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박정원 기자 =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빙속) 장거리의 역사를 썼던 김보름(32·강원도청)이 정들었던 은반을 떠난다.
전 국민적인 비난이 쏟아졌던 이른바 ‘왕따 주행’ 논란 이후, 마녀사냥을 실력과 법적 진실로 이겨낸 뒤 맞이하는 명예로운 은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보름은 지난 30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11살에 스케이트를 시작해 2010년부터 2024년까지 국가대표로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며 “올해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김보름의 빙상 인생은 화려했다. 쇼트트랙 선수로 시작해 2010년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하자마자 태극마크를 단 그는, 한국 선수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장거리 종목을 개척했다.
2014 소치, 2018 평창, 2022 베이징까지 3회 연속 올림픽 무대를 밟았으며, 2017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여자 5000m 금메달을 포함해 메달 4개를 휩쓸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2017년 매스스타트 금메달을 따내는 등 10년 넘게 독보적인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의 정점이어야 했던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여자 팀추월 준준결승 경기에서 노선영이 뒤처진 채 김보름과 박지우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자, SBS 중계진은 “팀추월에서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장면”이라며 선수들의 주행을 강하게 질타했다.
이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언론은 확인되지 않은 ‘왕따설’을 확대 재생산했고, 특히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등 일부 방송은 노선영의 일방적인 주장을 내보내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경기의 전술적 실패가 ‘인성 논란’으로 비화하며 전 국민적인 마녀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김보름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라’는 글이 올라와 무려 6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후원사는 떨어져 나갔고, 김보름은 ‘국민 역적’으로 몰려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며칠 뒤 열린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웃지 못한 채 태극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관중석을 향해 사죄의 큰절을 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진실은 잔인했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올림픽 직후 문화체육관광부의 특정 감사 결과, 팀추월 경기에서의 주행은 고의적인 왕따가 아닌 정상적인 작전 실패로 밝혀졌다.
더 나아가 김보름은 2019년, 오히려 자신이 노선영으로부터 2010년부터 지속적인 폭언과 따돌림을 당했다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동료 선수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노선영이 김보름에게 욕설과 폭언을 한 사실을 인정했고, 2022년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가해자’로 낙인찍혔던 김보름이 사실은 ‘피해자’였음이 법적으로 입증되며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된 순간이었다.
지옥 같은 시간을 버텨낸 김보름은 다시 스케이트 끈을 조여 맸다. 그는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에 출전해 매스스타트 5위를 기록,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완주하는 감동적인 레이스를 펼쳤다.
김보름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버거웠던 날들도 있었고, 다시 일어서야 했던 순간들도 있었다”며 “그럼에도 끝까지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스케이트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이어 “선수 생활은 여기서 마무리하지만 스케이트를 향한 마음은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다”며 “많은 어려움과 좌절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선수로 기억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전했다.
아울러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운동을 통해 배운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곳에서도 흔들림 없이 내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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