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화려한 부활 전인지

메이저 여왕으로 돌아오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전인지가 지난달 27일 미국 메릴랜드주 베세즈다 콩그레셔널 골프장에서 열린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2018년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이후로 3년8개월 만에 이뤄낸 쾌거다. 대회 직전까지 은퇴를 고민했다던 전인지. 그는 이번 대회에서 그간의 마음고생을 전부 털어내는 시원한 스윙을 선보였다. 

전인지는 1994년 8월10일 전북 군산 태생으로 유년 시절 IQ가 138에 달해 수학에 두각을 드러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학 영재’와 골프 사이에서 고민하던 전인지는 결국 골프를 선택했다. 이후로는 함평골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주목받는 신인
대기록 달성

2012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에 입회한 뒤 2013년 KLPGA 투어에 데뷔했다. 데뷔 첫해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당시 투어 최강자였던 장하나를 상대로 결승전에서 접전을 벌인 끝에 석패하며 골프 팬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6월에 열린 KLPGA 메이저대회인 ‘기아자동차 한국여자오픈’에서 최종 라운드 마지막 4홀 연속 버디로 극적인 역전 우승을 거뒀다. 전인지는 이 우승으로 KLPGA 투어 데뷔 첫해 한국여자오픈에서 우승한 6번째 선수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김효주가 독식할 것으로 점쳐졌던 신인상 자리에 도전장을 냈다. 두 선수는 모두 일관성 있는 경기력으로 꾸준히 상위권에 들며 신인상 경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전인지가 어깨 부상으로 막판 경기를 접은 탓에, 신인상은 결국 김효주에게 돌아갔다.


2014년에는 부상 여파로 데뷔 후 첫 컷 탈락을 기록하는 등 고전하기도 했지만, 시즌 3승·상금 순위 4위를 기록하며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직행 좌절이었다. 전인지는 2014년 국내에서 열리는 유일의 LPGA 대회인 ‘KEB 하나은행’에 참가했다. 최종일 1위로 나서며 LPGA 직행에 손을 뻗었지만, 후반 실수로 동률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어진 플레이오프에서도 실수가 이어졌다. 

결국 LPGA 직행 출전권은 침착하게 본인 경기를 치른 백규정이 거머쥐었다. 전인지는 백규정의 우승이 확정되자 가장 먼저 다가가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는 아쉬움에 눈물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2015년, 절치부심한 전인지에게 전성기가 찾아왔다. 시즌 초반 KLPGA 4승을 쓸어 담았던 것. 이 중에는 메이저대회 1승도 포함됐다. 이외에도 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JLPGA)의 초청을 받아 출전한 메이저대회 2개에서도 연이어 우승했다.

가장 기념비적인 쾌거는 LPGA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이력이다. 전인지는 초청 선수로 출전해 우승컵을 들었다. 전인지가 만들어낸 ‘이변’은 세계랭킹 급등으로 이어졌고,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진출 가능성을 높였다. ‘신인상을 놓고 경쟁했던 김효주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던 세간의 평가도 뒤집혔다.

3년8개월 만에 LPGA 투어 우승
세계랭킹 12위…단숨에 21계단↑

전인지는 이 우승을 발판으로 이듬해 LPGA 진출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시즌 중반부터 외국인 캐디와 호흡을 맞춰 보는 등 새로운 무대를 위한 준비에도 돌입했다.


또 같은 해 10월25일,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KB금융 스타 챔피언십’에서 3타 차 열세를 뒤집고 최종 라운드에서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로써 전인지는 시즌 KLPGA 5승과 동시에 한·미·일 메이저 5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일찌감치 2015년 상금왕·다승왕을 확정한 것에 이어 대상과 평균타수상까지 추가로 확정지었다. 기록 ‘4관왕’ 전인지는 연말 시상식에서 기자들이 선정한 베스트 플레이어 트로피와 해외 특별상까지 독식했다.

2016년에는 본격적으로 LPGA에 진출했다. 처음으로 참가한 코츠 골프 챔피언십에선 3위를 기록했다. 좋지 않은 몸상태와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서도 선전한 결과였다.

LPGA 데뷔 2번째 경기인 혼다 타일랜드에서는 한 계단 오른 단독 2위를 기록하며 좋은 경기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허리 부상으로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성공적으로 LPGA 데뷔 시즌을 소화하고 있던 전인지에게는 큰 악재였다. 일각에서는 다시 복귀한다고 해도 좋은 경기력을 보일지 의문이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부상에서 돌아온 전인지는 시즌 첫 번째 메이저대회인 ‘ANA인스피레이션’에 출전했다. 전인지는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첫날부터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 연습부족으로 아이언 샷이 부진했음에도, 치료하면서 꾸준히 연습한 쇼트 게임 리커버리 능력으로 이를 메워낸 것이 주효했다.

그는 최종일 챔피언 조 바로 전 조에서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와 맞붙었다. 전인지는 부상 공백에도 훌륭한 경기를 보이며 리디아 고와 팽팽한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한 타를 잃었고, 결국 이 차이로 리디아 고의 우승을 지켜보게 됐다.

전성기
암흑기

이어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여자 골프에 한국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전인지는 1~2라운드에서 계속 선두권을 유지했다. 금메달 획득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졌지만, 마지막 라운드에서 공동 13위로 내려앉았다.

그는 메이저대회 ‘에비앙 챔피언쉽’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전인지는 첫날 박성현과 함께 8언더파 공동 선두에 오른 이후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는,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기록했다. 21언더파 신기록으로 24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LPGA 투어 메이저대회 최소타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메이저 퀸’이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활약이었다. 이때까지 전인지가 기록했던 전 세계 통산 13승을 중 절반 이상인 7승이 메이저 우승이었다.

이 같은 대기록을 수립하자 ‘골프의 전설’로 불리는 아놀드 파머가 직접 우승 축하 이메일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2015년 US 여자 오픈 우승 때에 이어 2번째였다. 아놀드 파머는 전인지의 ‘롤모델’이었기에 기쁨은 더했다. 전인지는 2016년 9월 아놀드 파머가 사망하자 SNS에 파머를 추모하는 게시글을 올렸다. 


전인지는 에비앙 대회 우승 후 세계랭킹 3위에 올랐다. 당시 본인 커리어 최고기록이었다. 결국 남은 시즌과 상관없이 LPGA 신인왕 수상을 확정했다. 압도적인 1위로 역대 10번째 한국인 신인왕에 올랐다. 당시 전인지는 “LPGA로 무대를 옮기며 가졌던 목표 중 하나였기에 감개무량하다”는 소감을 남겼다. 

이어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는 리디아 고에 이어 시즌 내내 2위에 올라있던 평균타수상(베어트로피) 획득을 목표로 임했다. 2라운드에서 리디아 고가 10언더파를 쳐내며 앞서나갔지만, 전인지가 3라운드에서 선전하며 균형을 맞췄다.

둘은 마지막 날 같은 조로 경기에 나섰다. 전인지는 15홀까지 뒤처졌지만, 무서운 뒷심으로 역전을 이뤄냈다. 베어트로피까지 손에 넣은 전인지는 그렇게 화려한 시즌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전인지는 2017년부터 커리어의 정점 대신, 바닥으로 내리 추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린 나이부터 큰 주목을 받으며 느꼈던 부담감과 인터넷 악성 댓글 등으로 심해진 우울감이 악순환을 낳았다. 

결국 2018년 시즌에는 ‘KIA Classic’ 대회를 건너뛰었다. 매년 참가해왔던 대회를 건너뛴 것은 분명한 이상징후였다. 결국 전인지는 KIA 대회 종료 후 발표된 세계랭킹에서 11위로 내려앉았다. 2015년 이후 처음으로 세계랭킹 10위권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화려한 복귀
후련한 눈물


그해에도 한 차례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성적은 뚜렷한 하향세를 보였다.

전인지는 2019년 데뷔 후 가장 좋지 않은 시즌을 보내고 2020년 초엔 진로 고민에 흔들렸다. 이맘때 코로나19로 투어가 중단된 게 오히려 기회가 됐다. 전인지는 투어가 재개될 때까지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초심으로 돌아가 서서히 기량을 회복한 그는 지난 시즌 10위권에 8차례 진입하며 감각을 끌어올렸다.

지난 3월 ‘HSBC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 공동 2위를 기록해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번 우승으로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전인지는 지난달 27일 열린 KPMG 여자 PGA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통산 4승. 전인지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버디 2개 보기 5개로 총 3타를 잃었지만, 최종 합계 5언더파로 2위 렉시 톰프슨·이민지를 1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전인지는 시즌 3번째 메이저 대회인 이번 대회에서 일찌감치 단독 선두로 앞서나갔다. 1라운드 8언더파로 코스 최저타 타이기록을 세웠다. 그는 초반부터 잡은 승기를 마지막 라운드까지 놓치지 않으며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일궈냈다.

우승 상금 150만달러의 주인공이 된 전인지는 이로써 2018년 10월 ‘LPGA KEB 하나은행 챔피언십’ 이후 3년8개월 만에 LPGA투어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또 2015년 US여자오픈, 2016년 에비앙 챔피언십에 이은 통산 세 번째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큰 대회에 강한 ‘메이저 퀸’ 면모를 오랜만에 과시했다.

전인지는 5개 메이저대회 가운데 남은 AIG 여자오픈, 셰브론 챔피언십에서 1승을 추가하면 ‘커리어 그랜드 슬램’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전인지는 이날 마지막 라운드에서 우승에 대한 부담감 탓인지 초반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다.

3타 차 선두로 공동 2위 렉시 톰프슨·최혜진과 챔피언조에서 경기한 전인지는 전반 9홀에서만 버디 없이 보기 4개를 기록하며 잠시 선두자리를 내줬다. 경기 후반인 15번홀까지도 렉시 톰프슨에게 2타 차로 밀렸다. 2위 자리도 위태로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전성기 후 찾아온 긴 슬럼프에 은퇴 고려
‘코로나 휴식기’ 때 절치부심 끝 1위 쾌거

남은 홀은 단 3개. 다 잡은 우승 기회를 놓치는 듯했던 전인지의 뒷심이 발휘됐다. 전인지는 16번홀에서 버디를 기록하며 한 타를 줄였다. 그 사이 톰프슨이 보기를 범하며 순식간에 둘은 공동 1위가 됐다.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전인지는 이어진 17번홀에서 파 세이브에 성공했다. 반면 톰프슨은 재차 보기를 범하며 한 타 차로 다시 선두자리를 내줬다. 마지막 18홀에서 전인지는 파를 기록했다. 끝내 톰프슨에게 재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우승을 확정지었다.

전인지는 지난달 28일 발표한 여자 골프 주간 세계랭킹에서 단숨에 12위로 올라섰다. 전주 33위에서 21계단이나 뛴 순위다. 전인지는 우승 직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소감을 남겼다.

그는 “메이저 3승을 했으니 이제 또 다른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며 “계속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 내 앞에 놓인 새로운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들며 소감을 밝히면서도 울먹임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그는 “‘해냈다’ ‘끝냈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전 대회에서 너무 많이 울어서, 이번에도 울면 너무 울보 같다고 생각해서 울지 않으려고 했다”며 “자꾸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눈물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인지가 울었던 ‘전 대회’는 직전 우승 대회인 2018년 10월 ‘KEB하나은행 챔피언십’이다. 당시에도 2년1개월 만에 우승을 달성하자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는 “힘든 시간이 어느 순간 ‘탁’ 온 게 아니다. 조금씩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스스로 자꾸 바닥으로 밀어 넣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부활의 발판이 되는 듯했던 하나은행 대회 이후에도 이어진 부진의 원인을 정신적인 문제에서 더 크게 찾았다.
결국 전인지는 다시 일어섰다.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메이저대회 우승이라는 결실까지 다시 일궈냈다.

전인지는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골프를 그만두려고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우울함이 나아지고 있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을 때도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다”며 “지난주엔 언니에게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미국에 있기가 힘들다’며 울기도 했다”고 마음고생이 여전했음을 고백했다.

이어 “‘골프처럼 너도 소중하니 그만두라’는 언니의 말에 여전히 골프를 치고 싶다고 느꼈고, 그래서 이번 주에 열심히 했다”고 덧붙였다.

“팬 덕분에
우승했다”

전인지는 팬들에게 각별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원래 팬분들하고 더 많은 소통도 할 수 있었는데, 심적으로 힘들다 보니까 응원조차도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며 “내가 많이 부족한데도 끝까지 포기 안 하고 응원해 주시는 우리 ‘플라잉 덤보’ 팬 카페 여러분, 수많은 팬분 덕분에 이렇게 감사드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전인지의 우승으로 한국 선수들은 이 대회 9승째를 수확했다. 우승한 선수는 총 다섯 명. 박세리, 박인비(각 3회), 박성현, 김세영 그리고 전인지(각 1회)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한국 여자골프 세계랭킹 현주소

오랫동안 한국 선수들이 장악해왔던 여자골프 세계랭킹 상위권 판도가 요동치고 있다.

지난달 열린 메이저대회 ‘KPMG 위민스 PGA챔피언십’을 마친 뒤, 세계랭킹 10위에 든 한국 선수는 고진영(1위)과 김효주(8위)로 총 2명이다.

그동안 4명 이상의 선수가 꾸준히 10위 안에 들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는 김세영(11위)과 박인비(13위)가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결과다.

다만 이번 대회 우승으로 세계랭킹을 21위나 끌어올린 전인지의 상승세가 눈에 띈다.

이번 대회 같은 기량을 계속 유지한다면 머지않아 10위권 진입이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아울러 16위까지 순위를 올려놓은 박민지도 함께 기대를 받고 있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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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