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해커’ 권석철 묻지마 흥망기

새빨간 거짓말에 다 넘어갔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1세대 해커로서 한때 국내 정보보안 업계 중심에 섰던 이가 있다. 바로 권석철 큐브피아 대표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가 ‘악덕 사장’ ‘사기꾼’으로 바뀐 지 오래다. 지난해 임금체불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그는 2심에서 가까스로 실형을 면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다. 그는 2019년부터 불거진 암호화폐 사기 혐의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권석철 큐브피아 대표는 1998년 ‘하우리’를 설립하며 정보보안 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안랩의 후발주자이긴 했지만, 자체 개발한 백신 프로그램 ‘바이로봇’은 업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회사는 코스닥에 상장됐고 권 대표는 2000년 국무총리 표창에 이어 2003년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1세대 해커로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과거의 영광
드러난 진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굴지의 정보보안 회사로 성장하던 회사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권 대표의 84억원 횡령 사실이 드러난 탓이었다. 당시 하우리는 권 대표 지인 회사에 투자하고 있었다. 무리한 해외 사업 확장을 일삼던 이 회사가 어려워지자, 하우리도 덩달아 자금난에 빠졌다.

권 대표는 사채업자에게 본인 몫의 지분을 맡기고 허위 증자까지 감행했다. 회사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맡고 있던 권 대표의 부인은 회사 통장에서 84억원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관했다. 결국 권 대표는 횡령 혐의로 1년 반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 사이 하우리는 코스닥에서 퇴출당했다. 일부 우려 섞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출소 후 업계 복귀에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2010년에는 ‘큐브피아’라는 새로운 회사도 꾸렸다. 


2010년대에는 유독 북한의 사이버 공격이 잦았다. 권 대표는 지상파 방송과 각종 강연에 잇달아 출연하며 유명해졌다. 2015년에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었던 안철수 의원(현 국민의힘)의 초청을 받고 카카오톡 불법 열람‧전면 카메라 원격 작동 등을 시연하기도 했다.

당시 큐브피아는 여러 공공기관에 보안 프로그램을 공급하면서 매출을 올렸다. 국군사이버사령부를 비롯해 북한발 해킹 위협의 최전선에 있는 기관들도 큐브피아의 고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권 대표와 큐브피아가 자부하던 ‘기술력’에는 항상 의문부호가 따라붙었다. 권 대표는 몇 년에 걸쳐 “세계 최초로 해킹 무력화 기술을 개발해 제품화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제대로 입증해 보인 적은 없었다. 그는 회사의 기술력이 해커가 프로그램을 읽거나 분석하기 어렵게 만드는 ‘난독화’를 넘어 아예 데이터값을 읽지 못하게 하는 ‘불독화’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권 대표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2013년 제품 발표회에서 불독화 기술을 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진위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업계 선구자서 악덕사장·사기꾼으로
84억원 횡령·임금 체불로 잇달아 재판

한때 “CC(정보기술 보안 평가를 위한 공통평가 기준)인증을 받기 위해 준비 중”이라던 권 대표의 설명과는 달리, 불독화 기술은 상용화되기는커녕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이후 약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업계를 통틀어 불독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권 대표는 2019년 시작한 암호화폐 사업에도 실패했다. 그는 싱가포르에 푸카오글로벌이라는 법인을 설립하고, ‘피코(PKO)코인’이라는 이름의 암호화폐를 발행했다. 권 대표는 피코코인 수익을 빌미로 투자자에게 돈을 빌렸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투자자에게 돈을 갚지 않았다.


더군다나 권 대표는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상장 일정을 지키지 못했다. 한때는 극소수의 중소 거래소에 상장되기도 했지만, 상장폐지·입출금 금지 조치가 이어지면서 피코코인은 지난해부터 거래가 불가능하다. 해외 사이트에서는 2019년 하반기부터 일찍이 신용 사기(스캠) 코인 리스트에 등재된 것으로 알려졌다.

권 대표는 일명 ‘복사 방지(Flu-Fake)’ 기술이 완성됐다고 주장해 투자자들을 현혹했다. 하지만, 이는 과거 큐브피아가 개발했다고 주장한 ‘권가 온라인 매체 제어 솔루션’과 유사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권 대표 주장에 따르면 권가 온라인 매체 제어 솔루션은 불법으로 중요 데이터를 외부로 전송할 경우 유출된 파일 자체를 가짜 파일로 변환‧전송하는 기술이다. 홍보 영상에서 소개된 복사 방지 기술과 ‘판박이’인데다, 권가 기술 자체도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투자자들은 이 점을 들어 권 대표가 투자를 실패한 것이 아니라‘투자 사기’를 저지른 걸로 확신하고 있다.

이외에도 권 대표는 “전 세계 암호화폐 지갑을 모두 풀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또 다른 허위 사실을 앞세워 투자금을 모았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피코코인에 얽힌 정확한 피해 규모는 산정하기 어렵다. 다만 피해자가 수백명에 달하는 만큼, 그 금액은 최소 수억원에서 최대 수십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권 대표는 또다시 법정에 섰다. 혐의는 근로기준법 위반. 직원 임금과 퇴직금을 체불하고도 이를 수년간 지급하지 않았다. 그는 1심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임금체불 사건으로는 이례적인 실형 선고였다. 권 대표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곧바로 항소했지만, 세간이 이미 ‘임금체불 실형’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성 없이
2차 가해

이 판결은 권 대표의 ‘악덕 사장’ 행적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신호탄이 됐다.

한 노동법 전문 변호사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임금체불을 이유로 실형이 선고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라며 “실형이 선고됐다는 건 상습적 임금체불 등 (피고인의)죄질이 특별히 불량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실제로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권 대표는 근로기준법위반죄,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위반죄 등의 처벌 전력이 있다”고 명시한 데 이어 “부실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근로자들의 임금과 퇴직금을 제대로 지급할 능력이 없음에도 근로자들을 채용하고서는 피해 근로자들에게 임금과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 등 사용자로서의 책임 의식이 극히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권 대표는 실제로 수차례 임금체불을 범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외에도 직원들에게 각종 ‘갑질’을 이어온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일요시사>는 권 대표를 고소한 A씨와 연락이 닿았다. A씨는 수년간 큐브피아에서 각종 부조리에 시달리다 결국 퇴사했다. 

A씨 증언에 따르면 그는 2015년부터 2017년 초 사이에 총 13개월어치 임금이 체불됐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월급을 받지 못한 셈이다. 체불임금 중 일부는 퇴사 이후에, 나머지와 퇴직금은 형사 재판 2심 선고 전날에야 받을 수 있었다. 3000만원이 넘는 돈을 5년이 훌쩍 지나고서야 마지못해 넘겨준 셈이다. 


권 대표는 A씨에게 사업자금 명목으로 빌려간 1000만원도 갚지 않았다. 회사를 걱정하는 마음에 대출까지 받아 빌려준 돈이었다. 월급도, 빌려준 돈도 받지 못한 A씨는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다.

직장 내 괴롭힘 방관, 직원 개인정보 무단 도용 등의 만행도 이어졌다. 하지만 직원 대부분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2010년대 후반 당시 직원 중 상당수가 병역특례자로, 큐브피아에서 대체복무 중이었기 때문이다. 병무청 홈페이지에 따르면 큐브피아는 현재 병역지정업체 자격을 박탈당한 상태다.

A씨는 참다못해 권 대표를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했다. A씨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여러 직원이 한때 권 대표를 신뢰하고, 임금체불 피해를 감내해가며 꿈을 키웠다”면서 “하지만 권 대표가 직원 사이를 이간질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에 실망해 법적 책임을 묻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잠수 타고
연락두절

권 대표는 ‘진정취하서’를 앞세워 민형사 재판에서 각종 혐의와 채무를 대부분 부인했다. A씨가 재직 중이던 2016년 11월, 권 대표가 직원들을 압박해 사실상 서명을 강요한 문서였다.

권 대표는 “A씨가 (명시된 날짜에)앞서 퇴사했기에 그날 이후의 임금과 퇴직금 부분에 대해서는 지급 의무가 없고, A씨가 처벌불원의사를 밝힌 만큼 공소기각 사유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권 대표의 주장을 대부분 기각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A씨가 사직서를 작성해 권 대표에게 제출한 적은 있지만 그 뒤에도 계속 권 대표 회사에서 근무한 게 확인된다”고 판단했다. 이어 “A씨가 권 대표의 요청에 따라 진정취하서를 작성했지만, 당시에는 A씨가 권 대표를 진정(고소)하지 않았던 때인데다 수사기관에 제출된 바도 없으니 문건 내용과 달리 취하의 의미가 없다”고 판시했다.

2심 재판부는 “원심이 판시한 사정들에다가 원심이 적법하게 채택해 조사한 증거에 의해 인정되는 사정들, 곧 A씨는 ‘원심 법정에서 회사 측에서 재직 직원 전부를 모아놓고 회사가 어려운데 이 서류를 작성해 주면 투자를 받거나 회사 경영을 정상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니 써달라고 해 쓸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의지로 작성한 것은 아니다’라고 진술했던 점 등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부연했다.

이어 “권 대표는 A씨에 대한 미지급 임금 등을 무려 5년이 지나도록 청산하지 않다가 선고 전날 피해자의 계좌에 위 금액을 입금했다”고 지적했다.

권 대표는 지난 15일 징역 6월과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받았다. ‘막판 입금’을 통해 가까스로 실형은 면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권 대표는 재판 내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판 도중 법정 밖에서 ‘장외전’을 폈다. 그는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린 피해자를 겁박했다. 권 대표는 2019년 10월 A씨에게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권 대표는 “숨어서 비겁하게 글을 남긴다고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며 “계속 그렇게 한다면 나도 대책을 준비하겠다”고 적었다. 이어 “용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후회하지 마라”며 “2년 전 내게 제출한 서류를 잘 기억하라”고 덧붙였다.

재판 직후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반성과 사과 대신 2차 가해를 늘어놨다. 당시 권 대표는 “제대로 근무하지 않은 직원들도 문제가 있다”며 “특히 A씨는 정신질환이 있고 평소 회사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발언했다. 논란이 일자 “그럴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억울함을 토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허위 기술로 투자금 모집…결국 못 갚아
사업 모두 실패…변제능력 사실상 전무

A씨는 민사소송에서도 사실상 승소했다. 민사 재판부는 “회사는 A씨에게 3100만원을, 권 대표는 A씨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판결 이후 권 대표는 A씨에게 일부 비용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자나 소송비용·차용금 등은 아직 상환하지 않았다.

권 대표는 형사 1심 판결 직후였던 지난해 8월 “임금체불 사건 등 논란들에 대해 모두 억울한 측면이 많다. 하지만 일일이 대응하지는 않겠다”며 “2심 재판에서 반박자료가 소상히 다뤄져 의혹을 벗을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전한 바 있다.

이에 <일요시사>는 2심 판결 이후 권 대표 입장을 듣고자 다방면으로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권 대표는 현재 모든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형사 재판에 성실히 출석한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피해자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다. 

큐브피아도 등기상으로만 남아있을 뿐, 사실상 폐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법인 등기에 기재된 큐브피아 사무실 주소로 찾아가 봤지만, 이미 다른 업체가 들어서 있었다. 코인 사기 피해자들에 따르면 권 대표는 이미 지난해 3월 사무실을 비웠다. 

피해자들로서는 권 대표와 접촉할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황. 결국 ‘권 대표의 형사 처벌’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권 대표에게 투자금 상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피해자들 사이에서도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한 피해자는 “냉정하게 금전 회수가 목적이라면 소송해도 어려울 것”이라며 “형사소송을 통해 법적 책임이라도 지게 하면 그나마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수억 이상
코인 사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 또 어디서부터가 거짓이었을까. 거짓과 부정으로 점철된 권 대표의 20년에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다. 권 대표의 몰락만으로는 끝나지 않은 고통. 하지만 권 대표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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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