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4월, 이재명 대통령은 SNS 게시글과 후속 공개발언을 통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작전을 비판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희생을 규탄하고 국제인도법 준수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 발언이 담은 고통의 공감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가자 지구에서의 민간인 피해는 수만명에 달하며 국제사회의 비판이 마땅한 사안이다.
그러나 이 칼럼이 주목하는 것은 그 말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이스라엘만인가 하는 질문이다. 인권이 보편적 가치라면 그 잣대는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한다. 특정 국가만 겨냥한 선택적 인권 외교는 보편적 가치의 수호가 아니라, 외교적 이해관계의 포장지에 불과하다.
북한: 가장 가까운 침묵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폭압적이고 조직적인 인권 유린이 자행되는 곳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바로 북한이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보고서에서 북한의 인권 상황을 '현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규정했다.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는 COI 보고서 기준 최소 8만~12만 명,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등의 추산으로는 최대 20만 명에 달한다. 강제노동·고문·처형·강제낙태·성폭력이 국가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탈북자 증언은 수천 건이며, 이것은 의혹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이다.
북한 주민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이방인이 아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며, 대한민국 헌법 제3조가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는 땅에 사는 동포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말하기 이전에, 바로 옆집 가족의 화재를 먼저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는 국제사회의 규탄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최소 10만 동포는 누가 규탄해야 하는가.
미국과 중국: 동맹과 패권의 그늘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기준을 조금만 넓혀보면 불편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미국은 어떤가. 이라크 전쟁에서 민간인 수십만 명이 사망했고,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학대 사건(2004년)은 미군의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다. 관타나모 구금시설은 2026년 현재도 운영중이며 수십명이 법적절차 없이 수십년째 억류돼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을 향해 이스라엘에 했던 것과 같은 수위의 공개 발언을 할 수 있겠는가.
중국은 더 명백하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2022년 보고서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내 구금 및 감시 실태가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100만 명 이상이 '직업훈련센터'라는 이름의 시설에 구금됐으며, 위성사진과 내부 유출문서로 그 실체가 상당부분 확인됐다. 티베트의 문화·종교 정체성 억압, 홍콩 국가보안법(2020년)에 의한 '일국양제'의 사실상 해체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재명 정부는 중국을 향해 어떤 목소리를 낼수 있는가. 외교적 언어로 포장된 '우려 표명' 수준에 그친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공개적 비판과 비교할 때 그 기준의 이중성은 명백하다. 인권 외교의 진정성은 비판의 강도가 아니라, 비판의 일관성으로 판가름된다.
원유 확보인가, 인류애인가: 이란 달래기 가설
이번 비판의 배경을 외교 지형도 위에 올려놓으면 또 다른 그림이 보인다. 2026년 2월 미·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 위기에 처했다. 한국 원유수입의 약 70%가 그 해협을 통과하며,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결렬 직후 '한국은 중동 지역에서 원유의 45%를 수입하면서도 우리를 돕지 않았다'며 한국을 직접 거명했다. 두 수치는 기준이 다르다. 70%는 호르무즈 해협 통과 비중이고, 45%는 중동전체 수입 비중이다. 그러나 어느 수치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한국의 에너지 안보가 이 전쟁의 향방에 직접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맥락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 비판이 이란에 대한 외교적 유화신호로 기능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스라엘의 행위를 비판함으로써 이란과의 관계를 유연하게 유지하고, 에너지 안보와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한 통과를 간접적으로 보장받으려는 실용주의적 계산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 비판은 인권의 언어를 빌린 에너지 외교다. 국익을 위한 외교는 정상적인 국가 행위다. 그러나 그것을 인도주의적 원칙인 척 포장해서는 안 된다. 인류보편적 가치는 그 자체로 신성한 의미를 가진다. 이해득실이나 국익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인가: 선택의 정치학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방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정책에 대한 비판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스라엘을 비판한다고 해서 미국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국내 정치적으로 '가자인권 지지' 정서는 진보 지지층의 정서에 부합한다.
반면 북한인권을 강력히 비판하면 대북관계가 경색된다. 중국을 정면 비판하면 경제적 보복이 우려된다. 미국의 인권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한미동맹에 금이 간다. 이런 구도 속에서 '이스라엘 비판'은 외교적 비용이 가장 낮고 국내 정치적 이익이 높은 선택이다.
이것이 선택의 정치학이다. 말하기 쉬운 것만 말하고 비용이 드는 진실에는 침묵하는 것.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 비판이 이 구조에서 자유로운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보편적 가치, 일관성이 없으면 무기다
인권은 무기가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은 자국에 불리한 국가를 압박할 때 인권 카드를 꺼내들고, 동맹국의 인권 침해에는 눈을 감는 전략을 반복해왔다. 미국이 그랬고, 중국도 그 방식을 역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지금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 비판도 그 구조와 닮아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진정한 인권외교는 불편한 곳을 향해서도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비판한 강도로 북한 정권의 인권유린을 비판한다면, 중국의 위구르 탄압을 국제 무대에서 공론화한다면, 그때 비로소 '보편적 가치'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 전까지 이스라엘만 겨냥한 발언은, 보편적 가치의 수호가 아니라 선택적 정의의 발동이다. 그리고 선택적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아니다.
맺음말 — 동포의 신음에 먼저 응답하라
이재명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 감수성의 반만이라도 북한 주민을 향해 발휘되어야 한다. 철창 속에서 굶주리는 정치범, 강제 낙태를 당하는 여성, 연좌제로 가족 전체가 수용소에 끌려가는 사람들 이들은 지구 반대편의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 안에 있는 우리의 동포이자 국민이다.
외교는 현실이고 이상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현실 외교를 하면서도 원칙은 말해야 한다. 말하기 편한 원칙만 선택적으로 말하는 지도자를 국제사회와 국민은 오래 신뢰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용기가 있다면, 북한을 비판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가자지구의 아이들을 걱정한다면, 북녘땅 어둠 속에 있는 아이들은 더 살펴봐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인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책무이자,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일관성이다.
[박민우는?]
▲육군사관학교 47기
▲전 제2군단 부군단장
▲한성대 정책학 박사
▲현 명지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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