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은 ‘사도세자’를 떠올린다. 사도세자는 왕위를 승계하도록 이미 정해진 세자였지만, 아버지 영조와의 뒤틀린 관계 속에서 신임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생을 마쳤다.
사도세자는 비극적 최후 때문에 단점만 강조되지만, 실제 장점도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군사·정치 감각이 뛰어나고 민생 부담을 줄이려는 개혁을 보였으며, 예술적 재능과 개방적 소통 능력도 돋보였다.
물론 감정 기복과 충동성, 측근 정치, 영조와의 갈등이라는 약점도 있었지만, 사도세자는 불안정함과 뛰어난 자질이 동시에 존재했던 복합적 세자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죽음 이후에는 ‘생각할 ‘사(思)’, 그리고 슬퍼할 ‘도(悼)’가 붙어 사도세자라고 불리게 됐다. 제도가 보장한 세자라는 지위도 결국 아버지라는 절대 권력자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 즉 ‘제도의 후계’가 ‘권력자의 마음’ 앞에서 무력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냉혹한 역사적 증거다.
약 50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권력구조에서도 이와 닮은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헌법상 국무총리는 대통령 유고 시 국가 권력을 승계하는 0순위 공식 후계자다. 제도만 보면 총리는 세자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총리는 단 한 번도 대통령의 후계자가 된 적이 없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 보좌하고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자리임에도, 정권을 이어받는 길만큼은 언제나 철저히 닫혀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사석에서 가끔 “우리나라에는 사도세자보다 더 슬픈 존재가 있다. 바로 사도총리”라고 말해왔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사도총리 사례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누구보다 국가 운영 경험이 풍부했고, 정당 창업까지 주도했던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후계자로 낙점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현직 대통령과 대권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로 밀려났고, 결국 승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고건 전 총리는 김대중·노무현정부를 거치며 총리를 두 차례 지낸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냈고, 조용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 역시 어느 대통령에게도 후계자로 선택받지 못한 채 대권 경쟁에서 밀렸다.
김황식 전 총리는 대법관, 감사원장을 거쳐 총리로 발탁된 ‘정치적 무균질’ 인사로서 안정감을 인정받았지만, 정권의 승계구조와는 아무런 연관을 갖지 못했다. 국정 운영에서 신뢰받았으나 미래 권력에서는 존재감이 없었다.
황교안 전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국가적 혼란 속에서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수행했다. 그 어떤 총리보다 대통령에 근접한 위치까지 갔지만, 국민이나 정권 어느 쪽으로부터도 ‘승계의 자연스러운 후보’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역시 총리로서의 역할만 했을 뿐, 총리 이후의 미래는 구조적으로 닫혀 있었다.
이낙연 전 총리는 역대 총리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누렸던 인물이다. 팬덤까지 형성되며 ‘총리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가’를 현실화한 거의 유일한 인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 역시 정권과 정당 내부의 권력구도 속에서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인기는 있었지만 승계는 없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역대 총리 대부분은 “국정을 책임진 사람”이었지만 “국가의 미래를 맡길 사람”으로 선택받지는 못했다.
총리는 위기 때 책임을 지고 여론의 공격을 대신 맞으며 국정의 가장 힘든 일을 떠안지만, 정권교체의 순간이 다가오면 언제나 주변부로 밀려나곤 했다. 총리의 능력이나 경험, 안정적 리더십은 대통령의 후계구도 앞에서 단 한 번도 발휘되지 못했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총리제는 조선시대의 사도세자 구조와 닮았다. 제도적으로는 후계자이나 정치적으로는 후계자가 아니며, 책임은 주어지되 권한은 제한되고, 국정의 짐은 떠안지만 미래의 문은 닫혀 있다.
사도세자가 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했고, 사도총리는 0순위 후계자임에도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 풍자 같지만, 70년 헌정사가 이 같은 현실을 뒷받침한다.
대통령제 국가라면 총리가 대통령으로 성장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어서는 안 된다. 총리는 국가정책의 실무와 조정, 행정 운영의 실제를 누구보다 깊이 경험하는 자리다. 국정 그 자체를 책임지는 인물들이 대권후보가 되고, 국민 앞에서 경쟁하고, 필요하다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상적 승계구조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총리가 대권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부터 정치적 부담이 되고, 당내 세력은 총리의 부상을 경계하며, 대통령은 총리에게 권력의 미래를 맡길 생각을 갖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총리는 임기 동안만 필요한 존재로 축소되고, 총리가 가진 국정경험은 국가의 미래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 구조는 매우 비정상적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매 정권마다 국정 운영 경험이 거의 없는 새로운 지도자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기 때문이다. 국정의 연속성은 약화되고, 위기 대응 능력은 매번 초기화된다. 총리가 국가 운영을 통해 쌓아온 경험과 리더십이 다음 단계로 확장되지 못하면서, 대한민국은 ‘성장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재시작하는 리더십’만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왜 대한민국에서 총리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가” “왜 대통령은 끝내 총리를 후계자로 낙점하지 않는가” “왜 70년 동안 단 한 번도 ‘총리→대통령’이라는 정상적인 승계의 경로가 만들어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총리제는 계속해서 사도세자의 구조를 반복할 것이다.
책임만 있고 미래는 없으며, 헌법적 지위는 높지만 정치적 신뢰는 낮고, 국정의 한가운데 있으나 정권의 바깥에 서 있는 자리. 그 자리를 우리는 정확히 사도총리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현재 국정 운영을 맡고 있는 김민석 총리도 이 같은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 몸집을 키우는 대신 국정 안정에 집중하고, 행정보다는 권력 경쟁의 무대를 멀리 두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조용한 행보는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대한민국에서 총리는 왜 대통령이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순간, 우리는 총리가 구조적으로 밀려나 있는 정치 시스템을 바로잡게 되고, 그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사도총리’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