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후 2시 서울역 옛 역사인 ‘문화역서울’ 앞 광장에서 제107주년 3·5 학생항일만세운동 기념식이 열린다.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와 3·5 학생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부와 서울시, 광복회가 후원하는 행사다.
학생과 유족, 시민 등 300여명이 모여 107년 전, 교복 입은 학생들이 외쳤던 만세를 다시 기억한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헌시, 공연이 이어지며 그날의 정신을 현재로 불러낸다.
장소 또한 의미가 깊다. 바로 1919년 학생들이 만세를 외쳤던 남대문역, 지금의 서울역 광장이다.
107년 전 그날에도 학생들은 이곳으로 모였다. 3·1 운동 이후 서울의 25개 학교 학생 대표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남대문역 일대에는 학생과 시민 1만여명이 모여 만세를 외쳤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행렬은 서울 도심을 뒤덮었다. 일본 경찰의 탄압 속에서도 만세는 멈추지 않았다. 3·5 학생항일만세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학생은 위기 때마다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성격은 시대마다 달랐다. 일제강점기의 학생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해방 이후의 학생들은 권력을 바로 세우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같은 교복이었지만 목적은 달랐다. 하나는 독립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였다. 그 두 흐름의 시작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3·5 학생항일만세운동이다.
1919년의 조선은 국가가 사라진 공간이었다. 주권은 일본 제국에 빼앗겼고 조선인은 식민지 국민이 됐다. 법과 제도, 교육과 언어까지 제국의 통제 아래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은 정치 활동 이전에 존재의 문제였다.
나라가 있어야 시민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저항은 정치 행동이 아니라 생존의 외침이었다. 교복 속 젊은 세대는 침묵보다 행동을 선택했다.
3·1 운동은 그 출발점이었다. 전국에서 만세가 울렸고 기독교, 천도교, 불교 지도자들과 함께 학생들도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3월1일 이후에도 학생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거리에서 시작된 만세의 물결이 학교로 이어졌다.
교실에서 배운 역사와 식민 현실의 모순이 충돌했다. 그 흐름 속에서 나타난 사건이 바로 3‧5 학생항일만세운동이었다.
당시 서울의 거리에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모였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학생들의 행렬이 도심을 채웠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이 이미 시작된 상황이었다. 체포와 구금의 위험이 분명했지만,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에게 만세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나라의 존재를 되찾겠다는 선언이었다. 교복은 그날 저항의 상징이 됐다.
항일 학생운동의 특징은 목표가 분명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독립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이었다. 정치 체제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나라를 되찾는 문제였다. 그래서 항일 학생운동은 민족운동의 일부였다. 학생들은 그 안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세대였다. 미래를 잃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분노는 거리에서 만세가 됐다.
일본 당국은 학생운동을 특히 위험하게 봤다. 젊은 세대의 각성은 식민 통치의 기반을 흔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는 감시의 공간이 됐다. 교사는 통제의 도구가 됐고 학생 활동은 철저히 제한됐다. 그러나 통제는 저항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억압은 민족 의식을 더욱 자극했다. 교실에서 자란 의식은 거리에서 행동이 됐다.
3·5 학생운동 이후에도 학생들의 항일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전국 곳곳에서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같은 대규모 사건도 등장했다. 학생들은 단순한 교육 대상이 아니라 역사 주체로 등장했다. 교실을 넘어 사회를 움직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젊은 세대의 행동이 식민 권력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생운동의 성격은 달라졌다. 1945년 이후 한국에는 국가가 존재했다. 문제는 국가의 방향이었다. 권력이 민주주의를 지키느냐 아니면 억압하느냐가 갈등의 중심이 됐다. 그래서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번에는 독립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였다. 교복은 다시 시대의 질문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1960년 4·19 혁명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부정선거에 항의한 학생들의 시위는 정권을 무너뜨렸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학생들의 외침은 정치 구조를 바꾸었다. 학생운동은 다시 역사 중심에 섰다.
이후에도 학생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됐다. 유신체제 반대 운동과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도 학생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리의 시위는 민주주의 요구로 이어졌다. 학생은 시민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다. 젊은 세대의 질문이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이렇듯 교복은 민주주의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항일 학생운동과 민주화 학생운동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항일 운동은 외부 권력에 맞선 투쟁이었고, 민주화 운동은 내부 권력과의 갈등이었다. 하나는 국가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다른 하나는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거리였지만 역사적 의미는 달랐다.
또 다른 차이도 있다. 항일 학생운동은 민족 전체의 생존 문제였고, 민주화 학생운동은 정치 체제의 문제였다. 그래서 운동의 방식도 달랐다. 항일 운동은 만세와 선언 중심이었다. 민주화 운동은 조직과 정치 요구가 결합된 형태였다. 시대의 조건이 학생운동의 성격을 바꿨다.
그럼에도 두 운동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대가 막힐 때 가장 먼저 움직인 세대가 학생이었다는 점이다. 기성세대가 침묵할 때 학생들은 질문을 던졌다. 사회의 모순을 가장 빠르게 감지하는 세대였다. 그래서 학생운동은 역사적 변곡점에서 등장했다. 젊은 세대는 늘 변화의 신호였다.
이 흐름 속에서 3·5 학생항일만세운동의 의미는 더욱 또렷해진다. 그것은 한국 학생운동의 초기 원형에 가까운 사건이다.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한 장면이었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학생운동이 반복되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3월5일은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였다. 교복의 정치적 의미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자유롭다. 학생들이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칠 필요는 없다. 독재에 맞서 거리로 나설 이유도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그러나 학생의 역할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 학생운동의 의미도 바뀐다. 학생은 늘 사회의 방향을 먼저 묻는 세대였다. 질문하는 세대라는 역할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학생운동은 무엇이어야 할까. 독립을 외칠 시대도 아니고 독재와 싸우는 시대도 아니다. 그러나 사회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불평등, 기회의 격차, 미래 세대의 삶에 대한 불안, 민주주의의 질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다.
오늘의 학생운동은 어쩌면 ‘미래를 설계하는 운동’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다음 세대가 어떤 나라에서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운동이다.
그래서 3·5 학생항일만세운동 기념식은 단순한 역사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날의 학생들이 왜 거리로 나왔는지, 그리고 오늘의 학생들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까지 이어져야 한다. 역사 기념은 질문을 남길 때 의미가 있다. 과거의 만세가 현재의 질문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기억이 된다.
<skkim5961@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