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베트남 축구 영웅 박항서

베트남 뒤집고 돌아온 ‘쌀딩크’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스포츠 감독이란 잘해야 본전인 자리다. 여간해선 박수받으며 떠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은 달랐다. 베트남 국민은 지난 5년간 ‘마법’을 선보인 그의 마지막을 뜨거운 환호로 배웅했다. ‘백수’ 감독과 축구 변방국이 함께 일궈낸 기적은 우리 국민들마저 놀라게 했다. 일명 ‘쌀딩크’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축구계에선 인간적인 리더십과 발상의 전환 전술을 꼽는다.

비록 완벽한 마무리는 아니었지만,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쌀딩크’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과의 동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은 지난 16일, 태국 빠툼타니 탐마삿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년 아세안축구연맹(AFF) 축구선수권대회(미쓰비시컵) 결승 2차전에서 0-1로 패했다.

2018년 이후 4년 만에 우승컵 탈환을 노리던 베트남은 대회 최다 우승국인 태국에 가로막혔다. 앞서 박항서호는 베트남에서 열린 1차전에서 2-2로 비겼다. 이들은 결국 합계 점수 2-3으로 밀리며 대회를 준우승으로 마무리했다. 

5년의 매직
뜨거운 안녕

임기가 이달 말까지인 박 감독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내려놨다.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박 감독의 지도력은 이미 동남아 축구계에서 널리 인정받은 지 오래다. 이는 이번 대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승에서 마주친 ‘적장’도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태국 축구 대표팀의 누안판 람삼 단장은 박 감독에 관해 “그를 정말 존경한다.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를 바꿔놨다. 나아가 동남아시아 축구의 판도에 변화를 일으켰다”며 칭찬했다. 이어 “현재 세계 랭킹도 베트남이 96위, 태국이 111위로 차이가 있다. 베트남 선수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해졌다”며 박 감독을 추켜세웠다.


박 감독은 이날 경기 종료 후 베트남 사령탑으로 참여하는 마지막 공식 기자회견에 임했다. 박 감독은 “이제 나는 더는 베트남 감독은 아니지만, 베트남과 베트남 U23 대표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팬이 될 것”이라며 “서로 좋은 추억을 영원히 간직했으면 좋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마지막 경기 후 여전히 실망과 아쉬움이 있다. 나와 팀이 무엇이 부족했는지 알고 싶기도 하다”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선수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슬픔을 위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다”고 전했다.

박 감독의 삶은 두 번의 우연으로 크게 뒤바뀌었다. 박 감독이 축구계에 발을 들인 것도, 베트남으로 향한 것도 모두 그가 쉽사리 예상했던 길은 아니었다.

박 감독은 1957년 10월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경찰 간부 출신 아버지는 직무 중 부상을 입었던 국가유공자였다. 어머니는 지역 명문 진주여고를 나왔다. 이들은 고향에서 약방을 운영했고, 그 덕에 박 감독은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냈다.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 편에 속했던 그는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장래희망이 군인이었다. 그는 부모의 높은 교육열에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당초 목표였던 배재고 입학시험에 낙방했다. 대신 경신고로 향한 박 감독은 배재고 낙방에 좌절하던 중 훈련하는 축구부원들을 목격했다.

알고 보니 당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불리던 차범근이 경신고 축구부 출신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박 감독은 비록 늦깎이일지라도 축구부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키 166㎝에 깡마른 체격, 전무한 경력 등이 걸림돌이었다. 경신고 축구부가 마땅한 강점이 없어 보이던 박 감독을 받아줄 리 만무했다.


어떻게든 축구를 하고 싶었던 박 감독은 인맥을 활용한 ‘낙하산’ 작전까지 불사했다. 그는 당시 경신고 축구부 감독과 절친했던 친척에게 부탁해 기어코 축구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축구 무경력자가 출전 기회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늦깎이 축구선수·짧은 선수 생활…특이한 이력
베트남 지휘봉 잡고 대반전 일궈 국민 영웅 등극

당시 박 감독은 반년간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운동부에 들며 학사관리가 미흡해진 탓에 1년 유급까지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종일 축구공을 가지고 훈련하며 실력을 빠르게 키워나갔다. 어느새 탄탄한 기량을 갖춘 미드필더가 된 그는 1976년 전국 청룡기 축구대회에서 결승 골을 넣었다. 이 골로 경신고는 우승컵을 들었다. 한양대 진학 이듬해인 1978년에는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 주장을 맡아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박 감독은 한양대를 졸업하고 1981년 실업팀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했다. 실업 선수로 데뷔한 직후 곧바로 육군 축구단에 입대해 군 복무까지 마쳤다.

전역한 박 감독은 1984년 럭키금성 황소에 창단 멤버로 입단해 프로 무대에 섰다. 현역 시절 등번호는 12번이었다. 그는 1985년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끄는 동시에 리그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듬해에는 팀 주장으로 선임돼 팀의 리그 준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시즌이 끝난 후 돌연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호적상의 나이 29세, 실제론 31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결국 실업팀, 군 복무 기간을 뺀 박 감독의 선수 생활은 단 4년에 불과했다.

박 감독이 성인 대표팀으로 뛴 경기는 선수생활을 통틀어 1경기뿐이다. 그는 1981년 3월 한일 정기전에서 전반 17분 교체 투입돼 73분간 뛰었다.

대신 박 감독은 이른 나이에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은퇴 후 친정 팀인 LG 치타스(전 럭키금성 황소)의 트레이너로 선임돼 1996년까지 활동했다. 이후에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로 합류해 2000년 시즌 시작 전까지 직을 수행했다.

국가대표 코치진에도 수차례 발탁됐다. 1994년에는 미국 월드컵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활동하며 김호 감독을 보좌했으며, 2000년 허정무 감독의 사퇴 뒤, 후임 감독을 보좌할 수석코치로 내정되기도 했다. 그해 박 감독은 12월20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 정기전에서 감독대행 자격으로 경기를 지휘했다.

2002년엔 히딩크호의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한일월드컵 대표팀에서 감독과 선수들 간의 가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감독은 4강 진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받았다.

그가 남긴
대기록들


월드컵 이후 2002 부산아시안게임 대표팀을 맡아 처음으로 감독직에 부임한다. 하지만 월드컵 4강 주역들을 일부 대동하고도 동메달에 그치자, 비판 여론이 빗발쳤다. 물론 일각에선 월드컵 준비에 너무 치중했던 나머지 아시안게임이 졸속으로 준비된 점, 전적만 놓고 보면 9전 7승 1무 1패(승부차기)였던 점 등을 감안하면 비판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박 감독은 결국 해임됐다.

그는 K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포항 스틸러스 코치를 거쳐 전남 드래곤즈 기술고문을 맡았다. 사실 박 감독은 당초 전남 감독직을 제안받았으나, 허 감독이 대표팀 수석코치를 그만두고 전남 감독으로 급히 부임하는 바람에. 사실상 명예직 수준이었던 기술고문 자리로 밀려났다.

그가 첫 프로 팀 감독을 맡은 곳은 고향을 연고지로 한 경남FC였다. 이후 전남 드래곤즈, 상주상무, 창원시청축구단 등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지도자 세대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17년, 팀을 나온 박 감독은 자신의 감독 생활도 사실상 끝난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던 중 아내가 동남아 진출을 제안하며 에이전트와 직접 연결해줬다고 한다. 

며칠 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제의가 왔다. 박 감독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박 감독의 삶과 베트남의 축구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신의 한 수’가 됐다.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 A대표팀과 23세 이하(U-23) 대표팀 지휘봉을 동시에 잡으며 전권을 부여받았다. 박 감독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30위권에 있던 베트남 축구를 100위권 이내로 진입시키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박 감독의 지도를 받은 베트남은 2018년 초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이라는 돌풍을 일으키며 주목받았다. 이어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역사상 최초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2019년에는 동남아시안게임(SEA)에서 60년 만에 베트남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2020년 5월에는 자국에서 열린 SEA에서 2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아울러 A 대표팀도 눈에 띄는 성과를 여럿 남겼다. 2018년 AFF컵 대회에서 우승에 성공했다. 2019 AFC 아시안컵에서는 8강 진출에 성공했고, 지난해에는 베트남 최초로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을 이뤄냈다. 더 나아가 중국을 제압하며 최종예선 첫 승을 기록했다.

파파 리더십
동행 마무리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다. 베트남 정부는 박 감독에게 훈장을 3개 수여했다. 베트남 국민은 박 감독 재계약·연봉 인상 운동을 벌였다. 박 감독은 국민적인 인기가 날로 높아지면서 여러 광고에 출연했고, 그를 주제로 한 책과 다큐멘터리 영화도 개봉했다. 

이에 박 감독 한 명으로 양국 관계가 진전되는 듯한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우리 정부는 이 공로를 인정해 지난달 초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국가주석 방한으로 마련된 국빈만찬에서 박 감독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수여했다. 

박 감독의 성공 배경에는 냉철한 현실 인식에 따른 실리 추구형 전략이 깔려 있다. 박 감독은 부임 직후 베트남 선수단의 근본적인 약점으로 기술과 전술 이해도 부족을 꼽았다. 심지어 지금도 박 감독의 전술을 완전히 이해하고 움직이는 선수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축구계의 평가다. 

박 감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소 독특한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우선 그동안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이 사용하던 4백 전술을 버리고 3-4-3 전술을 채택했다. 박 감독은 최후방 3백의 좌우를 일반적인 3백의 중앙수비수 2명 대신, 팀에서 가장 볼 간수를 잘하는 미드필더 선수들로 기용했다. 

비록 3백이지만 좌우 사이드백이 마치 측면수비수처럼 빌드업에 가담하게 한 것이다. 대신 미드필더 4명 중 중앙의 2명은 왕성한 체력과 속도를 앞세워 유사시 중앙수비수 역할을 병행하도록 했다. 사실상 중앙수비수와 중앙미드필더들의 자리를 바꾼 것이다.

베트남은 이 역발상을 통해 전술 이해도가 떨어지는 와중에도 질서 있는 공격·수비 전개가 가능해졌다.

냉철한 현실 인식, 실리축구 전략
따뜻한 리더십으로 선수단 이끌어

사실 이것이 완벽한 전술은 아니다. 상대의 최전방 공격수가 중앙 수비수들을 강하게 압박하면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상대 2선 공격수들의 공격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감독은 베트남 대표팀의 경쟁상대로 꼽히는 국가 사이에선 큰 위협이 되는 공격수가 많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그대로 적중했다.

박 감독은 ‘파파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그는 부임 후 베트남 문화를 존중하고 선수들을 자식처럼 대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2018년 12월 스즈키컵 당시, 결승 1차전을 위해 말레이시아로 이동하던 중 비행기에서 부상 선수에게 자신의 비즈니스석을 양보한 미담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또 스즈키컵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기자회견 중인 박 감독에게 물을 뿌리며 깡충깡충 뛴 적이 있었다.

이때 박 감독은 싫은 내색 없이 선수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선수들의 얼굴을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였다. 박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박 감독은 선수단과 소통하기 위해 먼저 다가서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대회마다 직접 의무실을 찾아가 부상 중인 선수들을 직접 위로했고,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 선수들에겐 따로 양해를 구했다.

박 감독은 아직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국내 감독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지만, 박 감독이 직접 선을 그었다.

그는 지난 17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전에도 베트남과 한국에선 감독을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다”며 “한국에는 저보다 훌륭한 후배, 동료가 많다. 한국에서 현장 지도자로서 할 역할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가 성격상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못 한다”며 “소속사 대표가 제 미래에 대해 몇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도 생각해봐야 한다. 가족들과도 상의해야 할 부분이다.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게 저에게 적합한지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분명한 건 제가 축구를 가장 잘할 수 있으므로 축구계에 종사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박 감독은 행정가로 일할 생각도 전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국내에서 협회나 연맹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행정적인 건 제 능력이 안 된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제안이 온다면 고려하겠지만, 협회나 연맹에 갈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한국과 베트남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제안이 온다면 충분히 관심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은
어디로?

당장 다음 월드컵부터 종전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본선 참가국이 늘어났다. 아시아 국가의 본선 진출 자리가 늘어나면서, 이를 노리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 국가들이 박 감독을 영입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박 감독 역시 아직 사령탑 자격으로 월드컵에 나서본 적이 없는 만큼, 이는 동기 부여를 명확하게 주는 제안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박 감독은 “이번 카타르월드컵 개최국 카타르를 보면서 월드컵에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며 “부족하지만, 저를 불러준다면 한 번 생각은 해볼 것이다. 하지만 저를 불러주는 팀이 있겠느냐”고 웃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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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