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인 물은 썩는다’.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흐름이 멈추면 부패한다. 어떤 단체든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순간부터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다. 대한체육회 산하 종목단체인 대한체조협회서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 내부의 자정 기능은 망가진 지 오래고 외부의 관리·감독도 허술한 상태다.
비인기 종목이 관심을 받으려면 ‘스타’가 필요하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서 메달권에 들거나 시상대에 오르면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다. 김연아의 올림픽 메달로 피겨스케이팅을 향한 관심이 커졌고, 김연경의 활약으로 여자배구가 전성기를 누리는 식이다. 하지만 이 같은 관심은 스타의 존재에 좌지우지된다.
고인물
한 사람의 슈퍼스타가 모은 관심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서포터’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협회나 연맹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문제는 선수 한 명이 어렵게 끌어모은 인기를 유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협회나 연맹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한체조협회가 딱 그런 상황이다. 대한체조협회는 1945년 9월1일에 창립됐다. 오는 9월이면 창립 78주년에 이른다. 2012년 8월 런던올림픽 기계체조 남자 도마 종목서 양학선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6년 8월 리우올림픽에서는 손연재가 리듬체조 4위를 기록했다.
앞서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서도 여홍철이 남자 도마 은메달을 따냈다.
매회 올림픽마다 메달을 따내는 ‘효자’ 종목까지는 아니었을지언정, 그 명맥이 끊기지 않을 정도의 스타는 나왔던 셈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손연재의 은퇴 이후 체조에 관한 대중의 관심은 사라졌다. 여홍철, 양학선, 손연재 등이 일궈놓은 인기를 뒤로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는 평이 나올 정도다.
대한체조협회 홈페이지의 ‘설립 목적’ 부분을 보면 “본회는 이제 사단법인 대한체조협회로 제2의 탄생을 맞게 되는 중대한 기점에 이르렀다”는 표현이 나온다. ‘비전 2023’ 부분에도 “우수한 체조 인력을 양성해 국위선양 도모, 창의적 체조운동 일상화”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모든 스포츠의 기본 운동으로서 체조를 생활에 스며들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홈페이지에 기재한 거창한 비전과 달리 대한체조협회의 행보는 뒷걸음질 치고 있다. 대중의 관심이 줄어들고 외부의 감시가 소홀한 사이 제멋대로 운영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중이다. 대한체조협회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체조계가 워낙 좁다.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자정이 어렵다”고 한탄했다.
특히 문제로 제기되는 부분은 회장 선거와 관련된 의혹이다. 회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의 기탁금을 누군가 대납해줬다는 의혹이 나온 것.
현재 대한체조협회의 회장은 한성희씨가 맡고 있다.
한 회장은 “한국체조는 지난 70여년간 ‘모든 스포츠의 기본 종목’으로 위상을 견지하며 여타 종목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는 핵심 종목”이라면서 “앞으로 체조 종목을 전 국민에게 널리 보급해 국민체력을 향상하게 하고 우수한 선수를 양성해 국외선양에 이바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인사말을 남겼다.
관계자가 빌려주고 가짜 입금표 만들어
“행정적 편의” “선의” 문제의식 없어
문제는 선거 과정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회장이 2020년과 2021년 대한체조협회 회장 선거에 나섰던 두 번 모두 기탁금을 다른 사람이 내준 사실이 드러났다. 기탁금을 대납한 한모씨는 대한체조협회 간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현재도 요직을 맡고 있다.
한씨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서 회장 기탁금 명목으로 돈을 빌려준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다.
대한체조협회 회장 선거 관리 규정 12조(기탁금)에 따르면 후보자 등록을 신청하는 사람은 2000만원의 기탁금을 선거관리위원회에 납부해야 한다. 기탁금은 선거관리위원회가 개설한 금융기관의 예금계좌에 후보자 등록을 신청하는 사람의 명의로 입금하도록 돼있다.
후보자 등록을 위해서는 입금 후 금융기관이 발행한 입금표를 제출해야 한다.
제13조(후보자 등록) 규정은 ‘기탁금 또는 기탁금 납입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해 2020년과 2021년 한 회장이 대한체조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할 당시 ‘한성희’라는 이름으로 기탁금이 입금됐다는 증거가 필요했다는 뜻이다. 한 회장은 두 번 모두 단독으로 출마해 무난하게 당선됐다.
흥미로운 대목은 한씨가 돈을 빌려준 주체다. 한씨는 한 회장에게 2000만원씩 두 번에 걸쳐 4000만원을 빌려준 게 아니었다. 한씨는 대한체조협회 사무처에 돈을 빌려줬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사무처서 협회 사정이 좋지 않다면서 회장 기탁금 명목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사무처는 한씨로부터 2000만원을 입금받은 뒤 한 회장의 이름으로 후보 등록에 필요한 기탁금 입금표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 회장이 당선된 후 한씨에게 다시 2000만원을 돌려줬다. 회장 선거 관리 규정 27조(기탁금의 처리)는 “유효투표 총수의 1000분의 15 이상을 득표한 후보자의 기탁금은 선거일 후 30일 이내에 전액 반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손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회장 선거의 기탁금인 2000만원은 한씨와 사무처를 오가면서 ‘가짜’ 입금표를 만들어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씨 역시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빌려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적절치 않은 행동이었다”면서도 “지금 같은 상황이 돼도 돈을 빌려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조인의 생각은 달랐다. 복수의 법조계 관계자는 해당 사안이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 변호사는 “대한체조협회 사무처서 돈을 차입하는 과정서 절차를 지켰는지, 이자 처리는 어떻게 했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며 “사무처는 회장 기탁금을 대신 내주는 곳이 아니지 않나. 돈을 다시 돌려줬다고 해서 본래의 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한 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해당 문제를 바라보는 대한체조협회 관계자의 안일한 시각이다. 기탁금을 빌려준 한씨는 “행정적 편의를 위해”라는 표현을, 당시 회장 선거를 관리한 사무처 관계자 소모씨는 “선의로 한 행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소씨는 “아무도 대한체조협회 회장을 하려 하지 않는다. 회장을 모셔오는 과정서 모두와 의견을 공유해 진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썩었다
체조계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회장 선거서 드러난 대한체조협회의 이 같은 부조리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현재 대한체조협회는 일부 임원의 비리는 물론 지도자의 부정일탈 행위가 만연화돼있는 ‘비리 종합백화점’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대한체조협회를 관리단체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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