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중대재해처벌법 본보기’ 1호 박순관 아리셀 대표

아무 말 없이…첫 번째 철창행

[일요시사 취재1팀] 최윤성 기자 = 공장 화재로 근로자 23명이 사망한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 대표가 지난달 28일 구속됐다. 지난 2022년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 시행 후 업체 대표가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첫 사례다. 중처법 혐의로 구속되는 1호 사건 이후, 같은 날 박영민 영풍 대표도 잇따라 구속되면서 하루 새 1·2호가 나왔다.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기 화성시 배터리 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 사고와 관련해 중처법 위반과 파견법 위반 혐의로 박순관 아리셀 대표가 지난달 28일 구속됐다. 지난 2022년 중처법 시행 이후 업체 대표가 구속된 첫 사례다. 그동안 노동당국이 법 위반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한 적은 있지만, 발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위반 혐의
영장 발부

박 대표는 이날 오전 8시40분께 수원지법서 열린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 출석에 앞서 “재판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불법파견 혐의를 인정하느냐’ ‘안전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유족들에게 할 말 없느냐’는 취재진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박 대표와 박중언 본부장은 법원 지하 통로로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해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족들은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법원에 출석하며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검찰은 박 대표를 중대재해처벌상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이행해야 할 경영책임자로 특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표가 아들인 박 본부장으로부터 꾸준히 업무보고를 받은 데다 안전보건 분야서도 최종 권한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처법은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이에 준해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경영책임자로 규정한다.

검찰은 박 대표가 안전보건 목표와 경영방침 설정, 유해·위험요인 확인·개선 업무 절차 마련, 재해예방 예산 편성·집행, 안전보건 관리책임자 업무수행 평가기준 마련, 작업 중지·노동자 대피 등 대응조치 매뉴얼 마련 등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봤다. 

수원지법 손철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10시 박 대표와 박 본부장, 아리셀 안전보건관리 담당자와 인력 공급업체인 한신다이아 대표 등에 대한 구속 전 영장실질심사를 진행하고, 같은 날 오후 11시40분쯤 박 대표와 박 본부장에 대한 영장을 각각 발부했다. 

손 부장판사는 박 대표와 박 본부장에 대해 “혐의 사실이 중대하다”고 발부 사유를 밝혔다. 박 본부장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및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 등을 받고 있다.

함께 구속영장이 청구된 아리셀의 안전보건관리 담당자와 인력 공급업체 한신다이아의 대표는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23명 사망자 발생 화재 사고
2022년 시행 이후 구속 처음

이와 관련해 아리셀 산재 피해 가족협의회(이하 가족협의회)와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지난달 29일 오전 성명을 통해 “오늘 법원의 결정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며 “구속 결정 소식에 많은 유가족이 기쁨의 눈물을 쏟아냈다”고 밝혔다. 

이어 “유가족이 마주할 현실 앞에 이번 수원지법의 결정이 좋은 영향으로 작용하길 바란다”며 “이번 결정은 참사가 발생한 지 66일을 살아내는 동안 받아온 차별, 혐오, 배제의 말과 시선, 감정의 폭력에 무릎 꿇지 않고 버텨온 시간에 대한 아주 작은 보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수사기관은 강도 높은 보강 수사와 조사를 통해 박순관과 그 일당의 범죄를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한다”며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의 해결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밝혀진 진상과 그에 부합하는 책임자 처벌, 제대로 된 재발방지 대책 마련까지 갈 길은 여전히 멀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피해자에 대한 정당한 배상 역시 요원하다”며 “이를 위해 가족협의회·대책위는 오늘의 기쁨과 자신감으로 다시 힘차게 내일을 맞이할 것이며,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해결될 수 있도록 다시 단결과 연대를 호소드린다”고 덧붙였다. 

가족협의회와 대책위는 지난달 26일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살인자 에스코넥·아리셀 대표이사 박순관 구속 촉구 및 유가족 긴급행동 돌입 기자회견’을 진행한 뒤 수원지법 앞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이들은 박 대표를 비롯한 책임자들의 구속을 촉구했다.

박 대표는 구속과 함께 에스코넥 대표이사직서 사임했다. 에스코넥은 아리셀의 지분 96%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며, 박 대표의 에스코넥 지분율은 13.81%다. 이에 따라 박 대표는 사임서를 제출했고 변경 후 신임 대표이사는 이사회서 선임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에스코넥 외에도 아리셀의 대표를 맡고 있다.

검찰은 화재 사고 직후 형사 3부(이동현 부장검사)와 공공수사부(허훈 부장검사)를 중심으로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경기남부경찰청, 고용노동부와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실시간으로 수사 상황을 공유하며 화재 원인과 위법 사항 규명, 관련 법리 검토에 집중했다. 

경기남부경찰청 수사본부는 아리셀 등 3개 업체 관련 13곳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4차례에 걸쳐 화재 현장에 대한 합동감식을 진행했다. 또 피의자 및 참고인 103명을 131회에 걸쳐 조사해 이 중 18명을 입건한 바 있다. 

총체적 부실
드러난 혐의

경기남부경찰청 화재 사고 수사본부와 고용노동부 경기지청은 지난달 23일 화성서부경찰서에서 수사 결과 합동 브리핑을 열고 공장 화재로 23명이 숨진 경기 화성시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이 지난 2021년 최초 군에 납품할 당시부터 줄곧 검사용 시료를 바꿔치기하는 수법 등으로 데이터를 조작해 국방기술품질원을 속였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방법으로 아리셀은 지난 2021년 12월부터 지난 2월까지 47억원 상당의 전지를 군에 납품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던 아리셀은 지난 4월분 납품을 위한 품질검사에서 처음으로 국방 규격 미달 판정을 받았다.

국방기술품질원이 무작위로 선정한 시료를 바꿔치기하는 과정서 선정된 시료에 적힌 서명을 위조한 사실이 탄로난 것이다. 

아리셀은 올해도 방위사업청과 34억원 상당의 리튬전지 납품계약을 맺고 지난 2월 말 8만3000여개를 납품한 데 이어 4월 말에도 8만3000개의 전지를 납품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규격 미달 판정으로 4월 납품분을 재생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6월분(6만9000여개) 납기일도 다가오자 아리셀은 지난 5월 ‘하루 5000개 생산’이라는 목표를 정하고 제조공정을 무리하게 가동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루 5000개는 아리셀 공장의 일평균 생산량의 2배 수준으로 알려졌다.

아리셀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한신다이아(메이셀의 전신)로부터 근로자 53명을 신규 공급받았다. 이어 숙련되지 않은 이들을 충분한 교육도 없이 주요 제조공정에 투입했다. 제조업의 직접 생산공정 업무는 파견법에 규정된 32개 파견근로 허용 업종에 포함되지 않아 불법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3∼4월 2.2%였던 평균 불량률은 5월 3.3%, 6월 6.5%로 치솟았고 케이스 찌그러짐이나 전지 내 구멍 등 기존에 없던 유형의 불량도 추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아리셀은 문제 해결 없이 케이스를 망치로 쳐 억지로 결합하거나 구멍 난 케이스를 재용접하는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생산을 이어갔다. 

아리셀은 이 과정서 전지에 발열이 생기는 것을 인지해 정상 전지와 분리했지만, 6월분 납기 일정에 쫓기자 위험성을 무시한 채 발열 전지도 납품 대상에 포함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화재 이틀 전인 같은 달 22일 전해액 주입이 완료된 전지 1개가 폭발하는 사고가 났지만, 아리셀은 생산라인을 중단하지 않은 채 가동했다. 

연이은 2호
나란히 구속

비상구 설치 등 대피경로 확보에도 총체적 부실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불이 난 공장 3동 2층에선 3개의 출입문을 통과해야 비상구에 도착할 수 있는데, 그중 일부는 피난 방향과 반대로 열리도록 설치됐다. 항상 열릴 수 있어야 하는 문에 보안장치가 설치돼있어 아이디 카드를 소지한 ‘정규직’만 출입할 수 있었다. 

또 근로자의 채용과 작업 내용 변경 때마다 진행돼야 할 사고 대처 요령에 관한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근로자들은 배터리 폭발 시 즉시 대피해야 한다는 안전 지침을 알지 못한 탓에 최초 폭발이 발생한 오전 10시30분 3초부터 출입문을 통해 근로자가 마지막으로 대피한 30분40초까지의 골든타임 ‘37초’를 놓쳤다.

결국, 23명이 출입문을 불과 20여m를 남겨둔 지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검찰이 아리셀의 모회사 에스코넥에도 불법파견 혐의가 있다고 보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달 29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지난달 28일 수원지법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박 대표의 파견법 위반 혐의를 진술하던 중 에스코넥도 불법파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검찰은 아리셀에 인력을 공급한 무허가 파견업체 메이셀의 실질적 경영자인 정용환씨에 대해선 파견법 위반 여죄 수사가 불가피하다고도 했다. 

정씨가 메이셀 전신인 한신다이아를 운영하면서 에스코넥 안산사업장(삼영피엔텍)에 인력을 공급한 것도 불법파견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대책위는 그간 아리셀뿐 아니라 에스코넥도 불법파견 혐의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아리셀과 메이셀 관계, 한신다이아와 에스코넥 안산사업장 관계가 닮았기 때문이다. 메이셀은 법인 등기상 직업소개 업체 혹은 파견업체가 아닌 일차전지 제조업체로 등록돼있고, 주소지는 아리셀 공장 2층이다. 

아리셀이 불법파견을 피하고자 형식적으로 메이셀을 사내하도급업체처럼 꾸민 것이다. 한신다이아는 휴대전화 부품을 가공하는 에스코넥 안산사업장과 마찬가지로 법인 등기상 휴대폰 부품 제조업체로 등록돼있고, 주소지는 에스코넥 안산공장 2층이다.

에스코넥 안산사업장 역시 파견업체인 한신다이아와 위장도급계약을 체결했을 개연성이 크다.

유가족, 기쁨의 눈물 흘려
“강도 높은 보강수사해야”

중처법 시행 이후 두 번째 구속 사례도 연이어 나왔다. 박영민 영풍 석포제련소 대표이사도 중대재해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박 대표에 이어 몇 시간 차이로 구속된 것이다. 

대구지법 안동지원(재판장 박영수 부장판사)은 지난달 29일 박 대표이사와 배상윤 석포제련소장의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재판부는 “범죄 혐의가 중대하고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다. 

검찰은 전날 진행된 영장실질심사에서 “최근 9개월간 3건의 사망사고가 발생해 3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다”며 “카카오톡 메신저 내용을 지우는 등 증거인멸의 우려가 크다”고 범죄 혐의를 소명했다. 

이날 구속된 박 대표이사는 중처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고, 배 소장은 화학물질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영장실질심사 후 취재진에게 “죄송하다”고 말했으나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았다. 

경북 봉화군 영풍 석포제련소에서는 지난해 12월6일 탱크 모터 교체 작업을 하던 근로자 1명이 비소 중독으로 숨졌으며, 근로자 3명이 상해를 입었다. 지난 3월에는 냉각탑 청소 작업을 하던 하청 노동자 1명이 사망했으며, 지난달 2일에는 하청 노동자 1명이 열사병으로 숨졌다.

안동환경운동연합에 따르면 지난 1997년부터 최근까지 각종 산업재해로 영풍 석포제련소서 사망한 근로자는 총 15명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지난달 23일 박 대표이사를 중처법 위반 혐의로, 배 소장을 산업안전보건법과 화학물질관리법 위반 혐의로 각각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석포제련소 내 유해 물질 밀폐설비 등 안전보건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증거인멸의 우려 등도 있다”고 영장 청구 이유를 밝혔다.

한편, 지난 6월24일 오전 10시31분께 경기 화성시 소재 아리셀 공장 3동 2층서 불이 나 2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CCTV 확인 결과 불은 완제품을 검수하고 포장 작업 등을 하고 있던 공장 3동 2층서 1개의 리튬 배터리 폭발로 시작됐다. 

이어 다른 배터리가 연속해 폭발하면서 급속히 연소가 확대됐다. 화재는 배터리 1개에 불이 붙으면서 급속도로 확산했으며, 대량의 화염과 연기가 발생하고 폭발도 연달아 발생한 탓에, 안에 있던 다수의 작업자가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변을 당했다. 

죽음의 공장
영풍 제련소

해당 공장은 리튬 배터리인 일차전지를 제조하는 곳이다. 불이 난 공장 3동에는 리튬 배터리 완제품 3만5000여개가 보관돼있었다. 수사 결과 아리셀은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비숙련 근로자를 제조 공정에 불법으로 투입했고, 이 과정서 발생한 불량 전지가 폭발 및 화재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됐다. 

<yuncastl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올해 상반기 일터서 쓰러진 ‘296명’

지난해에 비해 사고 건수는 줄었지만, 아리셀 참사의 영향으로 사망자는 오히려 늘었다.

지난달 29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4년 2분기(누적)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사고사망자 수는 296명으로 지난해 동기(289명) 대비 7명(2.4%) 증가했다.

사고 건수는 284건서 266건으로 18건(6.3%) 감소했다.

정부는 23명이 사망한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통계는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보건조치 의무 등을 이행하지 않아 발생하는 산재 사망사고를 분석한 것이다.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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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도 못 뚫은 선관위 방패

감사원도 못 뚫은 선관위 방패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안 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지방선거 이후 선거관리위원회에 쏟아지던 폭발적인 관심이 사그라들고 있다. 그로 인한 나비효과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정작 핵심은 비껴가는 모양새다. 지난 6월3일 치러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이재명정부 들어 처음 열리는 대형 정치 이벤트였던 만큼 국민의 관심이 매우 높았다. 이미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은 압승으로 국정 운영에 동력을 더하고자 했고, 12·3 비상계엄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등으로 궤멸 직전에 몰려 있던 보수 진영은 ‘샤이 보수’를 기대하며 유권자에게 읍소했다. 사상 초유 참정권 침해 결과는 절묘했다. 지방선거의 승패를 가를 때 판단하는 광역단체장 수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16개 시도 중 12곳을 석권했다. 하지만 서울을 내줬고 국민의힘의 텃밭인 대구·경북 지역도 빼앗지 못했다. 선거 운동 초반 16개 시도를 전부 싹쓸이할 것으로 예상했던 상황이라 민주당의 실망은 더욱 컸다. 특히 서울에서의 패배는 뼈아팠다. 이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서울시장을 내주면서 중간 평가를 받았다는 말이 나왔다. 실제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방선거 이후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규제 중심의 부동산 정책이 시장에 먹히지 않았고, 지방선거 직전 상장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의 여파가 지지율을 흔들었다. 여기까지는 지방선거 이후 늘 나타났던 여파였다. 문제는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실한 관리로 선거의 근간 자체가 흔들렸다는 점이다.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시각,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지가 부족한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선거를 총체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기관이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사태 이후 선관위의 대응은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선관위는 투표지가 부족한 투표소의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선관위는 6월5일 투표지를 추가로 송부한 투표소는 67개, 용지가 부족했던 투표소는 50곳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사흘 뒤인 6월8일 140개 투표소에 추가 투표용지가 송부됐고, 이중 91곳에서 투표지가 부족했다는 발표로 바뀌었다. 3일 만에 각각 거의 두 배씩 늘어난 것이다. 결국 조현욱 전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을 위원장으로 한 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다. 진상규명위원회는 10일(6월10일~19일)간의 조사 끝에 “선거 관리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에 관한 책임 소재에 따라 수사 의뢰를 권고한다”며 노태악 전 중앙선관위원장을 비롯한 선관위 수뇌부 등 12명을 지목했다. 채용 비리 의혹·소쿠리 투표 투표지 부족 사태로 민심 폭발 진상규명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 발생 당시의 상황을 보면 상급위원회에 대한 신속한 보고 체계가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며 “상급위원회의 지휘권도 전혀 발동되지 않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 서울시선관위가 투표 시간 연장을 중앙선관위 보고나 논의 없이 결정했으며 송파구선관위가 투표가 종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표를 개시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선관위 해체에 가까운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선관위의 과거 행태도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휴직자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이 10년여 동안 이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선관위의 존재 의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선거 기간 휴직자의 증가로 인력 공백이 생기면서 ‘소쿠리 투표’ 사건 등 부실 관리 문제가 불거졌는데도 이번 선거에서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중앙선관위가 국민의힘 김선교 의원에게 제출한 ‘최근 5차례의 선거 중 휴직자 통계’에 따르면 6·3 지방선거 당일 선관위 직원 179명이 휴직 상태였다. 휴직자의 71%는 육아휴직(127명), 일반 질병(30명), 가족 돌봄 및 해외 동반 휴직(8명), 유학·병역 및 노동조합 전임자(1명) 등의 사유였다. 특히 최근 4년 새 진행된 다섯번의 선거에서 두 차례 이상 휴직한 직원이 97명으로 집계됐다. 2회 휴직자는 77명, 3회 휴직자는 19명이다. 다섯번의 선거 중 4번이나 휴직한 직원도 있었다. 선관위는 휴직자의 대다수가 육아 휴직자인 만큼 법적 권리를 보장했다는 뜻을 밝혔다. 국가공무원법 제71조에 따르면 자녀 양육 및 임신·출산을 사유로 공무원이 휴직을 신청하면 임용권자는 휴직을 명해야 한다. 선관위 직원들의 휴직을 강제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쌓이고 쌓인 국민 분노 하지만 선관위의 항변은 국민의 분노를 꺼뜨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선관위 자체가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점을 방패 삼아 각종 문제를 피해 왔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선관위는 독립성이 생명인 기관이기에 감찰을 받지 않는다. 문제가 발생해도 자체적으로 덮고 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있던 것이다. 이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계기는 선관위의 채용 비리 의혹이었다. 2023년 선관위 전·현직 사무총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의 자녀가 ‘아빠 찬스’를 통해 특혜 채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특혜 채용 의혹이 전방위로 번지자 외부 기관의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선관위는 독립성을 근거로 자체 조사를 고집했다.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하자 선관위는 결국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권익위)의 조사를 받아들였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당시 권익위가 2023년 이전 7년여 동안 선관위의 경력 채용을 전수조사한 결과 58명의 부정 합격 의혹 등 총 353건의 채용 비리가 적발됐다. 권익위는 고의성이 의심되거나 상습적으로 부실채용을 진행한 28명을 고발하고 가족 특혜나 부정 청탁 여부 등 사실관계 규명이 필요한 312건에 대해 수사를 의뢰했다. 일각에서는 권익위와 국회 국정조사만으로는 선관위 조사에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선관위의 조사 수용 방침 자체가 자신들이 그 범위를 정하는 방향으로 잡힌 점도 논란 거리였다. 결국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 전반을 들여다보겠다고 나섰다. 선관위와 감사원 사이의 충돌이 시작된 지점이다. 독립성만 앞세웠다 실제 감사원의 감사가 이뤄지기까지 선관위의 저항은 상당했다. 국민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선관위는 감사원의 감사를 일단 수용하면서도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감사원에 헌법상 독립기구인 선관위를 감사할 권한이 있는지를 다퉈보겠다는 취지였다. 그사이 감사원은 2024년 4월 선관위 내부에 부정 채용이 만연한 사실을 확인하고 비리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선관위 전·현직 직원 27명을 대검찰청에 수사 요청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선관위는 조직 전반에 걸쳐 채용, 인사, 복무 등 관계 법규를 무시하거나 이를 용인하는 행태가 관행화된 상태였다. 고위직부터 중간 간부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자녀 채용을 청탁하는 행위가 빈번했고, 채용 담당자들은 각종 위법·편법적 방법을 동원해 선거철 경력 경쟁 채용을 직원 자녀들이 손쉽게 국가 공무원으로 입직할 수 있는 통로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감사원이 들여다본 2013년 이후 시행된 경력 경쟁 채용 167회를 전수조사한 결과 확인된 위반 건수만 800여건에 달했다. 당시 감사원은 “채용 비리와 관련한 사안은 신속한 수사 착수의 필요성이 크다고 판단해 검찰에 수사를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문제는 감사원이 내놓은 결과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판단으로 무위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헌재는 지난해 2월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에 대해 직무감찰을 할 권한이 없다고 만장일치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감사원의 권한은 행정부 내부의 통제 장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바, 정부와 독립된 헌법 기관인 국회·선관위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며 “감사원이 실시한 직무감찰은 헌법 및 선거관리위원회법에 의해 부여받은 선관위의 독립적인 업무 수행을 침해한 것”이라고 했다. ‘헌법상 독립기관’ 내세워 헌재 판단까지 ‘난공불락’ 감사원장과 감사위원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는데 대통령 소속 기관인 감사원이 선관위에 대해 직무감찰을 할 수 있게 되면 선거 관리의 공정성과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훼손될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다. 헌재의 판단은 법원으로 이어졌다. 지난 6월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선관위 직원 A씨가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을 상대로 낸 견책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감사원은 감사에서 A씨에게 경징계 이상의 처분을 요구했고, 선관위는 징계를 의결, 견책 처분을 내렸다. A씨는 2021년 10월에 발생한 사안에 대해 징계시효 3년이 지난 2025년 3월 징계를 의결했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국가공무원법상 공무원의 징계시효는 성폭력 범죄 등이 아닌 기타 징계 사유의 경우 3년이다. 다만 감사원이 조사 개시를 통보하면 시효가 정지된다. 재판부는 감사원의 감사 자체가 위법이기에 조사 개시 통보를 시효 중단 사유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재가 권한쟁의 심판에 대해 인용한 점을 들어 A씨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토대로 A씨에 대한 징계시효 3년이 이미 지났다고 판단했다. 헌재의 판단은 당시에도 선관위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든다는 말이 나왔다. 이후 투표지 부족 사태가 벌어지면서 선관위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일었다. 특히 투표지 부족 사태는 부정선거 논란으로 이어져 ‘올림픽 공원’ 시위 사태 발생 등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결국 지난달 7일 출범한 선관위 특검에 기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선관위 특검팀(특별검사 이태한)은 지난 7일 출범 한 달째를 맞아 강제수사, 포렌식 검증, 관련자 소환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표지 부족 사태를 비롯해 투표율 허위 입력 정황, 노태악 전 중앙선관위원장 등 선관위 관계자들의 해외 출장 유용 의혹, 투표함 입찰 담합 의혹 등을 들여다보고 있다. 사회에 끼친 악영향도 커 특검의 본 수사 기간은 90일이며 필요한 경우 30일씩 두 차례 연장할 수 있다. 최장 150일 간 수사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일단 인력 충원이 시급한 상황이다. 중대범죄수사청 청장 인선 절차가 늦어지면서 선거 관련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감사원은 선관위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특검은 어떨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