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한말 을사5적의 한 사람인 이완용에 대해 살펴보자. 이완용은 고종을 협박해 을사늑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했고, 헤이그 특사사건 후 고종을 폐위시키는 데 앞장서 순종을 즉위시키며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그런 이유로 역사는 이완용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완용이 태어나면서부터 친일파, 또는 매국의 피를 지니고 있었을까. 천만에다. 이완용도 한때는 성균관을 개편하고 소학교를 열어 근대적인 교육정책을 펴는 등 나름 대한제국의 충신이었다.
또 그는 애초에 친일이 아닌 친러(러시아)파로서 아관파천까지 주도했던 인물이다. 아관파천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일본군의 잔인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 거처한 사건을 의미한다.
이완용은 이를 주도할 정도로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각종 이권 요구가 거세지고, 1904년 발생한 러일전쟁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로 변신하면서 매국에 앞장선다.
이완용도 생전에 나름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이완용의 긍정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의 결정적 패륜 행위인 매국에 대해서만 평가할 뿐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서 행한 발언에 대해 살펴보자.
문 대통령은 “광복군에는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며 “통합된 광복군은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고,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발언했다.
도대체 문 대통령, 아니 그를 보좌하는 인간들의 머리는 어떤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다. 김원봉에 대해서다. 김원봉은 문 대통령의 말대로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무장 투쟁의 중심에 있던 독립운동가였다.
이 대목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이후 김원봉의 행적에는 문제가 많다.
그는 광복 후 1948년 남북협상 때 김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고는 그곳에 자진 잔류해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그리고 그해 9월에 국가검열상에 임명된다. 국가검열상은 대한민국 검찰에 해당되는 부서로 감찰업무도 관장한다. 이 사안만 놓고 본다면 그저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1948년 9월9일 실시된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서 발표한 김일성 내각을 살피면 ‘국가검열상(국방상) 김원봉’이라 기록하고 있다. 김원봉이 받은 직책인 국가검열상은 감찰 업무는 물론 국방에 관한 업무 역시 관장하는 직책, 즉 국방부장관을 겸직한다는 의미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김원봉은 후일 ‘조국해방전쟁(6·25)’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이런 경우 우리는 아니, 역사는 김원봉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문 대통령의 의중대로 독립운동가로서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고 한미동맹의 토대를 다진 인물, 아니면 김일성과 함께 6·25동란의 주범으로 기록해야 할까.
현충일에 내뱉은 그의 발언을 살피면 문 대통령에게는 6·25는 없고 오로지 항일투쟁만 존재하는 형국이다. 그런 이유로 문재인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인민군 지도자’라는 호칭이 더 적합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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