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죽음은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으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피해자로서는 죄를 물을 상대도, 피해를 복구할 방법도 사라지는 것이라 충격은 배가 된다.
‘피의자의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은 형벌을 줄 대상이 사라져 형사사법 절차의 실익이 없고 피의자의 방어권도 실현되지 못한다는 논리다. 문제는 피의자의 사망이 피해자의 피해 복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피해자가 2차 가해를 입는 경우도 허다하다. 범행 동기를 끝내 알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솜방망이라도…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사건은 ‘공소권 없음’ 종결이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을 다 보여준 사례였다. 2020년 7월10일 박 전 시장이 서울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 전 시장의 딸이 실종 신고를 한 지 7시간여 만이다.
박 전 시장이 사망 전 성추행 혐의로 피소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충격은 더 커졌다. 그는 변호사 시절 성추행 피해자의 변호를 맡아 일약 대중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박 전 시장이 피소 이틀 만에 사망한 채로 발견되면서 사건은 정치적으로 비화했다. 수사가 자동으로 종결되자 남은 건 피해자의 주장뿐이었다. 피해자의 주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2차 가해가 이어졌다. 심지어 박 전 시장이 살해됐다는 ‘타살설’까지 제기되면서 실체적 진실은 자취를 감췄다.
올해 3월 국민의힘 장제원 전 의원이 사망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장 전 의원은 극단적 선택으로 숨지기 전 성폭력 혐의로 고소당했다. 피해자는 발생 10년여 만에 사건을 공론화했지만 장 전 의원의 사망으로 혐의를 다퉈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8개월이 지난 현재 장 전 의원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다.
이슈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먹방 콘텐츠로 구독자 1000만명을 보유하고 있는 인기 유튜버 쯔양도 같은 일을 겪었다. 쯔양은 지난해 7월 전 남자친구에게 4년간 폭행, 착취, 협박 등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방송은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 쯔양 관련 논란을 제기하자 이를 해명하기 위해 진행됐다.
이날 방송에 함께 출연한 쯔양의 변호사는 “쯔양이 전 남자친구를 성폭행, 상습 협박, 공갈, 강요 등 혐의로 형사고소했으나 A씨가 자살로 사망하면서 형사 고소는 불송치,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다”고 설명했다. 쯔양은 현재 자신의 과거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다른 유튜버들을 상대로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사건의 첫 시작이었던 사람에게는 잘못을 물을 수 없게 됐다.
한 시민은 “이런 사례(박 전 시장, 장 전 의원 등)는 그래도 언론을 통해 보도가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회복될 방법을 찾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일반인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말 그대로 묻혀 버린다. 혹여나 사망 사건이 일어난다면 피해자는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한 꼴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망하면 ‘공소권 없음’ 종결
피해자 주장만 남아 2차 가해
대표적인 사례가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다. 한때 ‘동반 자살’이라고 불렸다. 생활고를 비관해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가 살아난 사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경우엔 부모에게 살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일가족 사망 사건’으로 뭉뚱그려 처리된다.
최근에는 인식이 많이 바뀌어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고 한다.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해 저지르는 범죄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얼마나 힘들면 저런 선택을 했을까’ 등의 시선이 자녀를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 일부 사건에서는 법원의 판결이 여타 살인사건에 비해 가볍게 나오기도 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8월 말에 낸 <관련 법제 개선을 위한 동반자살과 살해 후 자살의 비교·분석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0년까지 동반 극단적 선택 1519건 중 살해 후 건수는 416건으로 전체의 27.4%를 차지했다. 살해 후 극단적 선택 피해자는 대부분 가족이었다. 피해자 36.5%가 배우자 등 동반자, 33.7%는 자녀였다.
보고서는 “동반이나 살해 후 극단적 선택은 발생 추이나 특성 등에서 다른 양상을 보였으며 특히 동반 사망자 및 피해자와의 관계에 따라서도 그 수단과 원인, 발견 장소, 발생 지역 등에 차이가 있었다”며 “살해 후 극단적 선택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가 필요하며 법적·정책적 대응 역시 차별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다. 데이트 폭력, 교제 살인 등의 용어로 지칭됐지만 최근에는 아예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서 여성에게 가해를 저지르고 남성이 사망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이 경우 유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망자에게 범죄 사실을 따지고 들기도 어렵고 유가족에게 피해를 대신 회복해달라고 말하는 것도 사회 정서상 쉽지 않다. 피의자의 사망은 수사의 종결뿐만 아니라 사건의 종결로 이어지는 셈이다.
한 전문가는 “죽음이 2차 가해가 되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법원에서 솜방망이 처벌이 나올지라도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는 것과 사망하는 것은 피해자가 느끼기에 하늘과 땅 차이다. 사적 복수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법적 처벌만이 가해자를 단죄할 수 있는 수단인데 그 대상이 사라지면 얼마나 허무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사기 등으로 피해자에게 금전적 피해를 입힌 뒤 자살로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수백명의 피해자를 양산한 전세 사기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한 사건은 충격을 안겼다. 피해자 대부분은 20~30대 젊은 층이었다. 이들이 열심히 모아 집주인에게 내민 보증금이 공중분해된 셈이다.
피의자의 유족에게 보상을 청구한다고 해도 온전한 피해 회복이 이뤄진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처벌 필요”
전문가들은 범죄 피의자가 자살한 경우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하는 현행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피의자에게 잘잘못을 묻진 못해도 실체적 진실을 가리기 위한 수사는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진술의 신빙성이나 증거 능력 판단 등 수사기관의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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