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기억은 휘발성이다. 시간의 흐름에 변질되고 훼손된다. 기억을 붙잡아 두려는 시도는 수없이 많았다. 누군가는 글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사진으로. 김정우 작가는 도자기로 기억을 붙잡는다. 몇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단단한 도자기에 추억을 새긴다.
큰비를 예고하듯 습도가 높았다. 도로가에 위치한 김정우 작가의 공방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습기는 가시지 않았다. 중형 크기의 선풍기 몇 대가 돌아가는 소리, 물레 돌리는 소리 등으로 내부는 잘게 떨리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흙을 만지고 있던 김 작가는 옆에 있던 수건에 손을 쓱쓱 닦으며 다가왔다.
영원히
잔뜩 헝클어진 머리, 까맣게 탄 얼굴, 백토가 잔뜩 묻은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공방에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 대신 하얀 그릇으로 가득했다. 수십 점의 접시가 눈에 띄었고 뒤이어 줄지어 놓인 머그컵이 보였다. 지난 12일 오후, 경기도 여주시 현암동의 공방서 김 작가와 마주 앉았다.
“어렸을 때는 죽어도 하기 싫었어요. 어떻게 보면 되게 덥고 지저분하고 그렇잖아요. 작가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제품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단가 싸움도 있고요. 딱 봐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작가의 아버지는 수십년 동안 고려청자, 화분, 쌀독 등을 만들었다. 김 작가가 좋든 싫든 어릴 때부터 도자기와 부대끼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본격적으로 도예에 뛰어든 시기는 군대 제대할 때쯤이었다. 헬기 승무원으로 복무한 그는 이미 여주대 도예과를 다니고 있던 동생에 뒤이어 학교에 지원했다.
김 작가는 “재미있었다. 주변서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인정받으니까 더 재미있더라”고 말했다. 도자기 흙을 얇게 밀어 펴서 똬리를 틀 듯이 쌓아 올리는 코일링 작업에도 몰두했다. 코일링 기법으로 사람 키만큼 쌓아 올리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노력에 비례해 결과가 나오는 흙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인 셈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가량 도자기와는 전혀 관련 없는 회사서 일했던 김 작가는 조교의 소개로 여주 프리미엄 아웃렛 체험박람회를 찾게 됐다. 그곳에서 그는 도자기 판매 일을 구했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알려진 ‘로열 코펜하겐’ 등 대학서 배우면서 ‘대단하다’ 했던 그릇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당시 여주 프리미엄 아웃렛이 처음 생긴 곳이다 보니 단종된 제품도 엄청 많았거든요. 그때 정말 다양한 제품을 많이 봤죠. 디자인도 그렇고요.”
아웃렛서의 경험은 김 작가의 도자기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열 코펜하겐’ 같은 그릇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도 아웃렛서 일하면서 싹텄다. 그는 “아웃렛서 일할 때 남자 고객 한 분이 ‘우리나라는 이런 거 못 만드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우스갯소리로 ‘앞으로 제가 돈 많이 벌어서 만들어 보겠다’고 답한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고객에게 장난스럽게 응수했던 당시의 대답은 김 작가의 목표가 됐다. 20대를 도자기 판매일로 보낸 그는 30대 들어서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만들었던 쌀독은 전국서 주문이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덴마크 ‘로열 코펜하겐’ 영향
만족감·성취감 원동력 삼아
판매일을 하면서 눈으로 익힌 경험과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체득한 경험은 ‘도예 인생’에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2019년 ‘만들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독립했다. 김 작가는 크기가 큰 쌀독이나 화분 대신 머그컵, 그릇 등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흙에서 공기를 빼고 성형하고 건조하고 다듬고 초벌하는 등 한 점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5~6일 남짓이다. 이 과정서 먼지가 붙거나 하면 불량이다.
깨끗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닦고 다듬고 지워야 한다. 기계적인 공정에 따라 제품이 대량 생산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드는 만큼 비용도 증가한다. 1년 사이 8000만원가량의 빚이 생겼다. 게다가 모든 공정을 혼자 하기 때문에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 작가는 “도자기는 원래 그렇다”며 쿨하게 웃었다. 광고나 영화 <사랑과 영혼>서 나오는 것처럼 마냥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어릴 때는 도자기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김 작가를 ‘도예 외길’로 이끈 건 일종의 성취감이다. 만들고 싶었던 것을 만들어 그것을 고객에게 판매했을 때 그들이 건네오는 진심 어린 만족감도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현재 김 작가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신의 브랜드인 ‘기억’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TV서 과거 유물을 감정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도자기 작품을 감정하는 데 제작 시기를 추정만 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 답답했다. 내가 이 제품을 만든 해, 그리고 구매하는 고객도 기억할 수 있게 연도 낙관을 지난해부터 찍고 있다”고 설명했다.
로열 코펜하겐의 경우 매년 ‘이어 플레이트’를 출시한다. 연도별로 매년 새로운 그림을 그릇에 새겨 판매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결혼하거나 집을 처음 장만할 때 도자기 제품을 구매한다고 한다. 김 작가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한 해를 몇 백 년, 몇 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도자기 제품을 통해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실제 인터뷰를 나눈 탁자에는 ‘2023’ 낙관이 놓여 있었다.
김 작가의 향후 일정은 빡빡하다. 장기적으로 브랜드의 내실을 다지는 것 외에도 내년 2월에 있을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다. 현재 만들고 있는 제품 말고 조형품을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그는 졸업작품으로 만든 ‘소머리’ 작품을 보여주며 “동생이 옮기다가 뿔이 부러져 버렸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다시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변하지 않는
“한 고객이 제 작품을 보고 ‘한국의 로열 코펜하겐 같다’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어요. 제가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작품과 제 작품을 비교해주셔서 굉장히 감사했습니다. 아웃렛서 일할 때 한 고객이 해주셨던 말이 기억이 많이 남아요. 계속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주 도자기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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