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남의 여권으로 입국해 서울 활보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07.10 11:48:08
  • 호수 14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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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외국인’ 뻥 뚫린 출입국 실상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타인의 여권으로 입국한 일부 외국인은 처벌할 수 없다. ‘난민 신청자’이기에 가능하다. 경찰은 사문서위조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검찰에 넘기지 않았다. 법무부 측은 “난민 신청자라면 강제퇴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난민 신청에는 횟수 제한이 없다. 종교, 정치적 의견 등의 이유를 들면 몇 번이고 가능하다. 불법체류자와의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생존의 욕구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여권을 도용해 국내로 입국하는 사례는 흔한 수법이라고 한다. 공항 화장실서 도용 후 버려진 여권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엄연히 출입국관리법 위반이다. 사문서위조 혐의를 받아도 강제퇴거할 수 없다. 난민 신청자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법무부는 경종을 울리고자 “남용적 난민 신청은 불필요한 행정력의 낭비를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난민 신청자는 1만1539명으로 전년(2341명) 대비 5배가량 폭증했다. 코로나 펜데믹이 잠잠해지자 ‘눈치 게임’이 시작된 분위기다.

위조여권 입국했는데…

2016년 2월28일 남의 여권으로 입국한 왕모씨는 난민 비자로 체류 중이다. 전능신교 신도인 왕씨는 종교적 난민으로 신청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그가 타인 여권으로 난민 비자를 취득한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안휘(安徽)성에 있는 가족들의 제보로 발각됐다.

여권 주인 경모씨는 중국 강소(江苏)성 출신으로 본국에 있으며 여권상 그는 한국에 난민 비자로 체류 중이다. 왕씨가 경씨의 여권을 도용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왕씨의 신분증 번호로는 입국기록조차 없으며 가족들의 실종신고로 들통났다. 법무부도 왕씨의 신분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 타인 여권이라도 정식 발급된 여권이기 때문이다. 엄연히 출입국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다. 출입국관리법 제7조를 위반한 것이다. 이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같은 법 제46조 제1항 제1호에 따라 외국인은 강제 퇴거할 수 있다. 다만, 난민 신청자나 비자를 받은 외국인은 처벌이 어렵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3월 왕씨는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발당했다. 고발장에는 왕씨의 생년월일, 주소, 신분증 번호 등이 기재됐다. 경씨의 신상정보도 모두 포함됐다. 고발인은 “위조여권으로 입국한 왕씨에게 합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수사 결과 불송치에 그쳤다.

지난 5월 서울영등포경찰서는 왕씨가 경씨의 여권을 도용한 사실을 인정했다. 불송치한 이유는 공소시효(7년)가 지났기 때문이다. 또 국외범으로 적용돼 국내 재판권이 없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사문서위조 혐의는 공소시효가 지나도 처벌이 가능하지만, 왕씨는 난민이기에 처벌 대상서 제외됐다. 남용적 난민 신청의 전형적인 폐해로 볼 수 있다.

2013년부터 한국에 들어왔던 전능신교 신도들은 “중국으로부터 탄압을 피한 종교적 난민”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곱게 보일 수는 없다. 이들의 등장은 난민법 시행, 제주 무비자 입국 시기와 겹친다. 전능신교가 성행한 곳은 중국 허난성이다. 신도들은 이곳의 관문인 쩡조우 공항을 통해 제주로 왔다.

“7년만 버티면 된다” 구멍 난 시스템
불법체류자와 난민 간 ‘모호한 경계’

2013년 당시 제주는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다. 제주로 들어와 난민 신청 후 비자를 발급받아 제주 밖의 지역으로 진출했다. 제주 출입국 외국인청은 박해 사유를 심사했다. 난민 인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현재까지 종교적 난민을 인정받은 전능신교 신도는 많지 않다. 중국의 박해 수위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전능신교 신도 샤오루이는 중국 공안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2016년 한국행을 택한 그는 <한겨레21>와 가진 인터뷰서 경험담을 털어놨다. 2009년 공안에 붙잡힌 그는 허공에 매달린 채 온몸을 구타당했다고 한다. 2012년 10월, 형 만기를 채우고 출소했다고 전했다. 신도별로 주장은 다르게 나왔다.

2018년 <노컷뉴스>와 만난 한 전능신교 탈퇴자는 “중국서 박해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터뷰서 “(공안이)처벌은 하지 않았고 전능신교의 위해성을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박해 수위를 파악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법무부 측은 종교 난민이 가장 많지만, 인정받기는 어렵다고 했다.

2014년 1월부터 올해(5월 말 기준)까지 전체 난민 신청자는 9만1748명이다. 종교 난민 신청자는 1만9459명으로 가장 많다. 이 중 난민 지위는 987명만 인정됐다. 종교적 난민 인정 수는 개인정보라 파악할 수 없는 만큼 일부 불법체류자에게는 남용의 소지가 있다. 종교 난민을 빙자해 체류 기간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난민으로 인정받은 판례도 존재한다.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로 본국서 박해받을 근거가 다분하다는 판단에서다.

손 놓은
법무부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2단독 송각엽 부장판사는 이란인 A씨를 난민으로 인정했다. 송 부장판사는 “종교활동을 공개적으로 못 하는 자체가 박해”라고 설명했다. 앞서 A씨는 2021년 5월 법무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지 못했다. A씨는 김세진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와 함께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종교는 물론, 형제들이 유산을 빼앗으려 신고해 체포·구금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A씨는 기독교인 태국인 여성과 한국서 결혼도 했다.

A씨의 종교적 신념에 대한 의혹은 있다. 법무부는 A씨가 실제 교회에 나간 게 8년간 4번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법조계는 당시 판결을 두고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개종으로 인한 박해로 난민을 인정한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난민 신청자가 사업 목적으로 들어온 것처럼 속인 사례도 있다. 대법원은 국제협약에 따라 처벌하지 않았다. 이란인 B씨는 2016년 ‘한국 기업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며 단기 상용 사증(비자)을 신청했다. 이 초청장은 B씨가 브로커에게 4700달러를 주고 구했다.

브로커는 초청장 구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의 말대로 한국 기업에 “직접 만나고 싶다. 비자를 받을 수 있게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하자 손쉽게 구했다. B씨는 이렇게 받은 비자로 입국해 2016년 난민 신청을 했다. 법무부는 신청을 기각했다.

검찰은 2018년 B씨가 한국 대사관을 속였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겼다. 1심은 같은 해 9월 B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항소한 B씨는 난민 지위를 둘러싼 행정소송서 승소했다. 


난민 신청자
처벌 대상 제외

B씨는 2020년 말 ‘기독교 개종’을 이유로 난민 신분이 인정됐다. 대법원은 “난민협약에 가입한 우리나라 형사재판서 형을 면제할 근거 조항이 된다”고 판단했다. 해당 조항은 ‘난민이 불법으로 입국하거나 불법으로 체류한다는 이유로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은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해 이듬해 3월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사유에 따라 난민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제주 예멘 난민’ 사태다. 예멘 정부군과 반군은 2015년부터 현재까지 내전을 벌이고 있다. 2018년, 제주로 들어왔던 예멘인 561명 중 549명이 “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다. 당시 2명은 난민으로 인정받았고 412명은 인도적 체류가 허가됐으며, 최근 412명 중 한 명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법무부는 난민 인정 사유에 관해 구체적 답변이 없었다.

인도적 체류자는 난민에 해당하지 않는다.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체류 허가를 받은 것이다. 한 예멘인 하산은 내전이 시작된 2015년 쯤 한국으로 피신했다. 민병대의 합류 강요를 거부한 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안전, 정의, 질서, 법 속에서 살 수 있는 대안적 조국”으로 한국을 선택했다.

그 뒤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말레이시아로 부인과 자녀들을 탈출시켰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는 가족의 장기 거주를 허용하지 않고 퇴거를 압박했다. 한국은 이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산은 “가족과 재결합하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난민인권센터 등은 인도적 체류자의 가족구성권을 요구했다.


현재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매년 1%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저수준이다. 2019년 기준 러시아 출신 난민 신청자들의 인정률은 미국이 41.3%다. 같은 해 기준 중국 출신 난민 신청자들의 인정률도 미국은 32.2%로 높았다.

반면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러시아·중국 출신 모두 0%다. 남용적 난민 신청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과 인권 보호단체의 입장이 크게 갈린 탓이다.

허위 비자로 들어왔는데 처벌 불가
단기체류자는 ‘검지’ 지문만 채취

한국은 2012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했다. 그럼에도 난민에 인색한 나라로 평가받는다. 난민협약 가입은 1992년에 했다. 난민법이 통과되면 심사 과정이 개선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서 난민으로 인정되려면 많은 양의 입증 서류가 필요하다.

또 입증 서류를 제출했다 하더라도 심사를 받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법무부 공개 자료에 따르면 올해 기준 난민 심사 대기 건수는 1만3890건이다. 심사관당 140건 정도를 처리해야 하는 양이다. 물리적으로 쉽게 처리하기 어려운 숫자로 난민을 향한 혐오 인식 때문만은 아니라는 증거다. 

이들은 ‘불법체류자’와 엄연히 다르다. 법을 어긴 범죄자가 아니라 ‘미등록 외국인’에 불과하다. 90일 이내 단기체류 외국인으로 들어와 불법체류하는 것보다 안전하다. 단기체류 외국인은 범죄를 저질러도 추적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은 양쪽 검지 지문만 등록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90일 초과 장기체류 외국인은 열 손가락 지문과 얼굴 정보를 등록한다. 난민 신청자도 마찬가지다.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과 이지연 경위는 지난 5월 학술대회서 “불법체류자의 열 손가락 지문 등록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단기체류 외국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검지 외에 지문은 파악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특히, 검지가 훼손된 채 사망하면 신원 확인도 어렵다.

지문 등록을 두고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참여연대 등의 단체들은 “개인의 고유한 생체정보 보호가 중요하다”고 비판했다. 김정식 순천향대 법과학대학원장은 이날 “법과학적 타당성, 법과학 전문가의 증언이 보다 중요하게 취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도 한국보다 지문 채취에 적극적이다. 중국 정부는 2021년 1월부터 14세 이상~70세 미만 외국인의 양손 지문을 모두 채취하고 있다. 중국 방문을 위해 필요한 비자를 발급하기 위함이다. 기재해야 하는 정보의 양도 절대적으로 많다. 연봉과 상사 이름·연락처 등 훨씬 상세한 정보를 넣어야 한다. 부모 등 가족 정보 역시 이름만 입력하면 되는 미국 등과 달리 중국은 부모의 직업과 주소까지 넘겨야 한다. 

종교적 난민
1만9000여명

다만 지나친 정보를 요구하는 데에 대한 반감도 존재한다. 관광객이 줄어드는 것도 불편한 정보 수집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에 거주 중이라는 한 교민은 “비자 발급 과정에 요구하는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가족들이 오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난민 신청은 까다롭지만, 입국 심사는 간단하다. 단기체류자에 대한 절차를 소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국민적 불안감도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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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