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클래식 월드스타 바리톤 김태한

  • 옥지훈 기자 ojh34522@daum.net
  • 등록 2023.06.12 12:57:34
  • 호수 14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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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국내파, 세계를 휩쓸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옥지훈 기자 = 한국인 남성 성악가 김태한이 세계 최고 성악가 반열에 올랐다. 세계 3대 클래식 콩쿠르 중 하나인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 부문서 아시아 남성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해당 대회서 한국인 성악가가 우승한 건 2011년 여성 성악가 홍혜란 이후 두 번째다. 두 사람의 차이점을 꼽자면 홍혜란은 2009년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입학한 ‘유학파’인 데 반해 김태한은 국내서 성악을 배운 ‘순수 국내파’라는 점이다.

세계 3대 클래식 음악 콩쿠르 중 하나인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서 바리톤 김태한(22)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이번 우승으로 아시아 남성 성악가로서 최초, 2000년생 만 22세로 최연소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세계 3대 콩쿠르
‘퀸엘리자베스’

김태한은 클래식 불모지로 꼽히는 국내서 성악을 공부했다. 그의 우승은 해외 유학 경험 한 번 없는 순수 국내파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한국은 지난해 같은 대회서 첼로 부문으로 우승을 한 최하영에 이어 2년 연속 우승자를 배출했다.

그동안 홍혜란(2011년), 황수미(2014년·이상 성악), 임지영(2015년·바이올린), 최하영(2022년·첼로) 등 여성 음악가가 해당 콩쿠르서 수상한 바 있지만, 남성 음악가가 우승을 거머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콩쿠르 성악 부문은 성악가 412명이 지원했다. 예선에는 영상 심사를 통해 68명이 본선에 진출했는데, 그중 18명이 한국인이다.


지난 1일부터 시작해 사흘간 진행된 결선에 진출한 12명 중 한국인 결선 진출자는 최연소인 김태한을 비롯해 바리톤 권경민, 베이스 정인호까지 총 3명이었다. 이번 콩쿠르서 국적별로 최다 진출이다. 결선 진출 입상자 순위는 1위부터 6위까지다.

베이스 정인호가 5위를 기록하면서 입상자 순위에 올랐고, 바리톤 권경민은 아쉽게 순위에 들지 못했다.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국제 음악 콩쿠르서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수상을 이어가면서 K클래식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인 음악가들이 세계 무대서 독보적으로 활약하면서 결선 진출자 숫자가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을 압도했다. 2015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서 우승한 조성진 또한 순수 국내파로 국내 클래식 열풍에 기여했다.

지난해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우승한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선 한국인 연주자 12명이 준결선에 진출해 화제가 됐다. 임윤찬도 순수 국내파로 알려져 있다.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국내파 음악가들이 세계 대회서 연이은 승전보를 올리고 있다.

김태한은 우승 직후 현지 인터뷰서 “한국 가수들이 워낙 노래를 잘하기 때문에 사실 국제 콩쿠르보다 국내 콩쿠르서 노래할 때 더 떨린다”며 “지금 당장 한국대회에 나가도 1등을 할 자신이 없을 만큼 실력자가 많다”고 전했다.

‘K클래식’ 콩쿠르서 연달아 승전보 
아시아 최초·최연소 타이틀 섭렵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벨기에 출신 바이올린 거장 외젠 이자이(1858~1931)를 기리기 위해 1937년 ‘이자이 콩쿠르’라는 명칭과 함께 바이올린 부문을 대상으로 처음 열렸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부문으로 진행됐으나 세계 2차 대전으로 휴지기를 맞았다. 이후 1951년 벨기에 왕비 엘리자베스 본 비텔스바흐의 후원 아래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어 재개됐다.


1951년 바이올린 부문을 시작으로 1952년 피아노 부문으로 번갈아 열리다가, 1953년 작곡 부문, 1988년 성악 부문, 2017년 첼로 부문이 추가됐다. 2012년 이후로는 작곡 부문이 개최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 첼로 부문이 번갈아 가며 매년 개최되고 있다.

역대 주요 수상자로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레오니드 코간·바딤 레핀과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등이 있다. 한국 출신은 1976년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이 3위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50명 넘는 입상자를 배출했다.

김태한은 처음엔 록 가수가 하고 싶어서 음악을 시작했다. 가장 좋아하는 록밴드는 캐나다의 섬41(Sum 41)이고, 중학교 때는 밴드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비교적 늦은 나이인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성악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어머니가 성악을 권유하셔서 성악을 시작했다가 뒤늦게 빠졌다”며 “선화예고에 진학해 비슷한 전공을 하는 친구들 만나면서 시너지가 생겨 꿈을 더 키우게 됐다”고 말했다. 김태한은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에 진학한 국내파 수재다.

시작은 록으로
지금은 오페라

그는 바리톤 나건용 교수를 사사했고, 현재는 국립오페라단의 젊은 성악가 육성 프로그램인 오페라 스튜디오 멤버로 활동하면서 김영미 교수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2021년에 국내서 열린 한국성악콩쿠르, 한국성악가협회 국제성악콩쿠르, 중앙음악콩쿠르서 각각 2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해에는 비냐스 국제성악콩쿠르와 리카르도 잔도나이 국제성악콩쿠르서 특별상을 받으면서 해외로 발을 뻗었다.

김태한은 콩쿠르 우승 직후 현지 매체와 가진 인터뷰서 ‘롤 모델’이 누군지 묻는 질문에 주저없이 “저희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국내에 있는 스승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스승인 바리톤 나건용 교수는 제자에 대해 “24시간 노래를 흥얼거리며 연습할 만큼 열정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성악가”라고 전했다.

김태한은 2018년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에 10회 신한음악상 성악 부문 수상으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신한음악상은 일반적인 기업 메세나 프로그램과 달리 신한은행 직원들의 기부금으로 조성해 만 19세 이하의 순수 국내파 클래식 유망주만을 발굴해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

김태한은 이번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서 진행되는 곡을 신한아트홀서 실전 연습하고 녹화하여 경연에 대비하는 과정을 거쳤다. 신한음악상 수상자는 모든 비용이 무상이다.

수상자는 매년 400만원씩 총 1600만원의 장학금과 함께 해외 유명 대학교수에게 받는 마스터클래스 및 공연 관람, 세종체임버홀서 정기연주 기회 등 국제적인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혜택을 제공받는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신한음악상 수상자들의 ‘음향시설이 잘 갖춰진 홀에서 연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수렴해 세종문화회관과 정기연주회를 정례화했다”며 “수상자들이 해외 콩쿠르에 나가는 사례가 많아짐에 따라 신한아트홀서의 녹화 및 연습도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결선 무대
발음 극찬

신한은행은 순수 국내파를 배출하는 데 큰 디딤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지금까지 6회 피아노 부문 수상자 박진형(2016년 프라하의 봄 피아노 콩쿠르 1위), 10회 첼로 부문 김가은(2022년 어빙 클라인 국제현악콩쿠르 1위), 12회 첼로 부문 한재민(2021년 에네스쿠 콩쿠르 1위) 등 61명의 수상자가 배출됐다.

김태한은 결선 무대에 올라 바그너 ‘탄호이저’ 중 ‘오, 나의 사랑스러운 저녁별이여’를 시작으로 말러의 연가곡 ‘내 가슴 속에는 불타는 칼이’, 코르골트의 ‘죽음의 도시’ 중 ‘나의 열망, 나의 집념’, 베르디의 ‘돈 카를로’ 중 ‘카를로가 듣는다-아, 나는 죽어가고 있어’까지 4곡을 불렀다. 그는 독일어와 불어를 정확하게 발음해 극찬을 받았다.

특히 베르디의 ‘오, 카를로 내 말을 들어보게’는 원래의 이탈리아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불렀다. 퀸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열린 벨기에가 불어권이라는 이유에서다. 김태한은 “프랑스어 버전으로 부른 건 내 아이디어”라며 “프랑스어가 음악적으로 표현하기 좀 더 부드럽고 편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어권이기도 하고, 프랑스 요청을 받아 베르디가 작곡한 ‘돈 카를로’ 원래 버전도 프랑스어였다”며 “작품이 크게 성공하면서 나중에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것인데 마지막 소절인 ‘플랑드르를 구해 달라’는 의미가 플랑드르가 벨기에 땅이어서 여러 모로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이어 “국제음성기호(IPA)상 발음기호 공부가 정석인데 그 또한 (실제 발음과)다른 부분이 있어서 원어민 노래를 많이 듣고 세세한 부분까지 따라 해보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곡의 음정, 박자뿐 아니라 시를 분석하고 시인에 대해 공부하는 등 곡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열심히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지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서 자신의 꿈을 묻자 부족한 영어 탓에 “슈퍼스타가 되는 것(I want to be a super star)”이라고 답했다고 웃어 보였다. 클래식 비평가 마르띤느 메르제는 “김태한의 목소리는 웅장하고 풍부해 멜로디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며 “보기 드문 우아함과 권위를 가진 그의 연주는 아름답게 절제돼 감동을 전달한다”고 호평했다.

록 가수 꿈꾸던 중학생이…
7년 뒤 세계 최고 성악가로

앞서 소프라노 조수미가 이번 대회서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심사위원장 베르나르트 포크롤을 비롯해 메조소프라노 베르나르다 핑크,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 등 심사위원진 17명 중 일원으로 활약했다.

조수미는 김태한 우승 직후 인터뷰서 “나도 콩쿠르서 여러 번 우승했는데, 내가 우승한 것보다 더 기쁘다”며 “우승자뿐만 아니라 결선에 진출한 한국 성악가 3명 모두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밝혔다.

이번 대회 심사위원단은 공정한 심사를 위해 대회 기간 내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엄격히 금지된다. 순위는 심사위원들이 각자 매긴 점수표를 일괄적으로 합산해 결정된다. 조수미도 발표 직전에 이번 대회 순위 최종 결과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김태한이 이번 대회서 우승이 확정됐을 때 심사위원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묻는 질문에 “당연하다고 했다. 다들 거의 만장일치”라고 답했다. 이어 “나이가 굉장히 어린데도 진정성 있게 노래한 게 심사위원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 같다”며 “원더풀 퍼포먼스였다”고 치켜세웠다.

‘대선배’ 조수미는 “이번 우승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니 자만하면 안 된다. (김태한이)아직 나이가 어리니 정신을 바짝 차려서 열심히 해야 한다”며 진정 어린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기뻐하는 것도 오늘 하루만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갈 길을 가야 한다”며 “앞으로 갈 길이 멀고도 험난할 수 있으니까, 제가 옆에서 잘 도와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태한은 오는 9월부터는 독일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오페라 스튜디오 멤버로 2년간 활동할 예정이다. 가장 해 보고 싶은 역할로 조아치노 안토니오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를 꼽았다. 이어 “조연·단역부터 가리지 않고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겠다”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오페라 가수”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열심히 준비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어 기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다”며 “오페라 무대에 많이 서면서 행복하게 음악을 하고 싶다. 지켜봐 달라”고 덧붙였다.

대선배 조수미
진정 어린 충고

김태한은 지난 6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 인근 워털루에 있는 음악 고등교육기관인 ‘퀸엘리자베스 뮤직샤펠’서 열린 공식 시상식서 마틸드 왕비로부터 직접 상장을 받았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장 명칭도 ‘마틸드 여왕 상’으로 2만5000유로의 상금도 함께 수여됐다. 그는 오는 13일 브뤼셀서 열리는 퀸엘리자베스 폐막 공연을 통해 우승자로 첫 무대를 선보인다. 이후 현지 일정을 모두 소화한 뒤 오는 20일경 귀국 예정이다. 

<ojh34522@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세계 클래식 홀린 K클래식

한국인의 최근 세계 3대 콩쿠르서 활약이 심상치 않다.

세계 무대서 한국인 콩쿠르 입상자 수는 압도적이다.

지난해 세계적인 콩쿠르서 우승한 한국인 음악가 중 악기 부문만 보더라도 피아노(임윤찬·밴 클라이번), 바이올린(양인모·시벨리우스) 첼로(최하영·퀸 엘리자베스)로 3명이나 된다.

한국인 음악가가 세계대회를 휩쓰는 건 이제 흔할 지경이다.

세계 3대 콩쿠르 중 먼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 부문서 2011년 소프라노 홍혜란이 우승하면서 4년 주기로 돌아오는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 첼로 부문서 2014년 소프라노 황수미가 또 한 번 정상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한국인 여성 성악가 목소리가 세계 무대를 떨친 건 꽤 오래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프리 마돈나’ 홍혜경부터 1990년대 소프라노 조수미 등 한국 소프라노는 세계 무대에 이름을 떨쳐왔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는 2011년 베이스 박종민과 소프라노 서선영이 각각 남성·여성 성악 부문 정상을 차지했다.

2012년에는 베르디 국제 콩쿠르서 테너 김정훈, 바리톤 김주택, 테너 윤승환이 각각 1~3위를 휩쓸었고, 2021년에는 바리톤 김기훈이 BBC 카디프 국제 성악 콩쿠르 오페라 부문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면서 한국 남성 성악가의 국제 무대 경쟁력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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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