졸준위를 통해 시험 자료를 제공 받는 것이 ‘관행’처럼 받아들여왔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반드시 결성돼야만 한다는 기조가 강하다. 학생들의 반대로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시 전졸협은 해당 학교에 문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은 모든 학생들의 가입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졸준위 가입 여부는 실질적으로 선택이 아니다. 자료집은 전졸협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에, 졸준위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문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문제집을 받아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학생들의 해당 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한 대학교에서는 졸준위 결성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는데 익명도 아닌 실명 투표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진행했지만 반대자가 나오자 실명 투표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렵다. 실명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데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후 자료 배포·학년 일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 실명 투표로 진행 가입시 200만원 이상 납부 필수 문제는 이 졸준위 가입이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졸준위에 가입하면 졸업 준비 비용(이하 졸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데, 그 비용이 상당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대학교의 졸비는 3차에 걸쳐 납부하도록 했는데 1차에 75만원, 2차에 80만원, 3차에 77만원 등 총 232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이다. 금액 산정 방식은 졸준위 가입 학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인원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된다. 심지어 2명 이상 탈퇴하게 된다면 졸준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은 ‘졸장’의 주도 하에 움직인다. 졸장은 학년 전체를 대변하며 전졸협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졸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 오갔을 정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졸준위가 결성되면 가입한 모든 학생들은 졸준위의 통제를 받는다.<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학교의 규칙문에 따르면 졸준위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다. ▲출석 시간(8시49분59초까지 착석 등) ▲교수·레지던트에게 개인 연락 금지 ▲지각·결석 시 벌금 ▲회의·행사 참여 의무 ▲병결·생리 결 확인 절차 ▲전자기기 사용 제한 ▲비대면 수업 접속 규칙 ▲시험 기간 행동 규칙 ▲기출·족보 자료 관리 규정 등이다. 학생들이 이 규정을 어길 시 졸준위는 ‘벌금’을 부과해 통제하고 있었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규정 위반 시 벌금 2만원에서 5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병결이다. 졸준위는 병결을 인정하기 위해 학생에게 진단서 제출을 요구하고, 그 내용(질병명·진료 소견·감염 여부 등)을 직접 열람해 판단했다. 제출 병원에 따라 병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있었다. 한 병원의 진단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체가 학생의 개인 의료 정보를 열람해 병결 여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 질병이 있어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병결을 얻기 위한 절차가 학습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졸준위는 대면 면담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3:1로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학생이 위축될 수 있는 방식을 행하기도 했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규칙 어기면 벌금도 이 같은 문제로 탈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 A 대학 졸준위 전체 학번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한 학생은 규정에 문제를 느껴 졸준위 측에 탈퇴를 의사를 밝혀왔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탈퇴 의사를 밝힌 학생과의 카톡 대화 전문이 학생들에게 공개됐다. 공개된 카톡 내용에는 탈퇴 과정이 담겨있었는데 순탄하지 않았다. 졸준위 측은 탈퇴 의사를 즉각적으로 승인하지 않았고, 재고를 요청하거나 면담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지연했다. 해당 학생이 다시 한번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힌 뒤에도, 졸장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대화를 공개한 뒤 학우들에게 ‘졸준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졸준위 운영이 조직 이탈 자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 정황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당 학우는 탈퇴 확인 및 권리 포기 동의서에 서명한 뒤에야 졸준위를 탈퇴할 수 있었다. 탈퇴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험 기간 중, 강의실 앞을 지나던 탈퇴 학생은 졸준위 임원 두 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며 불려 세워졌다. 임원들은 이 학생이 학습 플랫폼 ‘퀴즐렛’을 사용한 점을 언급하며, 그 자료 안에 졸준위에서 배포한 기출문제가 포함돼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졸준위에서는 퀴즐렛에 학교 시험 내용이 있다며 탈퇴자가 보지 못하도록 사용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졸협은 10년 전 자체 제작한 문제집으로 논란된 적이 있다. 당시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예상 문제집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시험이 끝난 직후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 60여명을 상대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압수했고, 국가시험원까지 압수수색해 기출문제와 대조 작업에 들어갔다. 기형적 구조 문제가 된 교재는 ‘의맥’ ‘의련’ 등 졸준위 연합체인 전졸협이 제작·배포해 온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교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배포하는 등 통제된 방식으로 유통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학생들이 전졸협을 통해서만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는 구조는 기형적”이라며 “국가고시를 위해 몇백만원씩 돈을 받고 문제를 제공하는 건 문제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