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스파이’ 칼 빼든 정부 딜레마

그때그때 다른 고무줄 형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정부가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대응 및 처벌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법과 선고의 괴리, 어려운 증거 입증 등 현실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가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법안도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후속 대처만 논하고 있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정부의 대응으로 기술유출 범죄가 줄어들지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정부가 산업기술 유출 범죄에 칼을 빼 들었다. 앞으로는 영업비밀을 유출할 경우 최대 7년6개월의 형이, 해외 유출범에겐 최대 12년까지 선고가 가능하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매년 평균 300건을 상회했다. 지난 2019년 376건이었던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2020년 405건까지 치솟았다. 2021년 378건, 2022년 348건, 지난해 379건이었다. 경찰이 불송치하거나 수사 중지한 사건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불방망이
솜방망이 

해외 유출도 지난 5년간 64%나 증가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국가정보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산업기술 해외 유출은 2019년 14건서 지난해 23건으로 늘어났다. 국가핵심기술 유출 피해액은 총 22조에 달한다.

하지만 기술유출범에 대한 처벌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지난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33건 중 무죄 선고가 60.6%, 집행유예가 27.2%를 차지했다. 기소된 유출범의 87.8%가 가벼운 처벌을 받은 셈이다. 2022년에도 해외 유출범에 대한 형량이 평균 1년여 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대검이 지난 2022년 9월 ‘기술유출범죄 수사지원센터’를 설치한 후 1년여간 총 64건을 기소했지만 그중 4건에 대해서만 유죄 선고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에 기업들은 영업비밀 유출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이 강화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왔다. 특허청이 발표한 ‘2023년 지식재산 보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업비밀을 보유한 기업 2곳 중 1곳은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이 강화돼야 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 같은 응답을 내놓은 기업의 비율은 2022년 27.1%서 지난해 46.4%로 2배 이상 높아졌다. 기업 현장서 느끼는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진 것이다.

전문가와 법조계에서는 재판부가 기술유출 범죄를 중대범죄로 분류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법원은 기술유출 범죄 처벌이 기업에 돌아가는 징벌적 손해배상 위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며 “막대한 돈을 받고 기술을 유출하고 짧은 형량을 받으면 유출범에겐 남는 장사”라고 지적했다.

류성원 한국경제인협회 산업혁신팀장은 “산업기술 유출과 관련된 처벌이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사실”이라며 “유죄가 선고되더라도 대부분 실형을 살지 않고 집행유예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초범은 봐주는 경우가 많은데 한 번 유출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받으면 범죄 시도가 늘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해외에서는 기술유출을 간첩죄에 준하는 정도로 심각하게 판단하고 있다”며 “사건의 엄중함을 인지하고 공소시효 등을 연장해 추후에도 기업이 민형사를 제기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매년 평균 300건 이상 발생
5년간 87% 이상 가벼운 처벌 

형사뿐 아니라 민사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 교수는 “민사서 기업의 피해를 상당 부분 인정해 주는 전향적인 판결이 많이 나와야 한다”며 “외국으로 기술이 유출된 경우 재산상 손해를 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이 같은 지적에 정부 관계기관들은 지난해부터 유출범에 대한 처벌 강화와 예방 대책을 논의했다. ▲양형기준 상향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으로 범죄 구성요건 확대 ▲주요 기술유출 경로 규제 대상 포함 ▲국가핵심기술 전면 현행화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운영 강화 ▲국가핵심기술 관련 인력관리 강화 등이다.

정부는 가장 먼저 유출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특허청은 지난 13일 정부대전청사서 ‘기술보호 대책’ 관련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술유출 방지를 위한 4중 안전장치가 완성돼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4중 안전장치는 ▲특허청 방첩기관 지정 ▲기술경찰 수사 범위 확대 ▲양형기준 강화 ▲징벌 배상 확대 등이다.

김시형 특허청장 직무대리는 “지난달 23일 방첩업무 규정(대통령령)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특허청이 방첩기관으로 새롭게 지정됐다”며 “기존 국가정보원, 법무부, 관세청, 경찰청, 해양경찰청, 국군방첩사령부 등 6개 방첩기관과 함께 산업스파이를 잡는 데 적극 동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허청은 공학박사, 변리사, 기술사 등 1300여명의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계 첨단기술정보인 특허정보를 5억8000만개 보유하고 있다. 이 같은 정보를 국가정보원 산하 ‘방첩정보공유센터’와 공유하고 다른 방첩기관서 수집한 기술유출 관련 첩보와 상호 연계하는 등 산업스파이를 잡기 위해 기관 간 긴밀히 협력해 나갈 방침이다.

김 직무대리는 “기술유출 시도가 지속 발생하고 있으나 유출범죄가 지닌 심각성에 비해 처벌은 미흡한 실정이었다”며 “양형기준을 높여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해 해외 유출의 경우 9년서 12년으로 늘렸고(국내 유출은 6년서 7년6개월), 초범도 곧바로 실형이 선고되도록 집행유예 기준을 강화해 법적 억제력을 높였다”고 말했다.

지난 3월25일에 열린 제130차 대법원 양형위원회서도 산업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의결안을 발표해 이에 대한 사법적 대응역량 강화를 선언했다.

“증거 입증
어려워…”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는 ‘지식재산권범죄’로 분류돼있던 기존의 양형기준을 ‘지식재산 및 기술침해범죄’로 수정해 기술침해범죄를 사법적으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산업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도 대폭적으로 강화했는데, 처벌의 근거가 되던 ‘영업비밀 침해행위’의 양형기준을 이전의 최대 6년서 8년으로 상향했다.


국가의 핵심기술을 외국으로 유출한 경우에는 최대 12년, 여기에 더해 비밀유지의무가 있는 사람이거나 계획적·조직적 범행, 동종의 누범일 경우에는 2분의 1을 가중해 최대 18년까지 가능하게 했다. 일반산업기술 사건은 국외 침해에 대해서는 최대 15년, 국내 침해에 대해서는 최대 9년까지도 가능토록 했다. 

기술유출 방지를 위해 특허청 서울사무소서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부경법)’ 제도개선위원회가 출범해 활동을 본격화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영업비밀 분야 석학, 영업비밀 사건 실무경험이 많은 변호사, 대·중소기업서 실제 영업비밀 보호업무를 담당하는 산업계 전문가 등 12명으로 구성돼 첨단기술 등 영업비밀 유출 방지를 위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부경법은 위조 상품의 유통과 타인의 아이디어 탈취 등 부정경쟁 행위를 방지하고, 영업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법률이다.

특허청은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영업비밀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는 현장 상황을 반영해 영업비밀 침해에 관한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를 3배서 5배, 조직적인 영업비밀 침해에 대응할 수 있도록 법인의 벌금형을 행위자에게 부과된 벌금의 최대 3배로 강화하는 등 부경법을 지속적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처벌을 강화해도 침해된 영업비밀의 가치·중요도·피해 규모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면, 실제 처벌로 이어지기는 어려워 재판 과정서 이를 보완할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영업비밀 침해 형사재판서 피해자의 변호사가 영업비밀을 판사에게 직접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변호사의 진술권 도입이 대표적인 예다. 특허청은 연말까지 위원회서 논의된 주요 쟁점을 정리하고, 내년부터 선별적으로 입법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정인식 특허청 산업재산보호협력국장은 “세계 각국이 자국의 첨단기술 보호를 강화하고, 공급망을 재편하는 상황인 점을 고려할 때 영업비밀 보호는 기업과 국가 모두의 경쟁력에 직결되는 문제”라며 “특허청은 부정경쟁행위와 영업비밀에 관한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모아 시의적절하고 체계적으로 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수립해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했다.

6년→8년
최대 12년

다만 처벌 기준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재판관들의 법 감정이 해당 기준에 못 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지난 10일 핵심기술들을 중국 신생 경쟁업체에 유출한 산업스파이 4명이 각각 징역 1년~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대구지법 서부지원 제5형사단독 김희영 부장판사는 10일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 등 4명에게 징역 1년~2년 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피고인 중 수사에 협조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법정 구속됐다.

A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대구 소재 반도체 장비제작 업체는 3억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김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은 피해기업 영업비밀이 중국서 사용될 것임을 잘 알면서도 부정한 이익을 얻기 위해 사용·누설했다”며 “이런 범죄를 가볍게 처벌한다면 해외 경쟁업체가 우리 기업이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온 기술력을 손쉽게 탈취하는 것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양형 이유에는 가볍게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으면서도 징역 1~2년의 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국민들이 느끼는 법 감정과 판사들이 느끼는 법 감정이 너무 다르다고 지적했다. 

한 판사출신 변호사는 “판사들이 처벌 기준에 맞지 않게 선고하는 경우가 많다”며 “처벌 기준보다 낮게 처벌하는 판례가 많이 쌓인다면 범죄자들은 처벌 기준에 따른 선고에도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양형위의 심의 결과에 맞는 선고를 내리도록 판사들의 법 감정을 다시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기술 유출 범죄를 입증하는 일이 어려운 점도 지적된다.

‘기술 유출’ 들쭉날쭉 판결, 왜?
처벌 규정·양형기준 대폭 강화

한 예로 한 드론 업체는 연구소 직원들이 회사의 핵심기술을 활용한 회사를 설립한 것에 대해 영업상비밀누설, 부정경쟁방지법 등으로 고소했지만 회사 기밀을 빼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연구한 성과라고 주장하면서 재판이 공전하고 있기도 하다.

또 예전처럼 USB에 핵심기술 괸련 정보를 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직원들의 ‘머릿속에 입력된 기술’을 빼내오는 방식으로 유출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어 기술을 빼내올 것을 요구한 정황이 있어도 이를 쉽게 증명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한 첨단기술 업계 관계자는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기술 유출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어 법의 도움을 못 받고 있는 것이 업계의 현실”이라며 “또 재판이나 수사 과정서 해당 기술을 전부 공개할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법조계에서는 기술 유출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디스커버리(증거공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전에 당사자가 증거를 미리 교환하는 절차다.

한 기술유출 전문 변호사는 “기술 유출 재판의 핵심은 증거 확보”라며 “일단 기술 개발이 완료되고 나면 어떤 기술이 유출됐고 어떻게 사용됐는지 추적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피해 기업이 기술 유출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혀 있는 상황서 디스커버리 제도는 유용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기업들은 기술 유출 정황을 발견했을 때 형사절차를 먼저 개시한다. 기업이 자체적으로 확보하거나 민사소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거의 없어 압수수색 등 수사 권력의 힘을 빌려 증거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활성화되면 재판 시작 전 기술 유출 증거를 확인해 재판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박형남 사법정책연구원장은 “민사소송이든 형사소송이든 기술 유출을 판단하고 피해 규모를 산정하게 위해서는 투명한 정보와 증거 공개가 필수다. 기술 유출뿐 아니라 민사소송서 디스커버리는 중요한 문제”라며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제3의 기관에게 감정받아 가치를 산정하는 방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기술 유출에 관한 처벌 규정은 강화됐지만 산업기술보호법의 규제를 받는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규정은 아직 국회서 계류 중이다. 21대 국회 임기 종료일(오는 29일)이 2주 정도 남은 가운데 반도체·이차전지(배터리) 등 국가핵심기술 유출 방지를 골자로 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 통과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에선 이 법안을 작년 11월 통과시킨 이후 12월 소위 심사를 한번 진행한 상태다. 법제사법위원회의(법사위) 법안 심의를 거쳐 본회의 통과라는 절차를 남겨놓고 있다.

국가핵심기술
아직 계류 중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만약 법안 통과가 되지 않는다면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될 것이고 22대 국회서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고 심의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반복될 것”이라며 “촉각을 다투는 글로벌 반도체 경쟁서 밀리는 등 심각한 상황서도 우리 기업, 정부는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임직원 상당수가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유죄로 판단돼도 법정형 대비 양형이 낮은 수준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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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