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식재료 이력서>엔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이 담겨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땅콩
이덕무의 작품이다.
柳彈素 琴 饋李雨村所贈落花生(유탄소 금 궤이우촌소증낙화생)
유탄소, 금이 이우촌에게 받은 낙화생을 보내오다
樹有嵇含狀外名(수유혜함장외명)
혜함의 책에 이름 없는 이것을 심으니
辭枝結子落花生(사지결자낙화생)
가지 떨어져 열매 맺으니 낙화생이네
從君手裏傳吾口(종군수리전오구)
그대의 손 거쳐 내 입에 전해지니
別樣香津心肺淸(별양향진심폐청)
향기로운 진액으로 심장과 폐 맑아지네
제목에 등장하는 유탄소는 유금으로 이덕무의 지인이고, 이우촌의 이름은 이조원(李調元)으로 청나라 학자다.
또 낙화생은 ‘떨어진 꽃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인데, 땅콩을 지칭한다.
땅콩 즉 낙화생의 이름이 혜함의 책에도 없다고 했다.
혜함은 중국 진나라 지한(嵇含, 263~306)으로 혜함의 책은 남방초목장(南方草木状)을 지칭하는데 그곳에도 이름이 없다는 의미다.
여하튼 땅콩과 관련된 이덕무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그의 작품 ‘입연기(入燕記, 북경 기행문)’에 실려 있다.
면주(綿州, 중국 사천성) 사람 이정원(李鼎元)을 만나 낙화생을 선물로 받았다.
낙화생은 서촉(西蜀, 사천성 일대)과 민중(閩中, 복건성과 절강성 동남부) 지방에서 생산된다.
4월에 꽃이 피었다가 진 뒤에 그 꽃줄기가 흙속에 묻혀 자연 결실이 되는 것인데, 모양은 콩 같으면서도 콩보다 크고, 겉에는 마르고 흰 포락(包絡)의 껍질이 있다.
그 껍질을 부수면 혹 한두 개의 열매가 있는데, 자황색의 연한 껍질이 입혀 있는 것이 마치 비자(榧子)와 같다.
바탕은 희고 맛은 참깨와 같은데,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 모든 국에 조미하면 맛이 제법 좋으니, 과일 중에 특이한 품종이라 하겠다.
내친김에 이덕무 보다 한 세대 후 인물인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를 덧붙여보자.
그의 작품인 ‘서독’(書牘)에 실려 있다.
「낙화생은 남중(南中) 사람으로 종자를 전해온 자가 있는데, 이것은 촉중(蜀中)의 진기한 과실로서 우리나라에서도 재배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또한 하나의 기이한 과실로서 충분히 수선화와 아름다움을 견줄 만합니다. 감히 식단의 한 가지에 대비하는 바이니, 이것은 반드시 껍질까지 통째로 볶아서 익힌 다음에야 먹을 수 있습니다.」
이덕무와 김정희의 글을 살피면 땅콩의 유래와 전래 과정을 살필 수 있다.
그렇다면 땅콩이란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혹자는 중국 당나라 시절 당에서 도입되어 ‘당콩’이라 지칭하던 것이 땅콩으로 변화됐다고 하는데, 그저 웃고 말 말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 땅에 땅콩 재배가 본격화하게 되자 낙화생은 땅 속에서 나는 콩이라 하여 지두(地豆)라 지칭되고 후일 즉 1930년도 초반에 우리말로 땅콩이라는 이름이 생겨난다.
땅콩 재배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1921년에 일이다. 대한제국 순종의 장인이며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북경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뚝섬에서 낙화생 재배 실패로 인한 빚 독촉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에 체류하다 1935년 10월 객사하게 된다.
황후 아버지의 말로치고는 참으로 비참하다.
그런데 필자에게 문득 그런 생각이 일었다.
빚도 빚이지만 혹시 땅콩 재배를 위해 북경으로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낙화생은 ‘떨어진 꽃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
측천무후가 즐겨 마시던 메추리로 만든 ‘암순주’
메추리알
메추리알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메추리와 관련된 뜨거운 논쟁이 있어 소개한다.
발단은 장자(莊子)로부터 시작됐다.
장자는 ‘소요유(逍遙遊,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며 노님)’에서 “붕새의 등은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올라가 구름을 벗어나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다음에야 남쪽으로 간다. 그가 남쪽 바다로 갈 적에 메추리가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 새는 장차 어디를 가려는 걸까. 나는 뛰어올라 봤자 고작 두어 길도 못 오르고 도로 내려와 쑥대밭 사이에서 빙빙 돌 뿐이지만, 이것도 최고로 나는 것인데, 저 새는 장차 어디를 가려는 걸까’”라면서 “성인이란 메추리처럼 일정한 거처가 없이 살고, 새 새끼같이 주는 대로 먹으며 새처럼 허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녀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천하에 도가 베풀어지고 있으면 만물과 함께 번성하고, 천하에 도가 베풀어지고 있지 않으면 자기 본래의 덕을 닦으며 고요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메추리를 성인에 비유했다.
이에 대해 <시경>에서는 “무릇 금조(禽鳥, 날짐승의 총칭)의 족속이 날아가도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인데 유독 메추리만은 그렇지 않다”고 언급한다.
사냥하는 자가 쫓아가면 달아나서 더욱 멀리만 가기에 메추리는 일정한 거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서>(字書)에 이르기를 “‘밤이면 떼를 지어 날고 낮이면 풀 속에 잠복한다’했으니, 이는 정히 음탕한 계집의 행동과 같다”며 메추리를 문에 기대어 유객행위를 하는 창녀에 비유했다.
메추리에 대한 극과 극의 평가에 대해 어느 설이 옳다고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메추리 고기가 음탕함의 기본인 정력 증진에는 탁월한 듯 보인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애용했던 메추리 고기로 빚은 암순주(鵪鶉酒), 일명 무후주(武后酒)와 관련된 일화다.
측천무후는 남편인 고종이 죽자 권력을 잡고 신하와 미소년은 물론 길거리의 고약장수까지 침실로 불러들여 여든살이 넘어서까지 왕성한 정력으로 쾌락에 빠져 지냈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즐겨 마시던, 메추리 고기로 빚은 암순주 덕에 가능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때 메추리 고기는 물론 메추리알도 정력 증진에 좋다고 해 우후죽순 식으로 메추리 농장이 세워지고 메추리를 사육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195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자.
당시 메추리가 경제 동물로 급부상하자 정부 부처 간에 알력이 발생하게 된다.
메추리 수입과 관련해서다.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일을 두고 상공부와 농림부가 서로 경쟁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 상공부가 판정승을 거뒀다.
그런데 수입을 본격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공부는 메추리 수입은 자신들이 주관하고 메추리알 수입은 농림부가 관장하라고 주장했다.
상공부 관계자가 일본의 수출상으로부터 전해 듣게 된 한마디 ‘한국이 메추리도 비싼 값으로 잘 사주고 있으니 한국은 일본에게 고마운 나라’라는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를 접한 농림부 당국자는 ‘메추리알의 영양 가치는 달걀의 4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반에 공표하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여하튼 그 시절 이후 메추리알이 본격적으로 식용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농림부 당국자의 말과는 다르게 알려지고 있다.
즉 메추리알이 단백질, 지방, 무기질 함량 그리고 글루타민산을 비롯한 일부 아미노산의 함량은 달걀보다 높다고.
메추리알과 달걀의 성분을 비교하면 비타민 A는 달걀이 3배가량 많으나, 비타민 B2는 메추리알이 3배가량 더 높다고 알려져 있다.
아울러 메추리알에는 어린이 성장발육에 필요하고 회복기 환자 치유에 필요한 성분인 라이신, 메티오닌, 트립토판 등이 함유돼있다고도 한다.
그러니 메추리알을 굳이 달걀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저 그 조그마한 메추리알이 달걀에 비해 조금도 손색없다는 측면에서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떠올리며 메추리알 장조림을 ‘심심풀이 땅콩 먹듯’ 섭취할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