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을 눈앞에 두고 주말인 15일 수십만명의 대규모 탄핵 찬반 집회가 서울과 전국 곳곳서 열렸다. 문제는 이들의 찬반 집회가 치킨게임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탄핵 심판 결과가 내 생각과 다르면 수용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42%에 달했다. 국민 절반 가까이가 헌재 결정에 승복할 수 없다는 얘기다. 탄핵이 인용돼도 대선이 정상적으로 치러질지 걱정이고, 탄핵이 기각돼도 국정 운영이 제대로 될지 걱정이다. 이게 법치주의고 민주주의냐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국민이 둘로 나눠지고 나라가 온통 시끄러운 상황서 국민 통합과 갈등을 해소해야 할 당사자인 윤 대통령과 탄핵을 주도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헌재 결과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승복 선언을 하지 않고 있다.
이에 정치권 안팎에선 “여야가 지금이라도 승복 결의안을 채택해 국민적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여야 모두 집회에 나와 헌재 선고 이후 더 심각한 혼란을 예고하는 막말만 쏟아내고 있다.
최근 탄핵 정국에 대해 부담을 느낀 국민의힘 권영세 비대위원장이 “탄핵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밝혔지만, 일부 친윤(친 윤석열)계는 헌재 앞에서 릴레이 시위를 벌이며 탄핵 인용 시 '국민저항권' 운운하며 헌재를 압박하고 있어, 윤 대통령이나 여당 전체의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신뢰성이 떨어진다.
민주당 이 대표도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헌법 질서에 따른 결정에 당연히 승복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국민의힘이야말로 명확히 입장을 밝히라며 주장했다. 이 대표 발언 역시 조건부 승복 발언 같은 느낌이 들어 신뢰성이 떨어진다.
필자의 눈에는 여야의 불편한 승복 선언 주장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장외 여론전을 통한 지지층 결집에 나서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여야 지도부가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 서로 불복 가능성을 의심하며 승복 선언이라는 명분 쌓기만 하고 있는 모양새가 꼴불견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난해 미국 대선서 패한 해리스 후보는 승복 선언을 하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은 선거서 졌을 때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라며 “이 원칙은 다른 원칙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군주제나 독재와 구별짓도록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중의 신뢰를 얻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정당이 아니라 미국 헌법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멋진 승복 선언이었다.
2022년 우리나라 대선서 패한 이재명 후보도 “모든 것은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승복을 선언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인을 향해서는 “축하 인사를 드린다. 통합과 화합의 시대를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대선서 패한 이 두 후보의 승복 선언이 아름다운 이유는 국민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선거전에선 서로 상대방을 치열하게 공격하다 보니 국민이 양분될 수밖에 없지만, 선거가 끝나면 국민이 하나 돼야 나라가 안정되고 그래야 국가 발전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재는 다음 주 중 윤 대통령 탄핵 결과를 발표할 것이다. 이 때 인용되면 윤 대통령이, 기각되면 이 대표가 곧장 승복 선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고, 국민을 존중하는 것이고, 최근 탄핵 정국서 국민을 갈라치기한 빚을 조금이라도 탕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트럼프가 2020년 대선서 패한 후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하며 불복 선언을 하자,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을 무력 점거한 사건으로 인해 사망자 5명, 부상자 121명이 발생하고 700여명이 체포된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고도의 전략상 여야나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헌재 결정이 나기 전까진 승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헌재 선고 후엔 무조건 승복해야 한다. 만약 트럼프식 불복을 하기라도 하면 우리나라는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고, 더 이상 희망을 잃게 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 탄핵이 인용됐다고 윤 대통령이나 국민의힘이 불복하면 국민의힘은 정당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할 것이고, 정당 자체를 해산할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또 탄핵이 기각됐다고 이 대표나 민주당이 불복하면 민주당 역시 결국 국민적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정치 성향에 따라 헌재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헌재 결정을 인정해야 하는 게 성숙한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대통령 탄핵이 중대한 사안인 만큼 선고 전까진 과열 양상이 나타날 수 있지만, 선고 후엔 절대 승복해야 하는 게 성숙한 민주 시민의 자세다.
헌재의 탄핵 선고가 발표되는 날, 승복 선언도 함께 발표돼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한층 더 발전할 것이다. 헌재가 결정문을 작성하는 기간에 윤 대통령과 이 대표도 미리 해리스에 버금가는 국민 통합과 화합을 위한 승복 선언문을 작성해두면 좋겠다. 2022년 대선서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윤 대통령과 이 대표를 믿는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