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스파이’ 칼 빼든 정부 딜레마

그때그때 다른 고무줄 형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정부가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대응 및 처벌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법과 선고의 괴리, 어려운 증거 입증 등 현실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가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법안도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후속 대처만 논하고 있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정부의 대응으로 기술유출 범죄가 줄어들지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정부가 산업기술 유출 범죄에 칼을 빼 들었다. 앞으로는 영업비밀을 유출할 경우 최대 7년6개월의 형이, 해외 유출범에겐 최대 12년까지 선고가 가능하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매년 평균 300건을 상회했다. 지난 2019년 376건이었던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2020년 405건까지 치솟았다. 2021년 378건, 2022년 348건, 지난해 379건이었다. 경찰이 불송치하거나 수사 중지한 사건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불방망이
솜방망이 

해외 유출도 지난 5년간 64%나 증가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국가정보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산업기술 해외 유출은 2019년 14건서 지난해 23건으로 늘어났다. 국가핵심기술 유출 피해액은 총 22조에 달한다.

하지만 기술유출범에 대한 처벌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지난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33건 중 무죄 선고가 60.6%, 집행유예가 27.2%를 차지했다. 기소된 유출범의 87.8%가 가벼운 처벌을 받은 셈이다. 2022년에도 해외 유출범에 대한 형량이 평균 1년여 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대검이 지난 2022년 9월 ‘기술유출범죄 수사지원센터’를 설치한 후 1년여간 총 64건을 기소했지만 그중 4건에 대해서만 유죄 선고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에 기업들은 영업비밀 유출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이 강화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왔다. 특허청이 발표한 ‘2023년 지식재산 보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업비밀을 보유한 기업 2곳 중 1곳은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이 강화돼야 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 같은 응답을 내놓은 기업의 비율은 2022년 27.1%서 지난해 46.4%로 2배 이상 높아졌다. 기업 현장서 느끼는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진 것이다.

전문가와 법조계에서는 재판부가 기술유출 범죄를 중대범죄로 분류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법원은 기술유출 범죄 처벌이 기업에 돌아가는 징벌적 손해배상 위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며 “막대한 돈을 받고 기술을 유출하고 짧은 형량을 받으면 유출범에겐 남는 장사”라고 지적했다.

류성원 한국경제인협회 산업혁신팀장은 “산업기술 유출과 관련된 처벌이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사실”이라며 “유죄가 선고되더라도 대부분 실형을 살지 않고 집행유예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초범은 봐주는 경우가 많은데 한 번 유출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받으면 범죄 시도가 늘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해외에서는 기술유출을 간첩죄에 준하는 정도로 심각하게 판단하고 있다”며 “사건의 엄중함을 인지하고 공소시효 등을 연장해 추후에도 기업이 민형사를 제기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매년 평균 300건 이상 발생
5년간 87% 이상 가벼운 처벌 

형사뿐 아니라 민사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 교수는 “민사서 기업의 피해를 상당 부분 인정해 주는 전향적인 판결이 많이 나와야 한다”며 “외국으로 기술이 유출된 경우 재산상 손해를 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이 같은 지적에 정부 관계기관들은 지난해부터 유출범에 대한 처벌 강화와 예방 대책을 논의했다. ▲양형기준 상향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으로 범죄 구성요건 확대 ▲주요 기술유출 경로 규제 대상 포함 ▲국가핵심기술 전면 현행화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운영 강화 ▲국가핵심기술 관련 인력관리 강화 등이다.

정부는 가장 먼저 유출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특허청은 지난 13일 정부대전청사서 ‘기술보호 대책’ 관련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술유출 방지를 위한 4중 안전장치가 완성돼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4중 안전장치는 ▲특허청 방첩기관 지정 ▲기술경찰 수사 범위 확대 ▲양형기준 강화 ▲징벌 배상 확대 등이다.

김시형 특허청장 직무대리는 “지난달 23일 방첩업무 규정(대통령령)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특허청이 방첩기관으로 새롭게 지정됐다”며 “기존 국가정보원, 법무부, 관세청, 경찰청, 해양경찰청, 국군방첩사령부 등 6개 방첩기관과 함께 산업스파이를 잡는 데 적극 동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허청은 공학박사, 변리사, 기술사 등 1300여명의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계 첨단기술정보인 특허정보를 5억8000만개 보유하고 있다. 이 같은 정보를 국가정보원 산하 ‘방첩정보공유센터’와 공유하고 다른 방첩기관서 수집한 기술유출 관련 첩보와 상호 연계하는 등 산업스파이를 잡기 위해 기관 간 긴밀히 협력해 나갈 방침이다.

김 직무대리는 “기술유출 시도가 지속 발생하고 있으나 유출범죄가 지닌 심각성에 비해 처벌은 미흡한 실정이었다”며 “양형기준을 높여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해 해외 유출의 경우 9년서 12년으로 늘렸고(국내 유출은 6년서 7년6개월), 초범도 곧바로 실형이 선고되도록 집행유예 기준을 강화해 법적 억제력을 높였다”고 말했다.

지난 3월25일에 열린 제130차 대법원 양형위원회서도 산업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의결안을 발표해 이에 대한 사법적 대응역량 강화를 선언했다.

“증거 입증
어려워…”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는 ‘지식재산권범죄’로 분류돼있던 기존의 양형기준을 ‘지식재산 및 기술침해범죄’로 수정해 기술침해범죄를 사법적으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산업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도 대폭적으로 강화했는데, 처벌의 근거가 되던 ‘영업비밀 침해행위’의 양형기준을 이전의 최대 6년서 8년으로 상향했다.


국가의 핵심기술을 외국으로 유출한 경우에는 최대 12년, 여기에 더해 비밀유지의무가 있는 사람이거나 계획적·조직적 범행, 동종의 누범일 경우에는 2분의 1을 가중해 최대 18년까지 가능하게 했다. 일반산업기술 사건은 국외 침해에 대해서는 최대 15년, 국내 침해에 대해서는 최대 9년까지도 가능토록 했다. 

기술유출 방지를 위해 특허청 서울사무소서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부경법)’ 제도개선위원회가 출범해 활동을 본격화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영업비밀 분야 석학, 영업비밀 사건 실무경험이 많은 변호사, 대·중소기업서 실제 영업비밀 보호업무를 담당하는 산업계 전문가 등 12명으로 구성돼 첨단기술 등 영업비밀 유출 방지를 위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부경법은 위조 상품의 유통과 타인의 아이디어 탈취 등 부정경쟁 행위를 방지하고, 영업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법률이다.

특허청은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영업비밀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는 현장 상황을 반영해 영업비밀 침해에 관한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를 3배서 5배, 조직적인 영업비밀 침해에 대응할 수 있도록 법인의 벌금형을 행위자에게 부과된 벌금의 최대 3배로 강화하는 등 부경법을 지속적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처벌을 강화해도 침해된 영업비밀의 가치·중요도·피해 규모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면, 실제 처벌로 이어지기는 어려워 재판 과정서 이를 보완할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영업비밀 침해 형사재판서 피해자의 변호사가 영업비밀을 판사에게 직접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변호사의 진술권 도입이 대표적인 예다. 특허청은 연말까지 위원회서 논의된 주요 쟁점을 정리하고, 내년부터 선별적으로 입법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정인식 특허청 산업재산보호협력국장은 “세계 각국이 자국의 첨단기술 보호를 강화하고, 공급망을 재편하는 상황인 점을 고려할 때 영업비밀 보호는 기업과 국가 모두의 경쟁력에 직결되는 문제”라며 “특허청은 부정경쟁행위와 영업비밀에 관한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모아 시의적절하고 체계적으로 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수립해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했다.

6년→8년
최대 12년

다만 처벌 기준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재판관들의 법 감정이 해당 기준에 못 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지난 10일 핵심기술들을 중국 신생 경쟁업체에 유출한 산업스파이 4명이 각각 징역 1년~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대구지법 서부지원 제5형사단독 김희영 부장판사는 10일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 등 4명에게 징역 1년~2년 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피고인 중 수사에 협조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법정 구속됐다.

A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대구 소재 반도체 장비제작 업체는 3억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김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은 피해기업 영업비밀이 중국서 사용될 것임을 잘 알면서도 부정한 이익을 얻기 위해 사용·누설했다”며 “이런 범죄를 가볍게 처벌한다면 해외 경쟁업체가 우리 기업이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온 기술력을 손쉽게 탈취하는 것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양형 이유에는 가볍게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으면서도 징역 1~2년의 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국민들이 느끼는 법 감정과 판사들이 느끼는 법 감정이 너무 다르다고 지적했다. 

한 판사출신 변호사는 “판사들이 처벌 기준에 맞지 않게 선고하는 경우가 많다”며 “처벌 기준보다 낮게 처벌하는 판례가 많이 쌓인다면 범죄자들은 처벌 기준에 따른 선고에도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양형위의 심의 결과에 맞는 선고를 내리도록 판사들의 법 감정을 다시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기술 유출 범죄를 입증하는 일이 어려운 점도 지적된다.

‘기술 유출’ 들쭉날쭉 판결, 왜?
처벌 규정·양형기준 대폭 강화

한 예로 한 드론 업체는 연구소 직원들이 회사의 핵심기술을 활용한 회사를 설립한 것에 대해 영업상비밀누설, 부정경쟁방지법 등으로 고소했지만 회사 기밀을 빼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연구한 성과라고 주장하면서 재판이 공전하고 있기도 하다.

또 예전처럼 USB에 핵심기술 괸련 정보를 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직원들의 ‘머릿속에 입력된 기술’을 빼내오는 방식으로 유출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어 기술을 빼내올 것을 요구한 정황이 있어도 이를 쉽게 증명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한 첨단기술 업계 관계자는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기술 유출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어 법의 도움을 못 받고 있는 것이 업계의 현실”이라며 “또 재판이나 수사 과정서 해당 기술을 전부 공개할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법조계에서는 기술 유출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디스커버리(증거공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전에 당사자가 증거를 미리 교환하는 절차다.

한 기술유출 전문 변호사는 “기술 유출 재판의 핵심은 증거 확보”라며 “일단 기술 개발이 완료되고 나면 어떤 기술이 유출됐고 어떻게 사용됐는지 추적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피해 기업이 기술 유출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혀 있는 상황서 디스커버리 제도는 유용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기업들은 기술 유출 정황을 발견했을 때 형사절차를 먼저 개시한다. 기업이 자체적으로 확보하거나 민사소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거의 없어 압수수색 등 수사 권력의 힘을 빌려 증거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활성화되면 재판 시작 전 기술 유출 증거를 확인해 재판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박형남 사법정책연구원장은 “민사소송이든 형사소송이든 기술 유출을 판단하고 피해 규모를 산정하게 위해서는 투명한 정보와 증거 공개가 필수다. 기술 유출뿐 아니라 민사소송서 디스커버리는 중요한 문제”라며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제3의 기관에게 감정받아 가치를 산정하는 방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기술 유출에 관한 처벌 규정은 강화됐지만 산업기술보호법의 규제를 받는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규정은 아직 국회서 계류 중이다. 21대 국회 임기 종료일(오는 29일)이 2주 정도 남은 가운데 반도체·이차전지(배터리) 등 국가핵심기술 유출 방지를 골자로 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 통과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에선 이 법안을 작년 11월 통과시킨 이후 12월 소위 심사를 한번 진행한 상태다. 법제사법위원회의(법사위) 법안 심의를 거쳐 본회의 통과라는 절차를 남겨놓고 있다.

국가핵심기술
아직 계류 중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만약 법안 통과가 되지 않는다면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될 것이고 22대 국회서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고 심의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반복될 것”이라며 “촉각을 다투는 글로벌 반도체 경쟁서 밀리는 등 심각한 상황서도 우리 기업, 정부는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임직원 상당수가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유죄로 판단돼도 법정형 대비 양형이 낮은 수준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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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