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올림픽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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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0.08.10 09:53:59
  • 호수 12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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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뛰기를 뒤집다

▲ 딕 포스베리

[JSA뉴스] 역대 올림픽의 결승전들은 감동과 드라마, 그리고 아름다운 순간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1968년 10월19일과 20일 사이 멕시코시티올림픽의 유니버시티 올림픽스타디움서 치러진 남자 높이뛰기에 미국대표로 출전한 ‘딕 포스베리(Dick Fosbury, 1947∼)처럼 종목 전체를 영원히 바꿔버릴 정도의 혁신은 흔치 않은 일이다.

놀림

그가 당시에 선보였던 높이뛰기의 ‘플롭(Flop, 배면뛰기-몸을 뒤로 눕혀 등 뒤로 뛰어넘는 기술)’은 높이뛰기의 혁명을 일으키며 지금 거의 모든 선수들이 시도하는 당연한 기술이 됐다.

육상의 필드 종목 중 하나인 높이뛰기는 1986년 제1회 그리스의 아테네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돼 올림픽의 역사와 함께 한 경기종목이다. 도움닫기부터 시작해 도약과 점프를 통해 정해진 높이의 바(Bar)를 넘는 경기다.

포스베리의 올림픽 출현  이전까지의 높이뛰기는 앞을 보고 도약해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바(Bar)를 넘는 ‘스트래들(Straddle)’기술이나 아니면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도약해 다리를 벌려 넘는 ‘가위뛰기(Scissors)’기술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미국 남자 높이뛰기 ‘딕 포스베리’
최초로 선보인 ‘플롭’ 기술 ‘발칵’


그러나 포스베리는 193cm의 큰 키 때문에 스트래들 기술이나 가위뛰기 기술로는 큰 성공을 거둘 수가 없었고, 고등학교 선수 시절에는 높이뛰기 종목 지역 팀에도 선발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는 대신 1963년부터 높이뛰기의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높이뛰기 종목에 대한 접근법 자체를 영원히 바꿔버리게 되는 기술, ‘포스베리 플롭(Fosbury Flop)’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출전 자격을 획득하며 무명의 포스베리는 자신의 특이한 기술을 전 세계에 소개할 기회를 얻게 된다. 도움닫기의 방향을 대각선으로 시작해 도약시 몸을 180도로 뒤틀어 등 뒤로 점프한 다음, 등을 뒤로 젖히며 바를 넘는 포스베리의 새로운 기술은 그 당시에 이미 정형화 돼버린 높이뛰기 기술의 근본을 완전히 뒤집어놨다.

동일한 신체조건서 배면뛰기는 안정된 자세로 더 높이 도약할 수 있으며 공중서 무게중심을 너 낮게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인체역학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높이뛰기 종목의 보조 환경 변화도 그의 기술적인 혁신을 도와줬다.

원래 높이뛰기 종목에선 바를 뛰어 넘은 선수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착지하는 부근에 모래나 톱밥 등의 완충제 역할을 하는 물질들을 뿌려 놓는다. 그러나 이 같은 충격 완충제들은 2미터 정도의 높이서 발이나 혹은 손과 발로 동시에 착지하는 선수들만을 보호할 수 있을 뿐이고, 포스베리처럼 배면뛰기 후 머리와 상체부분으로 착지하는 선수들의 부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 무렵에 고무재질에 공기를 불어넣어 만든 ‘고무매트’가 선수들의 안전장치로 출현한 것이다. 이 매트의 출현으로 인해 높이뛰기 점프 후 선수들은 신체의 어느 부분으로 떨어져도 부상을 방지할 수 있는 부상방지용 완충제를 접할 수 있게 되고, 포스베리는 이러한 환경변화에 맞춰 과감한 혁신을 시도하게 된다.

1968년 올림픽의 높이뛰기 경기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포스베리는 메달권과는 거리가 먼 선수로 여겨졌다. 당시 포스베리는 트랙 앤 필드 뉴스가 “올림픽 타이틀을 놓고 펼쳐지는 가장 치열한 경쟁”이라고 묘사했던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의 높이뛰기 무대에 참가한 무명 선수에 불과했을 뿐이다.


포스베리는 그런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해나갔고, 모든 점프를 1차 시기서 성공시켜버린다. 바가 2.18m 높이까지 올라갔을 때, 경쟁서 살아남은 선수들은 포스베리를 포함해 단 5명뿐이었다. 이어 2.18m도 첫 번째 시도서 넘어버린다.
 

▲ ▲1968년 멕시코올림픽서 최초로 배면뛰기를 선보이는 딕 포스베리

포스베리와 미국의 에드 카루더스, 소련의 발렌틴 가브릴로프 등 3명이 남게 된 2.20m. 세 사람 모두 첫 번째 시도에서 넘었다. 이 시점서 포스베리의 메달 획득은 이미 확정됐다. 하지만 메달의 색이 남아 있었다.

2.22m서 3번의 시도를 모두 실패한 가브릴로프가 먼저 탈락하며 동메달이 정해졌다. 그리고 포스베리는 다시 한 번 첫 번째 시도서 2.22m를 넘는다. 남은 것은 카루더스와 포스베리 두 사람. 바의 높이는 올림픽 기록인 2.24m까지 올라갔다.

첫 시도서 포스베리는 등을 완전히 젖힌 뒤에 다리를 차올리며 바를 넘었고, 그것으로 올림픽 신기록과 함께 올림픽 금메달을 확정했다. 새로운 역사의 탄생이자 높이뛰기 종목의 완전한 변화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스포츠서 포스베리가 멕시코시티올림픽서 보여줬던 정도의 영향을 미친 선수는 거의 없었다. 비록 포스베리 본인은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지만, 1972 뮌헨올림픽에선 높이뛰기 종목 출전 선수 40명 중 28명이 ‘포스베리 플롭’으로 바를 넘었다. 그 후로 1988 서울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스트래들 기술은 올림픽 무대서 완전히 사라졌다.

68년 멕시코 올림픽 처음 소개
종목 전체 바꾼 혁신으로 평가

멕시코서 올림픽 금메달을 뒤로 하고 포스베리는 육상계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자신의 흔적을 남겨놨고, 1993년에는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포스베리는 높이뛰기 종목에 혁신을 가져온 포스베리 플롭 기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배면뛰기 동작은 가장 자연스러운 동작이라고 본다. 나는 그걸 제일 먼저 찾아냈을 뿐이다.”

높이뛰기의 역사는 포스베리의 배면뛰기가 출현한 1968년 이전과 그 이후로 양분된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이 관성에 젖어 기존의 기술만을 답습하고 있을 때, 포스베리는 높이뛰기에 관해 그동안 그가 배우고 습득했던 모든 지식과 기술을 버리고 홀로 독자적인 기술을 고안해 습득했다. 

멕시코올림픽서 그가 처음 배면뛰기를 선보였을 때, 그는 수많은 혁신가들이 새로운 것을 보여줬을 때면 늘 그랬듯이, 그 또한 세상으로부터 무수한 비난과 조롱을 받아야만 했다. “물고기가 배 위에서 팔딱 뛰는 것 같다”는 놀림이었다.

시초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베리의 배면뛰기는 높이뛰기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이제 1년 앞으로 다가온 도쿄 2020에서도 높이뛰기 종목의 모든 선수들은 당연히 포스베리의 이름이 붙은 그 기술로 영광에 도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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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특검 ‘북풍 공작’ 수사 시나리오

내란 특검 ‘북풍 공작’ 수사 시나리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내란 특검이 가장 수사 속도를 높이고 있는 건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외환 혐의’다. 윤 전 대통령의 지시로 군 수뇌부가 북한과의 전쟁을 유도하려 했는지를 밝혀내는 게 핵심이다. 일부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 특검은 군이 평양에 무인기를 보낸 게 윤 전 대통령의 지시였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용대 드론작전사령관에게 ‘V(윤석열 전 대통령) 지시’라고 들었다.” 조은석 내란 특검팀이 확보한 군 장교 녹취록의 일부 내용이다. 조 특검팀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지시로 군 수뇌부가 북한과의 전쟁을 유도하려 했다고 보고 있다. 조 특검팀은 이 녹취록 외에도 외환 혐의 입증이 가능한 다수의 물적 증거를 확보한 상황이다. 잃어버린 무인기 조 특검팀은 지난해 10월과 12월 소형 정찰 드론 2대가 사라졌다는 국방부 감사관실 조사 보고서를 확보했다. 조 특검팀이 확보한 국방부 감사관실 보고서는 지난달 말 작성됐다. 드론작전사령부가 지난해 10월15일과 12월19일 각각 백령도와 속초 대대에서 소형 정찰 드론 기체 2대를 잃어버려 찾지 못했다며 그 사유를 ‘원인 미상’이라고 기록한 게 핵심이다. 드론 소실 시점은 같은 해 10월 북한 외무성이 한국 무인기가 삐라(대북 전단)를 살포했다고 발표한 시기(10월 3·9·10일)와 11월 초 북한 함경남도 차호 잠수함 기지로 드론을 보냈다는 군 내부 제보 시점과 비슷하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부승찬 의원실은 “차호 잠수함 기지까지 (드론을) 간신히 보낼 수 있었다”며 “매뉴얼 제원상 (최대 항속거리가) 500㎞지만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군 현역 장교 증언을 확보했다. 보고서에서 국방부 산하 국립과학연구소가 드론사에 무상 증여한 소형 정찰 드론 중 고장나거나 소실된 것은 총 8대다. 이 중 2대는 2023년 10월 ‘원인 미상 엔진 정지’ ‘공기 속도 센서 결함’ 등으로 고장 사유가 기록돼있다. 지난해 1월과 6월, 10월 무인기 파손 역시 구체적인 사유가 적혀있다. 11월7일 난기류와 강풍 때문에 추락한 드론은 속초·양양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10월15일, 12월19일 잃어버린 드론은 회수하지 못했고 사유 역시 ‘원인 미상’ 처리됐다. 군수품관리법에 따라 무인기가 소실되면 그 이유 등을 정확히 기록해 국방부에 신고해야 한다. 특검팀은 드론 2기 소실 경위와 사후 조사가 부실한 이유 등을 확인할 계획이다. 앞서 국방부 감사관실은 평양·연천 등에서 발견된 드론과 동일 기종을 지난 1월22일 전수조사했다. 백령도는 북한이 지난해 10월19일 평양에서 ‘추락한 드론’의 동체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륙 지점이라고 발표한 곳이다. 윤 “평양에 무인기 보내라” 지시 의혹 특검 “V가 북 반응 좋아해” 녹취 확보 국방부는 드론사 예하 김포·백령도·연천·속초 가운데 백령도 대대는 방문 조사를 하지 않고 유선 조사만 했다고 한다. 장부에 기록된 내용과 재고 상황이 정확한지 현장에서 실물을 확인한 다른 부대와 달리 백령도는 보고받은 사진을 바탕으로 조사했다. 특검팀은 드론사 관계자를 소환해 ‘북풍 몰이’ 목적으로 평양 등에 드론을 보냈는지 여부와 소실 배경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경위 등을 조사하기로 했다. 특검팀은 앞서 ‘평양 드론 침투’ 의혹과 관련 “김용대 사령관이 V(윤 전 대통령) 지시다. 국방부와 합참 모르게 해야 된다(고 했다)” “삐라(전단) 살포도 해야 하고, 불안감 조성을 위해 일부러 (드론을) 노출할 필요가 있었다”는 내용의 현역 장교 녹취록을 확보했다. 녹취록엔 당시 북한의 위협적 반응에 “VIP와 장관이 박수치며 좋아했다. 너무 좋아해서 사령관이 ‘또 하라’고 그랬다” “11월에도 무인기를 추가로 보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녹취록에는 “(무인기를) 의도적으로 (북한에) 노출할 생각이 있었지만 떨어뜨릴 생각은 없었다”면서도 “(무인기가 개조되면서) 기체 불안정성 때문에 추락에 대한 가능성은 항상 품고 있었다”는 내용도 담겼다. 또 “비행 자체에 대한 부담은 크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체 성능 자체가 안 되어서 손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도 했다. 군 측은 지금까지 평양 드론 침투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또 군은 작전에 사용된 드론 추락을 염려하기도 했다. 본래 설계와 다르게 자체 개조됐기 때문이라는 게 부 의원실의 판단이다. 외환 혐의 규명 필요 부 의원실이 지난 5월 국방과학연구소로부터 제출받은 ‘북 전단 무인기 비교 분석’ 자료는, 북한에 떨어진 무인기와 연구소가 드론작전사령부에 납품한 무인기와 유사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충격 방지를 위한 ‘랜딩폼’ 부품이 빠지고 전단 살포를 위한 전단통이 개조돼 붙어있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애초 전단 살포 목적으로 설계되지 않은 무인기 구조를 변경하면서 기체가 불안정해져, 전단 살포 시 추락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무인기는 소음이 너무 커서 군사작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외환 혐의는 지금까지 검경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조사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특검팀은 지난 1일 국방과학연구소 항공기술연구원 정모씨를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한 만큼 드론사 간부들이 줄소환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검팀은 드론 평양 침투 외에도 외환 행위 고소·고발 사건과 북한의 공격을 유도해 전쟁 또는 무력충돌을 야기하려고 했다는 혐의에 대해 수사할 수 있다. 결국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을 통해 꼬리가 잡힌 ‘북풍 공작’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경찰이 노 전 사령관의 주거지에서 압수한 수첩에는 비상계엄 당시 ‘수거(체포)’해야 할 명단이 적혔고 “NLL·북방한계선 인근에서 북의 공격을 유도하거나 아예 북에서 나포 직전 격침 시키는 방안” 등이 담겼다. 또 수첩에는 북한과의 접촉 방법도 “비공식 방법, 무엇을 내어줄 것인가, 접촉 시 보안 대책은?”이라고 구체적으로 적혔다. 북한이 날려 보낸 ‘오물 풍선 원점 타격’으로 전쟁 상황을 연출해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은 지난 1월 국회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나와 “지난해 10월 정도로 기억하는데 김용현 전 장관이 ‘북한 오물 풍선 상황이 발생하면 원점을 강력하게 타격하겠다. 합동참모본부 지통실(지휘통제실)에 직접 내려가서 지휘하겠다’고 말했다”고 밝힌 바 있다. 급박한 계획 변경 비상계엄 선포 뒤 노 전 사령관이 지휘하는 수사2단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직원 조사 임무를 맡기로 했던 김봉규 정보사 대령도 지난해 11월2일 경기 안산시의 한 카페에서 노씨가 “비상계엄 관련해서 북한 오물 풍선 얘기를 시작”했고 “언론에 특별한 보도가 날 거라고 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1월 말, 당시 해외 출장 중이던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에게 북한의 오물 풍선 도발 하루 전날을 콕 집어 조기 귀국을 종용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두 인물의 검찰 수사 기록을 보면 계엄 9일 전이던 지난해 11월24일 일요일, 문 전 사령관은 노 전 사령관과 전화 통화를 했다. 이때 문 전 사령관은 노 전 사령관에게 자신이 곧 해외 출장을 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문 전 사령관은 같은 해 11월25일부터 29일까지 대만 출장이 예정돼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노 전 사령관이 흥분하면서 화를 냈다. 그는 문 전 사령관에게 “이 중요한 시기에 무슨 해외 출장을 가느냐”며 “출장을 당장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문 전 사령관은 황당해하며 “이미 약속된 일”이라고 맞섰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은 “늦어도 수요일 밤까지는 귀국하라”고 말했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수요일 밤’은 11월27일이다. 하루 뒤인 28일은 북한이 33번째 오물 풍선을 부양한 날이었다. 문 전 사령관은 노 전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실제 귀국 비행기표를 11월27일 수요일로 변경했다. 하지만 기상 악화 등의 변수가 생기며 이날 귀국하지 못했다. 노 전 사령관은 계엄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북한 오물 풍선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지난해 10월과 11월 무렵, 정보사 대령들에게 ‘오물 풍선 원점 타격’ 필요성을 언급한 사실도 확인된다. 김 대령은 검찰 조사에서 “노상원 전 사령관도 오물 풍선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며 “북한이 오물 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방첩사, 비상계엄 당일까지 위기감 고조 합참, 북 원점 타격·대응 김 지시 거부 지난해 11월 초, 노 전 사령관은 김 대령과 문 전 사령관을 안산 상록수역으로 불러 앞서 지시한 인원 선발이 다 됐는지를 확인했다. 그는 이때도 “북한이 오물 풍선을 날리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하고 지원 세력을 타격할 수 있어서 너희가 임무 수행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 전 사령관의 이 같은 계획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도 공유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장관은 북한의 32번째 오물 풍선 부양이 있기 하루 전인 지난해 11월17일 지상작전사령부에 “오물 풍선이 군사분계선을 넘을 시 경고 사격을 하고, 북한이 화기 도발을 하면 지체 없이 원점을 타격하도록 대응 계획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공수처는 박모 방첩사 대령의 진술로 이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 이재학 방첩사 대령의 검찰 진술에도 “상황이 위중하니 부대에 위치해 있으라”는 얘기를 사령부로부터 들었다. 그는 “그전까지 북한 오물 풍선이 30여회 정도 떴는데, 그날따라 이상했다. 오물 풍선이 국지전으로 확대될 수 있어서 사령관이 상황을 위중하게 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은 지난달 군사 재판에서 북한 오물 풍선 대응과 연결된 ‘국지전 시나리오’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지난달 13일 법원에 출석해 “그때 상황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12월 1~2일쯤 사령관 되는 군인들이 가장 걱정한 건 북한 쓰레기 풍선이었다”며 “방첩사령관으로서 쓰레기 풍선에서 삐라가 떨어지는데 그걸 수거해 분석하는 게 방첩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군들은 북한 오물 풍선 때문에 뭔 일 터지는 거 아니냐 이런 걱정이 태반이었고, 걱정스러워서 (장군들과) 통화를 했다”고도 증언했다. 그러나 당시 합참은 김 전 장관이 내린 경고 사격 지시에 소극적인 입장이었고, 오히려 다른 방식을 김 전 장관에게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합참 내부의 이 같은 기류는 합참에 파견된 박 대령을 통해 여 전 사령관에게 보고됐다. 국지전 도발했다 반면 여 전 사령관은 북한 오물 풍선 대응 지침을 전파하는 방식으로 방첩사 내부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던 것으로 전해졌다. 12·3 내란 사태 당일에는 “적 오물 풍선 도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시기”라며 주요 간부들에게 준비 태세 확립을 강조하기도 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