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겨울날 매서운 한파는 예삿일이라지만, 이번엔 물가마저 매섭다. 연탄값이 오르니 ‘연탄은행’으로 들어오는 연탄이 많이 줄었다. 봉사자도 예년 3분의 2 수준에 그쳤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연탄을 옮긴다. <일요시사>는 연탄은행 정기봉사자들과 함께 백사마을로 향했다. ‘이중고’ 속 분전하는 봉사자들이 내쉬는 숨은 사뭇 거칠었다.
서울 동북쪽,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백사마을 입구가 나온다. 밤사이 눈이 잔뜩 내렸다. 텅 빈 마을 곳곳에 눈이 쌓이니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꽤 추운 주말이었다. 지난 17일 서울 평균기온은 영하 7도, 최저기온은 영하 9.8도에 달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 밤을 유난히 춥게 보냈을 것이다. 백사마을은 아직도 연탄을 땐다.
지금도…
이날 봉사는 오전 10시에 시작했다. 20여분을 남기고 봉사자들이 마을 초입의 ‘연탄교회’로 모여들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네받으며 이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봉사자 대부분은 서울 근교에서, 멀게는 인천에서 왔다고 했다.
이들은 마치 ‘연탄 나눔’ 동아리처럼 활동하는 정기 봉사단이다. 날이 추워지는 10월부터 풀리는 이듬해 3월까지. 이들은 수년간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연탄을 날랐다. 달동네 꼭대기까지 연탄 수레를 끌고 올라갔던 이야기, 저녁 뉴스에 출연했던 일화 등 그들만의 추억도 소복이 쌓였다.
봉사자들은 가방에서 더 얇은 옷을 꺼내 들었다. ‘봉사 전용 복장’이라고 했다. 이들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 사회복지사와 함께 교회 맞은 편 집에 잠시 들렀다. 지은 지 족히 40년은 넘어 보이는 목조주택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손님을 반겼다. 아담한 방 안을 침대와 TV, 연탄난로와 의자 2개가 빼곡히 채웠다.
“1970년에 이 동네 들어와서 그 길로 쭉 살았지. 이 집도 목수하던 우리 아저씨가 직접 지은 거야. 아저씨는 3년 전에 먼저 가고 이제 나 혼자 살지.”
할머니는 연탄난로 뚜껑을 열어 안쪽을 보여줬다. 방금 넣은 듯한 연탄 주변으로 새빨간 불꽃이 이글거렸다. 연탄난로 주변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아침에 두 장, 그리고 밤에 또 두 장. 할머니는 “연탄 네 장만 있으면 종일 따뜻하다”며 웃었다.
“예전에는 겨울 되면 집집마다 연탄 넣어주겠다고 주말마다 시끌벅적했지. 봉사한다고 오는 사람도 엄청 많았고, 연탄도 산처럼 쌓아놓고 옮겼다고. 지금은 동네에 원체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도 연탄도(예전에 비하면) 별로 안 와.”
한때 백사마을에는 1200가구가 모여 살았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정부의 강제 이주로 만들어진 달동네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낡아버렸다. 재개발 계획은 십수년간 표류(1370호 <르포> 서울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은 지금…)했다.
매서운 한파 속 백사마을 오르락내리락
지고 나르고…차곡차곡 쌓이는 선한 마음
붕괴 우려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서울시는 주민들에게 ‘조기 이주’를 권했다. 텅 비고 곳곳이 무너진 마을에는 어느덧 100여가구만 남았다. 대부분 세입자다. 이곳이 아니면 몸 둘 곳 없는 일명 ‘취약계층’이 많다. 백사마을의 연탄 수요는 줄었지만, 나눔은 더욱 절실해진 이유다.
할머니는 선뜻 “집 한 번 둘러보라”고 권했다. 미닫이문 너머에 연탄 수백장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연탄과 추위, 무엇이 먼저 끝날 지 한창 머리를 굴릴 때였다. 누군가 집 문을 두드렸다. 모두가 채비를 마쳤다는 신호였다.
이날은 세 집에 250장씩, 총 750장을 옮기기로 했다. 사회복지사 2명과 봉사자 13명이 일제히 마을 중턱으로 향했다. 연탄으로 가득 찬 창고 앞에서 겉옷을 벗었다. 조끼를 입고 토시와 장갑을 꼈다. 비닐장갑과 목장갑으로 중무장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시리다 못해 아렸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온도계는 여전히 영하 8도를 가리켰다.
간단한 설명을 듣고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연탄을 지게에 실어주기 ▲연탄 나르기 ▲연탄을 세면서 쌓기 등 총 세 종류의 분업이 이뤄졌다. “젊어서 힘 잘 쓰게 생겼다”는 칭찬과 함께 지게를 둘러맸다.
연탄 한 장의 무게는 3.65㎏이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연탄이 얼면서 한층 더 묵직해진다고 했다. 성별과 신체조건에 따라 적게는 석 장부터 많게는 열 장까지 옮기는 듯 보였다. “초보자는 무리하지 마라”는 조언과 함께 연탄 여섯 장이 지게에 실렸다.
20㎏이 거뜬히 넘는 무게였다. 수험생 가방을 두 개는 들쳐 맨 기분에 짐짓 놀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생각보다 할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때뿐이었다. 연탄을 단 두 시간 날랐을 뿐인데. 주말 내내 허리가 뻐근했다.
첫 번째 집은 창고에서 70m 정도 아래에 있었다. 줄곧 내리막길이라 해서 마냥 쉽진 않았다. 길 위에 쌓인 눈이 복병이었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아까운 연탄이 떨어져 부서질까 노심초사했다. 내려갈 땐 연탄 위에 무거운 책임감을, 올라갈 땐 가벼운 발걸음에 보람을 실었다. 홑옷에 조끼 차림이었지만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렇게 언덕길을 오가기 여러 번, 이번엔 다른 집 창고에 연탄을 쌓으라는 임무를 받았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바닥과 연탄이 모두 울퉁불퉁해서 무너지지 않게 쌓으려면 요령이 제법 필요했다. 위로 몇 층을 쌓았다가도 휘청거리면 즉각 ‘보수공사’에 나서야 했다. 이 가운데 끊임없이 들어오는 연탄 숫자까지 세려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연탄도 사람도 부족 ‘이중고’
사회 취약계층 향한 도움 절실
봉사자들은 두 집을 마무리하고 창고 앞에서 어묵을 나눠 먹었다. LPG가스 버너 위에서 커다란 냄비가 끓었다. 이 어묵도 후원받은 것이라고 했다.
“기자님도 점잔 떨지 말고 양껏 드세요.”
배려를 담은 핀잔(?)이 날아왔다. “할 만 하냐” “옮기기와 쌓기 중 뭐가 더 쉽냐”는 등 여러 질문이 오고 가는 중에 “연탄값이 계속 오를 것 같다던데 어쩌나” “젊은 친구들이 별로 오질 않아 걱정”이라는 넋두리가 귓전을 스쳤다.
올해 연탄 봉사 단체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연탄과 봉사자 수급이 예년 대비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3년 사이 연탄 가격이 크게 올랐다. 장당 800원 선에 머무르던 연탄 가격은 25% 이상 급등해 현재 1000원을 웃돈다.
생산·유통비용이 치솟으면서 덩달아 가격도 올랐다. 국내 무연탄 생산량은 감소했는데, 수입 단가는 160% 이상 상승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고육지책으로 연탄공장 판매 가격을 3년 연속 639원으로 동결했다. 하지만 유통비용 증가에 따른 가격 인상은 차마 막지 못했다.
연탄 가격이 오르자 기부 물량은 줄었다. 연탄은행에 따르면 연탄 후원량은 최근 3년간 계속 감소세를 이어왔다. 특히 올해 낙폭이 상당하다. 이번 동절기에 기부된 연탄은 25만700장이다. 지난해 들어온 47만장에 비하면 절반을 겨우 넘기는 물량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원봉사자 확보 역시 난항을 겪고 있다. 올해 연탄은행을 찾은 봉사자는 992명. 지난해 같은 시기에는 1498명이 왔었다. 약 3분의 1이 줄어든 셈이다. 젊은 봉사자들의 참여가 절실해 보였다. 이날 봉사자들만 해도 대부분 중장년층이었다.
다시 지게를 메고 마지막 집으로 향했다. 직접 연탄 개수를 세던 할아버지는 봉사자들과 정겨운 안부 인사를 나눴다. 봉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모두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간단한 뒷정리를 끝으로 활동을 마무리했다. 한결 가벼운 몸으로 언덕을 내려왔다. 두꺼운 외투를 다시 입었는데, 외려 한기가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땀이 식어서일까. 아니면 이 마을의 이번 겨울나기가 걱정돼서일까. 어느 쪽이든 확실치 않았다.
넋두리만
하나 확실한 건, 결국 누군가는 연탄을 나를 것이란 사실이다. 언덕 위에는 서울에서 가장 추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봉사자들은 몸과 마음으로, 연탄으로 따스하게 마을을 데운다. 하지만 어쩌면 올해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휑한 마을이 괜히 더 춥게 느껴지진 않을까. 버스는 보람 대신 이런저런 걱정을 싣고 종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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