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친구를 괴롭히고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피해자의 전치 6주 진단서까지 확보했지만 고소 취하 의사를 반영하며 사건을 종결시켰다. 시간이 흐른 뒤 피해자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피해자 목숨을 지킬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동창생 간의 극악무도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피의자들은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피해자를 노예처럼 끌고 다녔다. 이들은 금품을 갈취하고 학대한 끝에 목숨까지 앗아갔다.
600만원 갈취
21세인 박씨는 김씨와 대구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 사이였다. 김씨와 안씨는 대구에서 같은 중학교를 나오고 서울 소재 대학에 같이 입학한 친구였다. 지방대에 재학 중이던 박씨는 지난해 7월 김씨와 안씨가 동거 중인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빌라를 찾았다가 안씨를 알게 됐다.
이후 종종 피의자들 주거지를 찾았다.
박씨는 피의자들이 사는 집에 드나들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때 박씨는 실수로 김씨 노트북을 고장 냈다. 김씨는 이 점을 꼬투리 잡아 박씨에게 “내 컴퓨터 고장 낸 걸 갚아야 하지 않느냐, 너희 부모님에게 얘기해도 되냐”며 협박했다.
이후 변제계약서를 쓰게 하며 박씨를 압박했다. 또 고장 난 노트북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박씨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해 소액결제를 하고 이를 다시 판매하는 등 모두 600만원을 갈취했다. 피의자들은 갈취도 모자라 폭행까지 일삼았다.
지난해 11월7일경 박씨는 편의점에서 음료수 1병을 훔치다 걸려 양재파출소에 임의동행됐다. 경찰은 박씨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파악해 대구에 있는 아버지에게 인계했다. 박씨 아버지는 박씨가 전치 6주의 골절상을 받은 것을 확인하고, 같은 달 8일 피의자를 대구 달성경찰서에 상해 혐의로 고소했다.
조사 당시 박씨는 ‘서울 영등포구에서 친구들로부터 네 차례 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달성서는 이 사건을 김씨와 안씨 거주지 경찰서인 서울 영등포경찰서로 넘겼다.
열흘 넘게 가두고 강요·학대
고소했지만…골든타임 놓쳐
사건을 넘겨받은 영등포서는 지난 1월 피의자들을 불러 조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피의자 일당은 앙심을 품고 3월31일 대구로 내려가 “서울로 올라가 일하면서 빚(노트북 수리비)을 갚자”고 협박하며 박씨를 서울로 데려왔다.
이후 박씨가 경찰에 허위진술을 하도록 강요하는 등 피의자들은 자신들의 혐의를 벗기 위해 수사를 방해한 것이다.
이후에도 피의자들은 폭행을 일삼았다. 4월에서 5월 사이 피의자들은 박씨에게 “돈을 벌어 오라”며 두 차례 물류센터 근무를 시켰고, 일터에 함께 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도 한 것으로 파악됐다. 같이 일용직 노동을 한 뒤 박씨가 받은 급여 20만원도 피의자들이 가로챘다.
경찰은 박씨에게 일용직 노동은 외부 사람을 접촉할 기회였지만, 이미 장기간에 걸친 감금 등으로 불안한 심리와 강압 상태에 놓여 있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도망치지는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경찰은 지난 4월17일 영등포서가 피해자들과 대질 조사를 위해 출석을 요청하는 전화를 걸었을 때, 피의자들이 박씨에게 “지방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있어 서울에 올라갈 수 없다”는 취지로 말하라고 강요했다. 또 다음날엔 경찰로부터 박씨가 전화를 받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수상함을 느낀 박씨 아버지는 4월30일 대구 달성경찰서에 박씨 가출신고를 접수했다. 그러나 영등포경찰서는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형사법정보시스템 상에서 가출신고가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3일 박씨는 담당 경찰관에게 피의자들에 대한 고소 취하 의사를 밝히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는 강압 상태에 놓인 박씨가 본인의 의지에 따라 보낸 게 아니라고 경찰은 밝혔다.
‘34kg’ 극심한 영양실조·저체중
몸에 멍과 결박당한 흔적 남아
‘전치 6주’ 진단서까지 확보한 상황이었지만 영등포서는 당사자의 고소 취하 의사를 반영해 지난달 27일 ‘증거불충분’으로 상해죄 사건을 종결했다.
결국 몇 번의 ‘골든타임’을 놓쳤고, 박씨는 지난 13일 마포 연남동 오피스텔의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박씨는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였으며, 체중은 고작 34kg에 불과했다. 몸에는 멍과 결박당한 흔적이 있었다.
안씨와 김씨는 박씨에게 거의 음식물을 제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박씨가 극심한 영양실조와 저체중, 폐렴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안씨와 김씨를 중감금치사 혐의로 긴급체포한 경찰은 이들에게 살인죄 혐의를 적용,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후 법원은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이 피의자들과 박씨 등 3명의 휴대전화를 포렌식해 확보한 자료는 문자메시지 8400건, 동영상 파일 370여개 등이다. 경찰은 이 자료의 상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지만, 여러 강요·학대 상황이 담겨 혐의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들이 수사를 방해하는 한편 박씨에게서 금품을 빼앗고 고소당한 데 보복하려는 목적으로 영상을 촬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평범한 한 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학생이었던 안씨를 대상으로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범행이 일어난 오피스텔은 안씨 부모가 얻어준 작업실인 것으로 전해졌다.
반성 없어
지난 22일 김씨와 안씨는 구속 상태로 검찰에 넘겨졌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해 얼굴을 가린 이들에게 기자들은 “왜 감금 폭행했나?” “피해자가 숨질 것을 몰랐나?” “살인 의도는 없었나?” 등 질문했지만 묵묵부답으로 호송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어떤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