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여행 ④익산 미륵산성

돌에 새겨진 생명의 역사

산성의 돌 하나는 병사의 갑옷과 같다. 목숨을 구할 방패다. 가파른 산에 거대한 돌을 쌓는 행위는 호국의 염원 없이 불가능하다. 여전히 마르지 않은 우물과 폐사지 초석 틈새로 자란 꽃이 격전지에서 살아남은 질긴 생명력을 떠올린다. 익산 미륵산성(전북기념물)은 둘레 1776m 포곡식 석성으로, 미륵산 정상부와 북쪽 봉우리를 포함해 동쪽 계곡을 에워싼다.

익산 지역 11개 성곽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북쪽으로 낭산산성(전북기념물), 동쪽으로 용화산성과 선인봉산성, 남쪽으로 익산 토성(사적)과 금마도토성(전북기념물)이 미륵산성을 겹겹이 둘러싼 형태다. 차로 미륵산성까지 갈 수 있는 최대 지점은 베네스다기도원 옆 미륵산성 주차장. 여기부터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가벼운 등산로

주차장서 주 출입구인 동문지까지 1㎞ 남짓, 약 15분이면 도착한다. 굵은 참나무가 등산로를 호위하듯 서 있다. 신선한 초록 잎과 묵은 갈색 이파리가 한 줄기에 달렸는데, 자연 속에 있는 산성 여행이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자늑자늑 알려준다. 호젓한 산책로 같은 등산로여서, 미륵산 정상에 오를 계획이 아니라면 가벼운 옷차림도 무방하다.

동문지서 바라본 미륵산성은 좌우로 날개를 펼치고 서 있다. 성문은 동쪽과 남쪽 성벽 가운데, 서쪽 성벽 모서리에 냈다. 북쪽은 지형을 이용해 능선이 그대로 방어망이 됐다. 산성 내부에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능선을 따라 포곡식으로 축조했는데, 이는 대형 산성서 주로 사용하는 기법이다.

지형에 따라 외벽만 돌로 쌓고 내벽은 잡석과 다진 흙으로 채우는 내탁법, 외벽과 내벽을 모두 일정한 높이까지 돌로 쌓아 올린 협축법을 섞어 축성했다.


미륵산성은 ‘용화산성’으로 불렸는데, 미륵산의 옛 이름이 용화산이었기 때문이다. 고조선 기준왕이 이곳으로 내려와 쌓았다고 해서 ‘기준성’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미륵산성은 축성 연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지만, 통일신라 이후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와유록> 등 시대마다 문헌에 등장하며 그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성벽 길은 동문지 안에서 세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 성벽으로 방향을 잡아 나무 계단을 오르면 평평한 석축을 밟아볼 수 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는 돌출부인 치(雉)는 모두 10개다. 동북쪽 치에 올라서면 반대편 남쪽으로 향한 석축과 동문지의 옹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복원된 미륵산성 전체를 조망할 포인트다.

남문지는 산세가 치켜 올라갈 정도로 가파른데, 성벽 위와 안쪽을 계단처럼 쌓아 지형에 맞췄다. 석축 위는 접근이 안 된다.

가운데 중앙 계곡부 안쪽 등산로를 따라가면 6부 능선에 있는 건물 터가 보인다. 터마다 줄지어 남은 주춧돌이 꽤 큰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3단 석축 지역서 확인된 동서 510m, 남북 700m 규모 저수 시설이 핵심이다. 산성 안에 샘과 못이 많다는 것은 장기전이 가능하다는 뜻. 아직 마르지 않은 집수정에 신록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세 갈래 어느 방향이든 미륵산(430m) 정상으로 향한다. 동문지 오른쪽으로 등반하면 헬기장에 이르는데, 이 길은 미륵산 정상으로 향하는 열 갈래 중 하나다. 헬기장서 시선이 가는 곳이 있다면 화강암 채석장을 발견한 것. 익산의 돌은 ‘산에서 이익을 보다’라는 지명의 뜻처럼 그 규모가 대단해, 익산에선 돌을 노잣돈처럼 품었다고 한다. 익산 화강암은 단단하고 철분 함량이 적어 부식이 잘되지 않는 장점 덕에 삼국시대부터 애용했다.

<고려사> 등에 남아 있는 산성의 기록
미륵산 정상 조망…익산의 지리적 중요성

석재 이름은 보통 산 이름을 따서 부르는데, 익산 지역서 채취한 돌은 모두 ‘황등석’이라 한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보물) 등은 황등석이 쓰인 대표적인 석조 문화재로 꼽힌다.


송전탑을 뒤로하고 능선을 따라 걸으면 미륵산 정상이다. 정상부는 표석을 중심으로 나무 덱을 조성해 전망하기 좋다. 남동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서동공원과 한반도 모양의 금마저수지가 들어온다. 쾌청한 날에는 북쪽으로 논산과 부여, 서쪽의 금강, 남쪽으로 멀리 김제와 전주까지 넓은 지역이 한눈에 보여 우리나라 4대 고도(古都)로 지정된 익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미륵산성 주차장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인근 구룡마을을 지나치지 말자. 한강 이남 대나무 최대 군락지로, 5만㎡ 면적에 대나무숲이 빼곡하다. 왕대의 북방 한계선이기도 하다. 푹신한 흙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람이 숲을 깨우고, 댓잎이 부대끼며 시원한 바람을 불러온다.

미륵산은 백제 최대 사찰로 꼽히는 미륵사가 있던 곳이다. 복원된 동탑과 달리 미륵산의 봉우리처럼 솟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은 ‘돌의 역사’를 압축한 상징물이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최대(最大) 석탑이다. 광활한 절터와 슬쩍 훑어도 그 끝이 아득한 폐사지서 찬란한 백제의 역사를 되새겨본다.

왕궁리 유적

익산백제실, 미륵사지실, 역사문화실 등 상설전시실을 갖춘 국립익산박물관을 먼저 둘러보고 미륵사지로 향하는 동선을 추천한다.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에 가면 1400여년 전, 백제 왕궁과 마주한다. 왕궁리 유적은 미륵사지와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해 질 녘 바라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의 위용은 드넓은 궁터를 지키는 수호신 같다. 디지털 체험 시설과 체계적인 전시 설명을 갖춘 백제왕궁박물관은 왕궁리 유적을 제대로 배우는 교과서다.

 

<여행 정보>
당일 여행코스
-역사 여행: 익산 미륵산성→익산 쌍릉→국립익산박물관→익산 미륵사지→익산 왕궁리 유적→백제왕궁박물관
-걷기 여행: 익산 미륵산성→미륵산 정상→구룡마을 대나무숲→국립익산박물관→익산 미륵사지

1박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익산 미륵산성→익산 쌍릉→구룡마을 대나무숲→국립익산박물관→익산 미륵사지→익산 왕궁리 유적→백제왕궁박물관
-둘째 날: 보석박물관→왕궁다원→고스락→익산교도소세트장

관련 웹 사이트 주소
-익산시 문화관광 www.iksan.go.kr/tour/index.iksan
-국립익산박물관 https://iksan.museum.go.kr
-백제왕궁박물관 www.iksan.go.kr/wg/index.iksan

문의 전화
-익산시청 문화관광산업과 063)859-5778
-익산미륵사지관광안내소 063)859-3873
-국립익산박물관 063)830-0915
-백제왕궁박물관 063)859-4631

대중교통
[기차] 용산역-익산역, KTX 20~50분 간격(05:07~22:22) 운행, 1시간15분~2시간10분 소요. 익산역 동부광장 인근 익산역(중앙동 방면) 정류장서 60-2번 버스 이용, 구룡 정류장 하차, 미륵산성 동문지까지 도보 약 30분.
*문의: 레츠코레일 1544-7788, www.letskorail.com 익산여객 063)837-1001
[버스] 서울-익산, 센트럴시티터미널서 하루 8~11회(07:10~22:10) 운행, 약 2시간40분 소요(익산고속버스터미널 운영 중단, 고속버스 승하차 시 익산시외버스터미널 이용). 서울남부터미널서 하루 5회(06:55~20:05) 운행, 약 3시간10분 소요. 익산시외버스터미널 인근 평화동 정류장서 60-2번 버스 이용, 구룡 정류장 하차, 미륵산성 동문지까지 도보 약 30분.
*문의: 센트럴시티터미널 02)6282-0114 고속버스통합예매 www.hticket.co.kr 서울남부터미널 1688-0540 시외버스통합예매시스템 https://txbus.t-money.co.kr 익산여객 063)837-1001

자가운전
경부고속도로 연무강경TG→연무IC교차로 연무·익산제3일반산업단지 방면 좌회전→오동정교차로 삼기·여산 방면 좌회전→우금삼거리 금마·미륵사지 방면 왼쪽→구룡길 방면 우회전→베데스다기도원 맞은편 미륵산성 주차장


숙박 정보
-익산유스호스텔: 익산시 마한로, 063)850-2000, www.익산유스호스텔.com
-웨스턴라이프호텔: 익산시 동서로, 063)720-3000, www.westernlife.co.kr
-청담황토한옥: 금마면 미륵사지로1길, 010-5619-4648, www.instagram.com/hanokpension_cheongdam

식당 정보
-무진장갈비촌(돼지갈비): 익산시 선화로31길, 063)843-3070
-한일식당(황등비빔밥): 황등면 황등로, 063)856-4471
-맛동순두부(순두부백반): 금마면 미륵사지로, 063)835-8919

주변 볼거리
마한박물관, 익산 제석사지,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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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