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여의도 뒤흔들 민주당 공천 살생부

잔가지 쳐낼 칼춤이 시작됐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총선을 앞둔 이맘때 즈음이면 ‘공천 살생부’가 구설처럼 떠돌기 마련이다. 이는 정치 생명과 직결되는 만큼 국회의원들에게 있어 진위와 상관없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때마침 더불어민주당이 공천룰을 일부 수정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체제로 총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방해되는 잔가지를 쳐내기 위한 무자비한 칼춤이 벌어질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지난 7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총선 경선서 현역 의원에게 주어진 페널티를 강화하고, 전당대회 때 대의원 비중을 낮추는 당헌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강성 지지자를 뜻하는 이른바 ‘개딸’(개혁의 딸)이 요구해온 사안이었던 만큼 친명(친 이재명) 세력이 강해질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이 대표의 입김이 들어간 ‘비명(비 이재명)계 찍어내기’ 꼼수라는 지적이다.

지도부
데스노트

이날 통과한 안건은 당헌 제100조와 제25조 개정안이다. 현역 의원 하위 10%에 관한 경선 득표 감산 비율을 기존 20%서 30%로 상향하고, 전당대회서 권리당원이 행사하는 표의 반영 비율을 늘리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앞서 당 최고위원회는 지난달 24일 이 같은 내용의 규정 개정안을 의결했다. 두 안건은 당무위원회를 통과했고, 지난 7일 치러진 중앙위 투표 결과 최종 확정됐다.

이날 이 대표는 투표에 앞서 “당원들의 의사가 당에 많이 반영되는 민주 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대의원과 권리당원 간 표의 등가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당헌 개정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역 의원 평가와 관련해서도 “정권을 되찾아오기 위해서는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며 “공천 시스템에 약간 변화를 줘서 혁신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당내 비주류로 꼽히는 의원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이번 개정안은 특정 세력을 솎아내기 위한 ‘장치’라는 의혹이 나오면서다.

특히 하위 10%를 가려내기 위한 평가 과정이 일부 불투명하다는 점에 공통된 의견을 모았다. 현역 의원 평가 지표에 따르면 평가점수는 총 1000점이다. 구체적으로는 ▲의정활동(380점) ▲지역활동(270점) ▲기여활동(250점) ▲공약이행활동(100점)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대부분은 ▲대표발의 법안 수 ▲본회의·상임위 출석률 ▲공약이행도 등 측정 가능한 부분이지만 가장 배점이 높은 의정활동(380점)은 정성 평가로 진행된다. 특정인의 주관적 견해가 개입될 여지가 있는 만큼 불공정한 심사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한 비명계 의원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개정이 당헌 위반이라 할지라도 이 대표 체제는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고, 결국 성사되게 할 것”이라며 “하위 10%에 찍히는 순간 살생부처럼 이름이 나도는 건 시간문제다. 거기에 이름을 올리는 건 결국 민주당의 누구겠느냐”고 소리 높였다.

총선 앞두고 공천룰 ‘만지작’
마침내 다가오는 복수의 시간?

이날 표결에 앞서 진행된 중앙위 자유토론서 ‘원칙과 상식’ 소속인 민주당 이원욱 의원은 독일의 ‘나치’ 정당을 언급하면서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포퓰리즘과 정치권력이 일치될 때 독재권력이 된다”며 “이재명 대표가 말하는 국민 눈높이라는 게, 그 국민이 과연 누구인지 굉장히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일부 의원은 투표 전날인 지난 6일, 민주당 중앙위원들에게 서한을 발송해 부결을 호소하기도 했다. 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집행부가 편의주의적 태도로 당헌을 누더기로 만들고 원칙과 기준을 무너뜨리는 내용이므로 부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미 선출직공직자평가위가 구성돼 현역 의원에 대한 각종 평가가 진행됐고, 당원과 지역주민 대상 여론조사도 진행되고 있다”며 “경기 도중에 규칙을 바꾸거나 시험 도중 배점을 바꾸는 일은 부정시비를 스스로 일으키는 불공정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정치권에 따르면 민주당은 지난 4일부터 국회의원 평가 여론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민주당 전해철 의원도 자신의 SNS를 통해 “시스템 공천은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지도부 등이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없도록 공천심사 전반에 걸친 내용을 당헌당규에 담아 제도화한 것”이라며 선거를 앞두고 급작스럽게 바꾸는 것은 나쁜 선례를 만드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총선기획단은 민주당의 혁신을 위한 선택이라며 진압에 나섰다. 총선기획단 소속 민주당 의원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일부 의원님들께서 우려하시는 지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정성 평가에 주관적 의견이 개입될 우려가 있는지 총선기획단 회의를 통해 확인해봤다”며 “평가위원회는 우리 당과 상관이 없는, 제3자의 독립 기구로 운영되기 때문에 당내 의원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얼룩진
과거사

다만 “주관적으로 ‘찍어내기’ 우려에 관해서는 아예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서도 시스템상 특정 의원만 솎아낼 매우 가능성은 낮다고 시사했다. 공정성과 관련한 문제가 계속해서 지적된다면 당 차원서 투명성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도부를 비롯한 친명계 역시 입을 모아 숙청 시나리오에 발 빠르게 선을 그었다. 이들은 당의 균열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 당무감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방침도 세웠다.

당무감사는 현역 의원 평가(1000점) 중 80점에 불과하지만 현역의 지역구 관리 현황을 서열화할 수 있는 민감한 지표 중 하나로 꼽힌다. 앞서 국민의힘이 당무감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예고된 대대적인 물갈이로 인해 혼란에 빠졌던 만큼 민주당은 당내 안정에 무게를 뒀다는 해석이 나온다.

민주당은 당내 균열을 무릅쓰고 총선을 5개월 앞둔 시점서 공천룰을 변경했다. 그 의중을 두고 비명계의 쓴소리가 이어졌지만 일각에서는 총선 승리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해석했다.

정치권에서는 총선 전에 이 대표가 자신의 세력을 탄탄히 구축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내다봤다. 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나 문재인 전 대통령과 달리 이 대표의 구심점이 약하다는 평이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친낙(친 이낙연), 친문(친 문재인), 친명(친 이재명) 등으로 민주당의 세가 나뉜다면 당내 혼란은 불가피하다. 만일 뜻을 달리하는 이들이 힘을 합쳐 신당을 창당할 경우 표가 분산되는 것 역시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이 대표 체제로 총선을 치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있어 걸림돌이 되는 세력은 뽑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뒤따르는 이유다.

따라서 이번 사태로 친문·친낙 세력이 가시방석에 앉았다는 게 일부 정치권 관계자의 중론이다. 성향이 짙거나 주요 직을 맡았던 의원이라면 더욱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깊어진
갈등 골

‘팬덤 정치’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특정 세력의 국회의원이 살생부에 이름을 올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계기도 여러 가지다. 개딸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박(겉은 민주당, 속은 국민의힘을 뜻하는 은어) 리스트’나 ‘공천 자객’이 가능한 지역구 지도는 두고두고 온라인서 회자된다.

일부는 이 대표에 관한 체포동의안에 가결표를 던진 것으로 예상되는 의원을 색출한 뒤 반란군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이들이 수박으로 칭하는 부류는 대부분 친낙계지만, 간혹 친문계 의원이 이름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강성 친명계가 두 인물과 대립하는 이유는 그들이 과거 이 대표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분노 때문이다.

지난 19대 대선 경선서 당시 이재명 후보는 같은 당 문재인 후보의 강성 지지자로부터 ‘문자 폭탄’을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 1위 후보이자 두터운 지지층을 보유한 그를 향해 날을 겨누자 친문의 반감을 산 것이다.

이 후보는 토론회 등에서 문 후보를 향해 “기득권자들과 재벌의 사외이사 등이 문 후보 주변에 대규모로 몰린다” “기득권 대연정이다”라고 말하는 등 거침없는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이를 두고 친문 진영에서는 ‘수위를 넘은 발언’이라고 질타했다. 하루빨리 이 후보를 탈당시켜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이런 와중에도 이 후보는 “경찰이 진실 대신 권력을 택했다”며 끝까지 각을 세웠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이 대표는 한 라디오를 통해 “되돌아보니 정말 싸가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 손해만 될 행동을 했다”며 화해의 메시지를 던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측의 감정도 다소 누그러진 듯했다.

이, 친문·친낙 누르고 세력 구축
이미 블랙리스트 작성? 재선 비상

하지만 이들의 악감정은 20대 대선서 이 후보가 고배를 마시고 지방선거서 참패를 겪으면서 되풀이됐다. “문재인이 이재명을 도와주지 않아 패배했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다.

친명계 의원은 패배의 원인으로 문재인정부의 실정과 조국 사태, 부동산 문제 등을 핵심 원인으로 꼽았다. 이 대표의 실책이 없진 않지만 대선과 지방선거는 현 정부(당시 문정부)에 평가가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면 친문계 의원은 “결국 후보의 사법 리스크가 문제”라며 ‘이재명 책임론’으로 맞불을 놨다. 당시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40%를 웃돌았던 만큼 이 대표의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와 그의 아내인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 등이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낙연 전 대표와 갈등의 골이 깊어진 계기 역시 비슷하다. 지난 20대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때 이 전 대표를 후보로 만들기 위해 친낙계가 의도적으로 대장동 사건을 흘렸다는 의혹이 나오면서 시작됐다.

사건의 발단은 대장동의 핵심 인물인 남욱 변호사의 증언으로 시작됐다. 천화동인 5호 소유주 정영학 회계사가 민주당 윤영찬 의원에게 관련 자료를 넘겨줬다는 취지로 증언하면서다.

대표적인 친낙계로 꼽히는 윤 의원은 “남 변호사가 진술한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극구 부인했다.

이를 두고 이 대표 지지자들은 “대장동 의혹을 최초 제기한 쪽이 친낙계가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진실공방이 이어지자 개딸은 ‘이재명 명예 살인을 사주했다’ ‘이재명을 친 건 이낙연’ 등의 포스터를 만들어 거칠게 비난했다.

지난 9월, 이 전 대표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당시 민주당 커뮤니티가 그를 향한 혐오 발언으로 도배됐던 만큼 두 집단의 갈등은 현재 진행형인 모양새다.

과거의 혈투를 짚어가다 보면 이번 공천 작업은 이 대표의 설욕을 위한 전초전이라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이와 관련해 비명계 의원은 “아무리 당에서 친낙·친문 세력과 화합한다고 말해도 결국 다 잘라낼 것”이라며 자신과 같이 ‘반이재명파’로 꼽히는 이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예상된
시나리오

현역 의원 중 하위 10%에 포함되면 사실상 컷오프나 마찬가지라는 회의적인 시선이 나온다. 이와 함께 이 대표와 결을 달리한다는 이유만으로 살생부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는 목소리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지도부는 당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만큼 정당성이 보장된다고 팽배하게 맞서는 상황이다.

총선을 앞두고는 여의도를 구성하는 퍼즐 조각이 해체되고 다시 끼워 맞춰지길 반복한다. 컷오프 대상자가 추려지는 다음 해 1월을 기점으로 정치권 지각이 크게 흔들릴 것이란 예측이 나오는 이유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명낙회동 시즌2

더불어민주당 내 계파 갈등이 심화할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이재명 대표와 이낙연 전 대표의 두 번째 ‘명낙 회동’이 화두로 떠올랐다.

최근 이 전 대표가 탈당과 신당 창당 등을 시사하며 ‘이재명 때리기’에 나서자 지도부가 급히 진화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 전 대표는 “사진 한 장 찍고 단합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면 (만날)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등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지난 7월에 성사된 회동 역시 약 한 달 진통을 거친 만큼 이번에도 양측의 기싸움이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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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