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별이 푸른 건 허공 하늘이 있기 때문이다. 빌딩 숲으로 산맥을 이룬 도시의 하늘 선線이 만일 콘크리트 장벽에 완전히 가려 버린다면 별은 사라지리라.
아마 하늘보다 먼저 사람의 가슴속에서……
그리고 그 별은 검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깨어진 채 구르다가 지하의 나이트 홀이나 살롱으로 가서 유리조각처럼 반짝일는지도 모른다.
서글픈 실루엣
청운이 쉬엄쉬엄 걸어서 청량리역 앞에 도착한 건 어둠이 꽤 짙어져 길가의 네온사인이나 질주하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들이 반딧불처럼 명멸할 무렵이었다.
청운은 역사 지붕 밑 정면의 푸른 글자 중에 ‘량’ 자가 흐릿하게 빈사 상태로 깜박이는 것을 무심히 쳐다보다가 낡은 시계탑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했다.
얼핏 ‘청리역’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시계바늘은 모른 척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초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이따금 역 광장을 휩쓸어 불며 휴지 조각이나 비닐봉지 따위를 이리저리 흩날렸다.
‘악마산에 있을 때보다 더 황량한 느낌이군.’
청운은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역전식당으로 가서 소주와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은 후 다시 역 광장으로 나와 슬슬 거닐었다.
발길이 저도 모르게 588번지 쪽으로 갔다. 희미한 핑크빛 조명이 마술을 부릴 듯한 사창가 골목 입구에서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청소년기를 벗어나 막 청년기로 접어든 청운은 어릴 때부터 겪은 고생 때문인지 어쩐지 그 실루엣이 퍽 서글픈 인상을 풍겼다.
안색도 창백해 보였다. 하지만 단아한 풍모는 조금쯤 남아 있었는데, 그건 아마 실의에 젖었을지언정 마음속에 깃든 자기 나름의 꿈과 소망 또는 의지가 깃든 눈빛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가볼까 말까?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긴 했지만…….’
청운은 자신의 생각이 같잖다는 듯 빙긋 웃었다.
‘흐흥,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과연 그럴까?’
‘괜한 소리였겠지. 하지만 그땐…….’
내면의 갈등으로 인해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창녀의 입에 발린 말을 믿는 거야?’
‘그건 아냐.’
‘그럼 됐어. 그냥 돌아가자구.’
‘흠, 해어화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기이한 꽃이라고 했었지. 하기야 제대로 꽃봉오리를 피웠더라면 미인다운 구석이 없지도 않았어. 하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폐병 든 창녀가 되었으니…… 아마 지금쯤은 동백꽃 송이처럼 피를 토하고 떨어져 버렸을지도 몰라. 갔다가 없으면 더 허전할 거야.’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가보면 되지 뭘 그래. 고민할 것 없잖아!’
그러자 마음속의 또 다른 목소리가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지만 벌써 1년이 넘은 듯한데…… 설령 살아 있더라도 날 기억하고 있을까?’
‘그래, 흐흐흐…… 하지만 저 정육점 같은 불빛 속엔 다른 여자도 있지 않을까.’
그는 망설이던 발을 한 걸음 옮겼다.
황량한 청량리역 거닐다가
희미한 핑크빛 조명 속으로
‘그럼 넌 혹시 묵은 성욕을 해소하려는 게 목적이야?’
자문자답하며 창녀굴 입구에 서 있던 청운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만일 그렇다면…… 나처럼 정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이 땅에 많다면…… 미군들의 노리개인 양공주나 먼 옛날의 일본군 위안부와 다를 게 뭐겠어? 수십 년을 지난 오늘날 또…… 가련한 여인들이 인간 아닌 창녀라는 이름의 일회용 소모품 인형으로 취급받는 게 아닌가 말야.’
‘그래도…… 혹시 지금도 있다면 얼굴이나 한번 보고…… 몇푼 안 되는 돈이나마 쥐어 주면 좋지 않을까?’
그는 매음굴 쪽으로 한 걸음 옮겨 놓았다.
‘아냐, 그래 봤자 결국엔 허무의 늪에 빠질 뿐이야. 그리고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인연이 되면 다음에 또 만날 수도 있겠지…….’
청운은 발길을 돌려 절룩절룩 도시 쪽으로 걸어나갔다. 차량들이 질주하는 굉음과 매연 냄새가 현실을 깨닿게 해주었다.
1년쯤 전, 청운은 특수 공작 부대에 입대하기 위해 이곳에 서 있다가 한 여인의 꾐에 빠져 반자발적으로 불그무레한 그 골목 속으로 들어갔었다.
작별할 때, 절름발이에다 폐병쟁이인 그 창녀는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겠으니 꼭 살아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고작 1년 좀 넘게 지난 세월인데도 청운의 모습은 꽤 많이 변해 있었다.
청소년이 청년으로 바뀌어 가는 시점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청춘은 청소년일 때에 비해 몸은 강인해 보였지만 그 속의 생명력은 마치 녹이라도 슨 듯싶었다.
총상을 입고 절뚝거리는 다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북파공작원이라는 특수한 체험은 아직 십대 후반인 실제 나이보다 어딘지 좀더 겉늙어 보이게 했다.
‘난 지금 폐물과 같다. 아니, 왠지 그렇게 느껴진다. 만약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돌아왔다면, 그래서 지금 명예로운 제대를 한 상태라면 어떨까? 만일 그렇다면…… 저 청량리 길바닥을 개미나 혹은 베짱이처럼 걸어대는 인간들에게 엉뚱한 한 마디 귀여운 인사라도 건네 볼 텐데…… 혹시 오만스런 선민의식에 빠져 영웅이라는 착각에 젖어들지나 않을까. 흐흐, 이 나라의 지도자와 그들의 새끼 새끼 새끼들처럼…… 바퀴벌레의 애벌레 보다 징헌 새끼들…….’
청운은 번잡한 밤거리를 절뚝절뚝 헤쳐 나갔다. 다리가 아팠지만 악마산에서 극한훈련을 받을 때를 떠올리면 견딜 만했다.
‘넌 이렇게 절뚝거리는 게 좋니?’
청운은 자신에게 물었다.
‘그럴 리가…….’
‘그런데도 썩 비극적으로 보이진 않는군.’
‘그런 티를 낼 필요가 어딨어.’
‘흐흥, 혹시 절뚝거림에 대해 모종의 은근한 취향이 있는 것 아냐?’
‘뭔 소릴 해?’
번잡한 밤거리
‘그러니까…… 맘속에 절뚝거리는 새의 둥지나, 걔들이 쪼아 먹는 비밀 씨앗이 있는 게 아니냔 말야.’
‘쳇…….’
‘생각 좀 해봐. 박꽃 누나부터 시작해서 너가 좋아한 여자들이 모두 절름발이였잖아?’
‘나 참…… 볼 게 없어서 다리만 보고 좋아했겠냐. 그건 사람의 부분일 뿐인 걸.’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