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도 모르는’ 아이들 문해력 이대로 좋은가

양극화 심해지고 
비판력 사라지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사흘간 무운을 빌었는데 금일 또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최근 불거진 문해력 논란을 관통하는 우스갯소리다. ‘사흘’을 넘어 ‘심심한 사과’로 이어지는 문해력 논란이 뜨겁다. 한국의 실질적 문맹률 논쟁부터 세대 간 갈등, 공교육의 실패와 양극화 등 불똥이 곳곳으로 튀고 있다. 단순히 혹자의 무지라며 비웃고 넘어갈 일은 아니라는 의미다.

발단은 지난달 20일, 서울의 한 카페가 SNS에 올린 공지글이다. 이 카페는 웹툰 작가 사인회 예약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것을 두고 “예약 과정 중 불편을 끼쳐 드린 점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 말씀드린다”고 적었다.

곳곳 불똥
일파만파

문제는 꽤 많은 SNS 이용자가 ‘심심한’의 뜻을 잘못 받아들이면서 발생했다. 본래 의도한 뜻인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 대신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로 이해한 것이다.

이에 일부 이용자는 해당 공지에 “심심한 사과라니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무슨 심심한 사과?” “앞으로 공지글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 올리는 게 어떨까” 등 날선 반응을 보였다.

이 같은 반응이 화제로 떠오르면서 그동안 간간히 알려졌던 문해력 논란 사례가 함께 급부상했다. 예컨대 ‘금일’로 표기된 서류 마감일을 ‘금요일’로 잘못 알아 인사담당자와 갈등을 빚은 취업준비생의 일화, ‘고지식하다’를 ‘높은 지식(high+Knowledge)’으로 알았다는 등의 일화다.


지난해 대선 기간에는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가 출마 선언을 한 안철수 대표를 향해 “무운(武運)을 빈다”고 한 발언을 “운이 없기(無運)를 빈다”고 잘못 해석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이외에도 사흘을 4일로 오인하는 일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지적된 사례다. 

일각에서는 예견된 비극이라는 평이 나온다. 몇 년간 국민의 평균적인 문해력이 떨어지는 추세가 꾸준히 보였다는 의미다.

지난달 23일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2017년 조사 결과, 전체 성인의 22%인 960만명이 일상생활에 실질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실상 문맹인’이라고 보고했다. 실질 문맹이란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지만, 해석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의미한다. 일명 문해력의 문제다.

최근 교육현장 일선에서도 비슷한 하소연이 전해진다. 학교와 학원 교사들은 학생들의 낮은 문해력에 덩달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테면 학생들이 교과서나 교재를 읽어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이다. 

한 교사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수업 내용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교과서에 적힌 단어를 설명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다. 학생마다 다르긴 하지만 수업 진행에 불편을 느낄 정도로 많은 학생의 어휘력‧문해력이 떨어져 있다”고 하소연했다.

성인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전반적인 읽기 소양 수준 역시 전반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해 말 펴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읽기 능력은 비교적 크게 하락했다.


한국 학생들은 읽기·수학·과학 등 세 가지 영역 평균 점수가 2009년에 비해 모두 하락했다. 이 중 읽기 영역의 성취 낙폭이 가장 컸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문장이나 짧은 단락의 의미를 이해하고,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축자적 의미 표상’의 정답률이 두드러지게 낮았다. 이 때문에 기초적 읽기 능력과 관련된 분야에서 성취가 낮게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심심한 사과’ 심심한 게 뭐냐? ‘발칵’
교과서·교재 내용 이해 못 하는 학생들

읽기 능력이 떨어진 원인으로는 단연 독서율 감소가 꼽힌다. 국내 독서율은 매년 내림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만 19세 이상 성인 6000명과 초등학생(4학년 이상) 및 중·고등학생 3320명을 상대로 시행한 ‘국민 독서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율은 47.5%, 연간 종합 독서량은 4.5권으로 나타났다.

2019년에 시행된 이전 조사에 비해 각각 8.2%포인트, 3권 줄어든 수치다. 초·중·고교 학생의 경우에는 연간 종합독서율은 91.4%, 연간 종합독서량은 34.4권이다. 이 역시 2019년과 비교하면 독서율은 0.7%포인트, 독서량은 6.6권 감소했다.

반면 우리나라 문해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거나 젊은 층의 문해력이 기성세대보다 낮은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근거가 되는 지표는 2013년 OECD가 실시한 국제 성인 역량조사(PIAAC)다.

해당 조사에서 우리나라 성인(16~64세)의 문해력은 중상위권이었다. 16~24세 청년층은 최상위권, 45∼54세는 하위권, 55∼65세는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실질문맹률 관련 지표 해석에 오류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지난달 30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실질문맹률을 지적하는 이들이 사용한 근거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실질문맹률 75%는)21년 전 조사를 이용한 침소봉대”라며 “지금은 실질문맹률이 현저히 낮아졌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흔히 인용되는 ‘실질문맹률 75%’의 근거가 되는 자료는 2004년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표한 ‘교육인적자원지표’다. 이는 문해력 단계를 1~5단계로 나눠 1단계는 문해력에 취약한 수준, 2단계는 단순 작업에는 대응할 수 있지만 새로운 직업 등을 학습하는데 문해능력이 부족한 수준 등으로 분류했다. 

2001년 진행한 조사에서는 1단계가 38.0%, 2단계가 37.8%로 집계됐다. 이 둘을 합하면 약 75%가 된다.


올라갔나
떨어졌나

하지만 최근의 문해능력 조사에서는 수치상으로 큰 변화가 있다는 게 신 교수 설명이다.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발표한 ‘2020년 성인문해능력조사’를 살펴보면 1단계 비율은 4.5%, 2단계 비율은 4.2%로 집계됐다.

신 교수는 “1~2단계를 실질문맹률이란 기준으로 하더라도 2020년 조사에선 8.7%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 설명했다.

상반된 주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세대 간 갈등도 확전 양상을 보인다. 한쪽에서는 유튜브 시대에 독서나 한자 교육 부족이 낳은 어휘력의 빈곤을 걱정하고, 다른 한쪽에선 반지성주의, 반엘리트주의적 흐름이 고개를 드는 모양새다.

문해력 부족 자체뿐 아니라 이를 바로잡는 지적에 대해 ‘잘난체하는 꼰대’로 여기는 태도가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이들은 ‘일상 표현을 배제하고, 굳이 어려운 단어를 선택하는 행태가 문제’라는 주장을 편다. 상식-비상식의 대립이 세대 갈등으로 치환되는 흐름이다.

이와 관련해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기성세대의 올바른 지적조차 꼰대 문화로 치부하며 ‘내가 주류다’라는 식으로 세몰이하는 네티즌이야말로 ‘젊은 꼰대’의 전형”이라고 일침을 던졌다.


이외에도 ‘본질적 문제는 종전의 문해력 정의에서 찾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선 기존의 활자 인식 능력을 넘어 온라인정보해석 능력이 요구된다. 일명 ‘디지털 리터러시(Literacy·문해력)’다. 한국 학생들의 디지털 리터러시가 낙제점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바꿔 말하면 디지털 기기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온라인정보를 바르게 해석하거나 취합한 정보를 활용해 더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외려 떨어진다는 뜻이다.

정작 문제
다른 곳에

한국 학생의 디지털 문해력은 OECD 회원국 중 하위권이다. 지난해 5월 OECD가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 학생(만 15세)이 온라인에서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문제를 맞히는 ‘정답률’은 25.6%에 그쳤다. 미국 69.0%, OECD 평균 47.4%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소득수준에 따라 디지털 문해력 격차가 벌어지고, 또 이로 인해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악순환이 전망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서울 중고교생 1만3141명을 조사한 결과, 부모 경제력에 따라 디지털 문해력 격차가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는 지난달 28일 ‘Z세대 서울학생의 디지털 리터러시와 학교 환경의 관계’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온라인 정보 활용, 미디어 비판 등에 대한 개인 능력은 가정 경제 수준에 따라 최대 9.1%포인트까지 격차를 보였다.

이를테면 ‘인터넷정보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다’는 문항에 가정환경이 ‘상’이라고 응답한 학생은 81.5%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중’ ‘하’라고 응답한 학생이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75.7%, 72.4%에 그쳤다. 

온라인플랫폼 및 자료학습 활용, 인터넷정보 사실 구분 여부 등 다른 문항에서도 경제 수준에 따라 3∼9%포인트씩 차이가 났다. 보고서는 “가정환경에 따른 디지털 문해력 격차가 유의미하게 나타났다”며 “취약계층 학생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운 없는 게 무운?
잘못 해석 촌극도

디지털 문해력 격차가 학습 능력 격차와 성인이 된 후 소득격차로 이어진다는 우려가 나온다. 박주호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는 “(청소년 시기)디지털 활용 능력 차이가 향후 직업 선택의 폭까지 좌우할 수 있다”며 “디지털 교육 기반이 열악한 지역이나 취약계층을 위한 ‘핀셋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부도 학생들의 디지털 문해력을 높이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대통령까지 관련 발언을 통해 중요성을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국무회의에서 ‘디지털 인재 100만명 양성 방안’을 보고받고 “디지털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체계적으로 제공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관련 부처인 교육부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교육부가 지난달 30일 공개한 ‘2022 개정 교육 과정’ 시안에는 문해력 교육 보충안이 대거 포함됐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국어 수업시간이 지금보다 34시간 늘어날 예정이다. 고등학교에선 미디어 문해력을 높일 목적으로 ‘매체 의사소통’ 과목을 신설한다.

‘독서와 작문’ ‘독서 토론과 글쓰기’도 선택과목으로 도입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키울 방침이다.
새 교육과정은 2024년 초등학교 1‧2학년, 2025년 중·고교 1학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교육부가 즉각 행동에 나선 배경은 이미 문해력 저하 현상을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학력조사 결과를 통해 문해력 저하 현상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

지난해 교육부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고교 2학년의 국어과 ‘보통학력’ 이상 비율은 64.3%에 그쳤다. 2019년 77.5%였던 게 2년 만에 13.2%포인트 하락했다. 중학교 3학년 역시 같은 기간 82.9%에서 74.4%로 쪼그라들었다.

이에 새 교육과정은 취학 초기부터 기초 문해력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뒀다. 교육부는 개정 국어과 교육 과정에서 “다양한 유형의 글, 작품, 복합 매체 자료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창의적으로 표현한다”고 명시했다.

가르치면
달라질까

일부에서는 언어 교체 속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한자어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자에 대한 교육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보수적인 접근”이라며 “이보다 어려운 한자어로 된 개념어 학습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관련 주장을 일축했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문해력 논란 타고…관련 도서 열풍

최근 불거진 ‘심심한 사과’ 논란에 서점가가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다.

어휘력·문해력 도서를 찾는 이가 부쩍 늘어나면서 해당 분야 출간‧판매가 활발하다.

지난 1일 출판업계에 따르면 어휘력·문해력 관련 도서 출간이 최근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다.

온라인 서점 예스24가 지난 1월부터 지난달까지 교재류를 제외한 어휘력·문해력·글쓰기·맞춤법 관련 인문서 출간 종수를 집계한 결과, 116종으로 확인됐다.

전년 동기 대비 43.21% 증가한 수치다.

일찍이 자녀의 기초 어휘력과 문해력을 길러 주려는 움직임도 분주하다.

코로나19 유행의 여파로 학습 격차가 벌어진 것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어린이 대상 관련 도서는 2020년 5종에서 지난해 33종으로 늘었으며 올해도 전년 동기 대비 276.34% 판매 성장률을 보인다.

다만 이 같은 독서 열풍이 세대 간극을 메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작 문해력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고 평가받는 Z세대의 참여가 비교적 저조한 탓이다. 

예스24 관계자에 따르면 관련 도서 구입 연령대는 40대(33.82%) 30대(25.98%) 50대(17.39%) 20대(16.34%) 순이다.

구입 연령대만 놓고 보면 문해력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중‧장년층의 도서 구매 비율이 청년세대 몫을 웃돈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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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