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도 모르는’ 아이들 문해력 이대로 좋은가

양극화 심해지고 
비판력 사라지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사흘간 무운을 빌었는데 금일 또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최근 불거진 문해력 논란을 관통하는 우스갯소리다. ‘사흘’을 넘어 ‘심심한 사과’로 이어지는 문해력 논란이 뜨겁다. 한국의 실질적 문맹률 논쟁부터 세대 간 갈등, 공교육의 실패와 양극화 등 불똥이 곳곳으로 튀고 있다. 단순히 혹자의 무지라며 비웃고 넘어갈 일은 아니라는 의미다.

발단은 지난달 20일, 서울의 한 카페가 SNS에 올린 공지글이다. 이 카페는 웹툰 작가 사인회 예약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것을 두고 “예약 과정 중 불편을 끼쳐 드린 점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 말씀드린다”고 적었다.

곳곳 불똥
일파만파

문제는 꽤 많은 SNS 이용자가 ‘심심한’의 뜻을 잘못 받아들이면서 발생했다. 본래 의도한 뜻인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 대신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로 이해한 것이다.

이에 일부 이용자는 해당 공지에 “심심한 사과라니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무슨 심심한 사과?” “앞으로 공지글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 올리는 게 어떨까” 등 날선 반응을 보였다.

이 같은 반응이 화제로 떠오르면서 그동안 간간히 알려졌던 문해력 논란 사례가 함께 급부상했다. 예컨대 ‘금일’로 표기된 서류 마감일을 ‘금요일’로 잘못 알아 인사담당자와 갈등을 빚은 취업준비생의 일화, ‘고지식하다’를 ‘높은 지식(high+Knowledge)’으로 알았다는 등의 일화다.


지난해 대선 기간에는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가 출마 선언을 한 안철수 대표를 향해 “무운(武運)을 빈다”고 한 발언을 “운이 없기(無運)를 빈다”고 잘못 해석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이외에도 사흘을 4일로 오인하는 일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지적된 사례다. 

일각에서는 예견된 비극이라는 평이 나온다. 몇 년간 국민의 평균적인 문해력이 떨어지는 추세가 꾸준히 보였다는 의미다.

지난달 23일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2017년 조사 결과, 전체 성인의 22%인 960만명이 일상생활에 실질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실상 문맹인’이라고 보고했다. 실질 문맹이란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지만, 해석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의미한다. 일명 문해력의 문제다.

최근 교육현장 일선에서도 비슷한 하소연이 전해진다. 학교와 학원 교사들은 학생들의 낮은 문해력에 덩달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테면 학생들이 교과서나 교재를 읽어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이다. 

한 교사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수업 내용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교과서에 적힌 단어를 설명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다. 학생마다 다르긴 하지만 수업 진행에 불편을 느낄 정도로 많은 학생의 어휘력‧문해력이 떨어져 있다”고 하소연했다.

성인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전반적인 읽기 소양 수준 역시 전반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해 말 펴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읽기 능력은 비교적 크게 하락했다.


한국 학생들은 읽기·수학·과학 등 세 가지 영역 평균 점수가 2009년에 비해 모두 하락했다. 이 중 읽기 영역의 성취 낙폭이 가장 컸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문장이나 짧은 단락의 의미를 이해하고,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축자적 의미 표상’의 정답률이 두드러지게 낮았다. 이 때문에 기초적 읽기 능력과 관련된 분야에서 성취가 낮게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심심한 사과’ 심심한 게 뭐냐? ‘발칵’
교과서·교재 내용 이해 못 하는 학생들

읽기 능력이 떨어진 원인으로는 단연 독서율 감소가 꼽힌다. 국내 독서율은 매년 내림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만 19세 이상 성인 6000명과 초등학생(4학년 이상) 및 중·고등학생 3320명을 상대로 시행한 ‘국민 독서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율은 47.5%, 연간 종합 독서량은 4.5권으로 나타났다.

2019년에 시행된 이전 조사에 비해 각각 8.2%포인트, 3권 줄어든 수치다. 초·중·고교 학생의 경우에는 연간 종합독서율은 91.4%, 연간 종합독서량은 34.4권이다. 이 역시 2019년과 비교하면 독서율은 0.7%포인트, 독서량은 6.6권 감소했다.

반면 우리나라 문해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거나 젊은 층의 문해력이 기성세대보다 낮은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근거가 되는 지표는 2013년 OECD가 실시한 국제 성인 역량조사(PIAAC)다.

해당 조사에서 우리나라 성인(16~64세)의 문해력은 중상위권이었다. 16~24세 청년층은 최상위권, 45∼54세는 하위권, 55∼65세는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실질문맹률 관련 지표 해석에 오류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지난달 30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실질문맹률을 지적하는 이들이 사용한 근거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실질문맹률 75%는)21년 전 조사를 이용한 침소봉대”라며 “지금은 실질문맹률이 현저히 낮아졌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흔히 인용되는 ‘실질문맹률 75%’의 근거가 되는 자료는 2004년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표한 ‘교육인적자원지표’다. 이는 문해력 단계를 1~5단계로 나눠 1단계는 문해력에 취약한 수준, 2단계는 단순 작업에는 대응할 수 있지만 새로운 직업 등을 학습하는데 문해능력이 부족한 수준 등으로 분류했다. 

2001년 진행한 조사에서는 1단계가 38.0%, 2단계가 37.8%로 집계됐다. 이 둘을 합하면 약 75%가 된다.


올라갔나
떨어졌나

하지만 최근의 문해능력 조사에서는 수치상으로 큰 변화가 있다는 게 신 교수 설명이다.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발표한 ‘2020년 성인문해능력조사’를 살펴보면 1단계 비율은 4.5%, 2단계 비율은 4.2%로 집계됐다.

신 교수는 “1~2단계를 실질문맹률이란 기준으로 하더라도 2020년 조사에선 8.7%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 설명했다.

상반된 주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세대 간 갈등도 확전 양상을 보인다. 한쪽에서는 유튜브 시대에 독서나 한자 교육 부족이 낳은 어휘력의 빈곤을 걱정하고, 다른 한쪽에선 반지성주의, 반엘리트주의적 흐름이 고개를 드는 모양새다.

문해력 부족 자체뿐 아니라 이를 바로잡는 지적에 대해 ‘잘난체하는 꼰대’로 여기는 태도가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이들은 ‘일상 표현을 배제하고, 굳이 어려운 단어를 선택하는 행태가 문제’라는 주장을 편다. 상식-비상식의 대립이 세대 갈등으로 치환되는 흐름이다.

이와 관련해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기성세대의 올바른 지적조차 꼰대 문화로 치부하며 ‘내가 주류다’라는 식으로 세몰이하는 네티즌이야말로 ‘젊은 꼰대’의 전형”이라고 일침을 던졌다.


이외에도 ‘본질적 문제는 종전의 문해력 정의에서 찾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선 기존의 활자 인식 능력을 넘어 온라인정보해석 능력이 요구된다. 일명 ‘디지털 리터러시(Literacy·문해력)’다. 한국 학생들의 디지털 리터러시가 낙제점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바꿔 말하면 디지털 기기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온라인정보를 바르게 해석하거나 취합한 정보를 활용해 더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외려 떨어진다는 뜻이다.

정작 문제
다른 곳에

한국 학생의 디지털 문해력은 OECD 회원국 중 하위권이다. 지난해 5월 OECD가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 학생(만 15세)이 온라인에서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문제를 맞히는 ‘정답률’은 25.6%에 그쳤다. 미국 69.0%, OECD 평균 47.4%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소득수준에 따라 디지털 문해력 격차가 벌어지고, 또 이로 인해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악순환이 전망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서울 중고교생 1만3141명을 조사한 결과, 부모 경제력에 따라 디지털 문해력 격차가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는 지난달 28일 ‘Z세대 서울학생의 디지털 리터러시와 학교 환경의 관계’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온라인 정보 활용, 미디어 비판 등에 대한 개인 능력은 가정 경제 수준에 따라 최대 9.1%포인트까지 격차를 보였다.

이를테면 ‘인터넷정보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다’는 문항에 가정환경이 ‘상’이라고 응답한 학생은 81.5%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중’ ‘하’라고 응답한 학생이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75.7%, 72.4%에 그쳤다. 

온라인플랫폼 및 자료학습 활용, 인터넷정보 사실 구분 여부 등 다른 문항에서도 경제 수준에 따라 3∼9%포인트씩 차이가 났다. 보고서는 “가정환경에 따른 디지털 문해력 격차가 유의미하게 나타났다”며 “취약계층 학생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운 없는 게 무운?
잘못 해석 촌극도

디지털 문해력 격차가 학습 능력 격차와 성인이 된 후 소득격차로 이어진다는 우려가 나온다. 박주호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는 “(청소년 시기)디지털 활용 능력 차이가 향후 직업 선택의 폭까지 좌우할 수 있다”며 “디지털 교육 기반이 열악한 지역이나 취약계층을 위한 ‘핀셋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부도 학생들의 디지털 문해력을 높이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대통령까지 관련 발언을 통해 중요성을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국무회의에서 ‘디지털 인재 100만명 양성 방안’을 보고받고 “디지털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체계적으로 제공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관련 부처인 교육부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교육부가 지난달 30일 공개한 ‘2022 개정 교육 과정’ 시안에는 문해력 교육 보충안이 대거 포함됐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국어 수업시간이 지금보다 34시간 늘어날 예정이다. 고등학교에선 미디어 문해력을 높일 목적으로 ‘매체 의사소통’ 과목을 신설한다.

‘독서와 작문’ ‘독서 토론과 글쓰기’도 선택과목으로 도입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키울 방침이다.
새 교육과정은 2024년 초등학교 1‧2학년, 2025년 중·고교 1학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교육부가 즉각 행동에 나선 배경은 이미 문해력 저하 현상을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학력조사 결과를 통해 문해력 저하 현상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

지난해 교육부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고교 2학년의 국어과 ‘보통학력’ 이상 비율은 64.3%에 그쳤다. 2019년 77.5%였던 게 2년 만에 13.2%포인트 하락했다. 중학교 3학년 역시 같은 기간 82.9%에서 74.4%로 쪼그라들었다.

이에 새 교육과정은 취학 초기부터 기초 문해력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뒀다. 교육부는 개정 국어과 교육 과정에서 “다양한 유형의 글, 작품, 복합 매체 자료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창의적으로 표현한다”고 명시했다.

가르치면
달라질까

일부에서는 언어 교체 속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한자어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자에 대한 교육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보수적인 접근”이라며 “이보다 어려운 한자어로 된 개념어 학습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관련 주장을 일축했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문해력 논란 타고…관련 도서 열풍

최근 불거진 ‘심심한 사과’ 논란에 서점가가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다.

어휘력·문해력 도서를 찾는 이가 부쩍 늘어나면서 해당 분야 출간‧판매가 활발하다.

지난 1일 출판업계에 따르면 어휘력·문해력 관련 도서 출간이 최근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다.

온라인 서점 예스24가 지난 1월부터 지난달까지 교재류를 제외한 어휘력·문해력·글쓰기·맞춤법 관련 인문서 출간 종수를 집계한 결과, 116종으로 확인됐다.

전년 동기 대비 43.21% 증가한 수치다.

일찍이 자녀의 기초 어휘력과 문해력을 길러 주려는 움직임도 분주하다.

코로나19 유행의 여파로 학습 격차가 벌어진 것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어린이 대상 관련 도서는 2020년 5종에서 지난해 33종으로 늘었으며 올해도 전년 동기 대비 276.34% 판매 성장률을 보인다.

다만 이 같은 독서 열풍이 세대 간극을 메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작 문해력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고 평가받는 Z세대의 참여가 비교적 저조한 탓이다. 

예스24 관계자에 따르면 관련 도서 구입 연령대는 40대(33.82%) 30대(25.98%) 50대(17.39%) 20대(16.34%) 순이다.

구입 연령대만 놓고 보면 문해력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중‧장년층의 도서 구매 비율이 청년세대 몫을 웃돈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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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