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내 집 마련의 꿈이 깨지고 있다. 꿈으로 향하는 길목마저 차단된 사람이 속출하는 상황이다. 2023년 전국을 달군 ‘전세사기’ 사건이 해를 넘겨서도 피해자들의 목을 조르고 있다. 엄동설한에 갈 곳 없이 길바닥에 나앉은 이들은 이제 눈물조차 말라버렸다.
최근 몇 년 새 집값이 요동을 쳤다. 20번이 넘는 부동산정책에도 집값은 계속해서 ‘우상향’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사야 한다는 움직임이 20~30대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영끌족의 등장은 부동산시장을 뒤흔들었다. ‘내 집’에 대한 욕망이 부풀어 오른 시기였다.
청년들이…
하지만 윤석열정부가 집값 잡기에 나서면서 돈줄을 조이기 시작했다. 금리가 오르자 대출을 받아 집을 사려는 수요가 줄었다. 집값이 떨어지고 갭투자를 했던 집주인의 돈줄 또한 마르자 이른바 ‘깡통 주택’이 등장했다. 집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집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의도적으로 세입자의 돈을 떼어 먹으려는 목적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세사기의 시작이었다. 전세 세입자는 보증금을 내고 2년 동안 ‘안정된 주거’를 얻는다.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에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보증금을 돌려줘야 한다는 약속이 존재한다.
전세사기는 이 약속이 ‘의도적으로’ 깨졌을 때 발생한다.
서울서 시작된 전세사기 사건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인천, 경기도 등 수도권 일대와 부산, 대전 등지로 크게 확산됐다. 문제는 피해자 가운데 70%가 10~30대 청년층이었다는 점이다. 전세사기 사건이 다수 발생한 신축 다세대주택은 취업에 성공한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등이 선호하는 주거 형태였기 때문이다.
‘건축왕’ ‘빌라왕’ 등 집주인이 집을 수백채씩 갖고 있으면서도 전세보증금은 돌려 줄 수 없는 상황이 전국 각지서 잇따라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세입자의 삶은 풍선 터지듯 망가졌다. 2023년 상반기 전세사기 피해가 제일 극심했던 인천에서는 피해자 4명이 연이어 극단적 선택으로 목숨을 끊었다.
건축업자인 A씨는 2021년 3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인천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 563채의 전세보증금 453억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로 2023년 6월 기소됐다. 검찰은 사기 등 혐의로 A씨와 바지 임대인·공인중개사·중개보조원 등 일당 35명을 기소하면서 이 가운데 18명에게 ‘범죄집단조직죄’를 적용했다.
대전에서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까지 속인 전세사기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 규모만 3000세대로 추정되는 대규모 사건이었다. 지역 부동산 법인회사 대표 B씨는 2021년 4월부터 싼값에 땅을 사서 건물을 짓거나 갭투자 방식으로 건물을 사들였다.
집주인 잡혀도 보증금 회수는…
특별법 개정 외치면서 거리로
B씨가 확보한 건물은 200여채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B씨는 LH의 전세 지원 제도를 악용해 159억원 상당을 가로챈 혐의로 이미 기소된 상태다.
전세사기 피해가 청년층에 집중되고 그 수와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정치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전세사기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등지는 일이 거듭 발생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구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전세제도의 근본적인 취약점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12월19일 열린 전세사기피해자지원위원회 제17차 회의서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는 649건을 심의한 끝에 총 470건을 전세사기 피해자 등으로 최종 가결했다고 밝혔다. 누적 결정 건수는 1만명(1만256건)을 상회한다.
국토부는 “전세사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차인은 거주지 관할 시·도에 피해자 결정 신청을 할 수 있고 위원회 의결을 거쳐 피해자로 결정된 사람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피해지원센터와 지사를 통해 지원 대책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문제는 정부 대책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법제화는 더디다는 점이다. 12월21일 전국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국회 본청 앞에 결집했다. 이들은 “정부와 국회는 실효성 있는 특별법 개정과 지원 대책 마련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실태조사 결과 전세사기 피해가구 중 정부 지원 대책을 받는 비율은 17.5%에 불과하고 지난 6개월간 LH의 피해주택 매입 실적도 0건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특별법과 지원 대책이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정치권은 전세사기 피해자의 구제를 두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전세사기 특별법을 빨리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국민의힘과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가 사인 간의 계약서 발생한 사안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민주당 등 야권은 ‘선 구제 후 구상’ 방안을 도입하자고 주장 중이다. 공공기관이 피해 임차인의 보증금 반환 채권을 매입해 피해자를 우선 구제하고 후에 책임 있는 이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자는 의미다. 이에 대해 정부여당은 형평성 문제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선 구제 후 구상’ 방안 도입 주장
“사인간 계약” 개입 불가 입장 고수
일단 전세사기 피해가 컸던 서울 강서구는 자체적인 지원에 나섰다. 강서구는 지난 12월15일부터 전세보증금 회수를 위한 피해자의 소송 수행 경비를 지원하고 있다. 고찬양 강서구의원 대표 발의에 따라 ‘전세피해 및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조례’를 개정해 피해자가 경·공매, 보증금 지급명령, 보증금 반환청구 등 소송으로 보증금을 회수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세대당 100만원씩 지원한다고 밝혔다.
앞서 강서구는 전세사기 피해자에 대한 실태조사도 진행했다. 강서구는 사전면담과 온라인·유선 상담을 통해 피해자 489명과 전세사기 특별법상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61명 등 총 550명을 대상으로 피해 현황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피해자 가운데 30대 비율이 56.3%로 가장 높았다. 피해액은 2억~3억원이 58.1%로 나타났다.
눈여겨볼 부분은 전세사기 피해자의 행보다. 응답자의 64.1%는 우선매수권 등을 행사해 현재 피해주택을 매입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선택권이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집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피해주택을 낙찰받아도 피해자 입장에서는 취득세 납부, 전세대출 상황, 입찰보증금 마련에 필요한 이자 등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오갈 데 없는 신세라 피해주택에 계속 거주 중인 임차인 가운데 70.3%는 임대인이 없어 건물 누수, 단전, 단수 등 유지 보수에 불편을 겪었다. 이들 역시 보증금 회수를 위한 법적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무너졌다
진교훈 강서구청장은 “실태조사에서도 나타났지만 현행 제도가 사회적 재난인 전세사기 피해자를 구제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정부의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 및 국회의 특별법 보완, 예산 지원 등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한편 우리 구에서 가용할 수 있는 행정력을 총동원해 피해자 지원과 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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