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표면에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수면 아래 감춰진 사건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피해자는 수십, 수백명인데 사기꾼으로 지목된 인물이 겹친다. 초반에 조치했다면 추가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불을 지른 건 가해자지만 기름을 부은 건 경찰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피해자들은 누굴 더 원망하고 있을까?
<일요시사>는 지난해 2~3월 서울 성북구 성북동서 일어난 ‘빌라 매매 사기’ 의혹을 보도했다. 매수인이 빌라를 계약하고 계약금과 중도금을 지급했지만 소유권을 이전받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서 매수인의 돈은 매도인인 건물주가 아닌 건축업자와 공인중개사 등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시작은 인지
당시 건축업자와 건물주, 공인중개사 등을 사기 등의 혐의로 고소했던 수분양자 A씨는 “피고소인은 우리 빌라뿐만 아니라 성북구 여러 지역에 신축 빌라를 짓는 과정서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건축업자가 ‘바지’를 건물주로 앞세워 대출을 일으키게 한 뒤 빌라를 세우고 공인중개사가 중개 및 분양업무를 맡는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A씨가 건축업자 일당을 고소한 시점은 2022년 5월이다. <일요시사>가 해당 사건을 보도한 시점(지난해 2월13일)에 이미 9개월 이상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었다는 뜻이다. 당시 A씨는 사건을 담당한 성북경찰서의 지지부진한 수사에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경찰이 9개월이나 사건을 뭉개는 동안 어딘가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양산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피고소인에 대한 압수수색·구속수사·출국금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씨의 말은 현실로 드러났다. 성북구뿐만 아니라 동대문구, 광진구, 경기 구리시 등 최소 7개 현장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실제 성북구 사건으로 고소당한 건축업자의 이름이 다른 지역서도 등장했다. A씨를 비롯해 6명이었던 피해자 숫자는 수십명 단위로 불어난 상태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피해액수는 100억원에 이른다. 문제는 경찰 수사마저 성북구 사건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서울경찰청 앞에는 동대문구 용두동·전농동, 성북구 성북동, 경기 구리시 등에서 피해를 당한 분양사기 피해자들이 모였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집회에는 30명가량의 피해자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피켓을 들고 사회자의 선창에 맞춰 구호를 외쳤다.
분양사기 피해를 고발하고 사건을 맡은 동대문경찰서의 빠른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피해자들은 “사기범 홍○○과 그 일당은 계획적으로 우리의 계약금과 중도금을 착취한 채 100억원이 넘는 피해를 남겼다”고 주장했다. 홍○○은 성북구 사건서 수분양자 A씨가 사기 등의 혐의로 고소한 건축업자다. 이어 “범죄가 밝혀진 후 동대문경찰서의 수사만을 믿고 기다려왔지만 1년이 넘도록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가해자들은 아직도 구속조차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집회에 참여한 한 피해자는 “사기꾼에 대한 분노도 크지만 경찰에 대한 실망도 못지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들은 성명서를 통해 ▲사기범 홍○○ 일당의 즉각 구속수사 ▲피해자들의 재산 회복을 위한 신속한 검찰 송치 ▲사기범들의 추가 범행 방지를 위한 강력한 처벌 ▲경찰 수사 지연에 대한 진상규명 등을 요구했다. 사실상 경찰을 향한 목소리다. 이후 진행된 피해자들의 발언도 동대문경찰서의 수사를 촉구하는 데 집중됐다.
성북구 사건에서 나온 이름
동대문구‧구리시에서도 언급
이날 대표 발언에 나선 용두1차 피해자 B씨는 “지난해 5월 분양사기를 당한 사실을 파악하고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빌라는 경매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동대문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데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홍○○ 일당에 대한 구속도, 검찰 송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홍○○ 일당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뻔뻔하게 잘살고 있는데 피해자인 나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통과 생활고에 몸부림치고 있다”며 “최근에는 박○○과 홍○○이 건축설계사무소에 방문해 신축 빌라 두 군데의 설계를 의뢰했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경찰의 조사가 늦어질수록 사기 일당은 매일 만나 여러 꼼수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라며 “홍○○ 일당에 대한 구속수사와 검찰 송치를 강력히 청원한다”고 덧붙였다.
용두2차 신축 빌라 분양사기 피해자 C씨는 “용두1차는 건물이라도 올라갔지만 용두2차는 터파기만 된 그야말로 토지 상태서 경매가 진행돼 이미 제3자가 낙찰까지 받아갔다”며 “사기범들은 신축 빌라 분양으로 돈을 챙기기 위해 투자 정보를 과도하게 부풀려 홍보했고 자금 여력도 없는 상태서 다수의 피해자와 분양계약을 체결해 용두2차에서만 수십억원대의 계약금과 중도금을 가로채는 사기, 배임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C씨 역시 동대문경찰서의 수사를 지적했다. 그는 “사기범들은 용두2차를 경매로 넘긴 뒤 다시 분양해서 팔아먹을 모의까지 한 악덕 중의 악덕이다. 사건의 피해자만 수십명에 육박하고 피해액은 100억원이 넘는데 도대체 왜 아직도 경찰 수사가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들은 동대문경찰서가 해당 사건을 ‘인지수사’ 형태로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인지수사는 범죄사실에 대한 제3자의 신고나 경찰의 직접 발견 등을 통해 수사를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피해자가 직접 범죄사실을 신고하는 고소나 제3자가 신고하는 고발과는 다르다. 또 피해자들은 동대문경찰서가 관할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서 일어난 비슷한 사건을 가져왔다고도 했다.
한 피해자는 “동대문경찰서는 제보를 통해 사건을 처음 파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 7월경 수사 초기에는 경찰이 정말 적극적으로 나섰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알리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해)12월말까지 수사를 마무리할 것이라는 말을 믿었는데 그 일정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더니 1년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라고 말했다.
이 피해자는 “수사가 왜 이렇게 늦어지냐는 피해자들의 항의에도 경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담당 수사관이 피해자들의 전화를 받지 않거나 보낸 자료를 확인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며 “한번은 왜 이렇게 수사가 늦어지냐는 말에 ‘다른 수사를 하느라 바쁘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왜?
동대문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관계자는 인지수사로 시작한 것, 다른 지역의 사건을 가져온 것 등에 대해 ‘맞다’고 인정했다. 해당 관계자는 “수사가 진행 중이라 관련된 내용은 말해줄 수 없다”면서도 “다른 수사를 하느라 (분양사기) 사건 수사가 늦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속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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