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고 이희호 여사의 97년을 돌아보다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6.17 10:04:59
  • 호수 12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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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지 ‘인동초’ 곁으로 떠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 여사의 인생은 ‘정치인 김대중의 부인’이나 ‘퍼스트레이디’라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민주화운동 등을 거쳐 평화적 정권교체까지. 이 여사는 격변의 한국 현대사를 오롯이 온몸으로 이겨낸 여성운동가였다. 
 

▲ 고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평화센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평생을 보낸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오후 11시37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연세대세브란스병원서 별세했다. 향년 97세.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지난 14일 이 여사의 장례예배는 평생토록 다닌 신촌 창천교회서 치러졌다. 이 여사는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소에 합장됐다. 

여야·각계 망라
추모·애도 물결

이 여사는 올해 들어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감기 등으로 수차례 입원했다 퇴원하기를 반복했다. 지난 4월엔 ‘위중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같은 달 20일에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이 별세했을 때도 주변에선 이 여사에게 아들의 임종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이 여사의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은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는 “이희호 여사님은 모든 가족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다가 지난 10일 밤 11시37분께 편안하게 소천하셨다”고 밝혔다. 김 상임이사는 “이 여사님이 입 모양으로 찬송가를 따라 부르셔서 가족들이 깜짝 놀라고 좋아했다”며 이 여사의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가족들은 평소 이 여사가 좋아하던 찬송가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을 부른 것으로 전해졌다.


김 상임이사는 고인이 남긴 유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유언을 통해 “국민들이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자신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적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도 덧붙였다.

이 여사는 생전 거주하던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써달라고 유언했다. 김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상금도 고인의 유지에 따라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이 여사는 유언 집행에 대한 책임을 김 상임이사에게 맡기며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김대중평화센터 사업을 잘 이어가달라”고 당부했다. 이 여사와 가족들은 지난해부터 유언장 작성을 준비해왔다.

이 여사의 타계 소식에 사회 각계층의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SNS에 “우리는 오늘 여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 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다”며 “여사님은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 하실 정도로 늘 시민 편이셨고,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라는 글을 남겼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여야5당은 이 여사의 타계 소식에 애도의 뜻을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의 거목이었던 여성지도자 이희호 여사의 삶을 깊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추모한다’고 논평했다.

홍 대변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비판자로서, 독재세력과 싸우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로서, 매섭고 엄혹한 격정의 세월을 함께 헤쳐오셨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삶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현대사였다”고 했다. 이어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도,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도, 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한 두 분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고 했다.


격변의 현대사 온몸으로 이겨낸 여성운동가
퍼스트레이디이자 민주주의·인권운동의 거목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도 서면 논평을 통해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가족법 개정 운동, 혼인신고 의무화 등 사회운동에 헌신했다”며 “고인께서 민주주의, 여성, 그리고 장애인 인권운동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열정과 숭고한 뜻을 기리며,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은 서면 논평서 “꼭 쾌차하시어 따뜻한 햇살이 간지럽도록 다시 함박웃음 주시리라 간절히 믿었건만, 여사님께서는 그리운 김대중 대통령님을 만나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실 기대가 더 크셨던가 보다”라며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민주의 열망을 온 하늘에 퍼뜨리던 그날을 어이 맞추신 듯, 6월 민주항쟁의 32주기 뜻깊은 날에 소천하셨다. 깊은 애도와 함께 고인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고 전했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보도자료를 통해 “정의당은 고인의 위대한 삶을 계승하는 데 노력하겠다”며 “특히 고인의 필생의 신념이었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6.15공동선언을 계승 실천하고, 한반도 평화 번영을 위한 평화 협치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했다. 
 

▲ ⓒ김대중평화센터

민주평화당 박주현 수석대변인도 전날 논평서 “우리 모두는 여사님이 걸었던 여성, 민주주의, 인권, 사랑의 길을 따라 전진하겠다. 이희호라는 이름은 항상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 동교동계 인사들과 전두환씨 부인 이순자씨 등이 빈소를 찾았다. 지난 12일 이 부회장은 10시50분경 이 여사의 빈소를 찾아 5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르다 나갔다. 

앞서 한 시간 전에는 김 전 대통령과 ‘악연’이었던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도 빈소를 찾았다. 이씨는 이 여사의 아들 김홍업씨에게 짧은 인사말을 건네고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고려대 특임교수)도 빈소에 나타났다. 김 이사는 “이 여사님한테 매 신년 1월1일이 되면 인사를 드리러갔다”며 “반갑게 대해줬고 몇 년 동안 동교동을 찾아뵙고 인사드렸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는 고인을 추모하며 “이 여사님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대모셨다”며 “한중관계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해주신 점에 대해서 깊이 평가하고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밖에 김명수 대법원장, 고건 전 총리, 정동영·장병완·유성엽 의원 등 민주평화당 인사, 방송인 김제동씨 등이 고인을 기렸다.

전두환 부인
이순자 조문

이 여사는 남편 김 전 대통령과 더불어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험난한 여정을 걸었다. 일제 치하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결혼 전에는 독신을 고집하며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정치인 아내의 길에 들어선 후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험로를 걸었지만, 대통령의 영부인이라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내조자를 넘어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곁을 지켜 정치적 동지라는 평을 받았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동교동 178-1번지 자택에 걸려 있던 ‘김대중 이희호’ 문패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이 여사도 파란만장한 삶을 접고 ‘인동초’ 김대중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 여사는 3·1운동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22년 서울 수송동서 6남2녀의 넷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이용기씨가 ‘국내 의사면허 4호’였을 정도로 가정환경은 유복했다. 이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이순이씨의 영향으로 모태신앙을 가졌다.

이 여사는 이화여고·이화여전을 다녔지만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이화여전을 졸업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해 1950년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활달한 성격의 이 여사는 대학 재학 중 서울대 총학생회서 사범대 대표를 맡는 등 당시 강요되던 ‘얌전한 여학생’ 딱지를 거부했다. 발랄하고 활동적인 리더 타입으로 남학우·여학우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시절 이 여사의 별명은 중성을 뜻하는 독일어 ‘다스’(das)였다.

남녀공학서 뿌리 깊은 가부장제를 처음 마주한 그는 곧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에 몰두한다. 그리고 여학생의 동등한 권리와 처우를 주장하는 데 앞장섰다.

대학 졸업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서도 이 여사는 여성운동가들과 어울리며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피란지 부산서 이태영,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대한여자청년단을 조직했다. 2년 뒤에는 여성의 인권과 법적 권리를 도모한 ‘여성문제연구원’ 발족의 실무를 도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여사가 처음 선거운동을 경험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54년 5월 3대 민의원 선거서 박순천 캠프를 도운 그는 지프차를 타고 거리를 누리며 외쳤다. “여성은 여성 대표를 찍읍시다!”
 

김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도 이 무렵이었다. 이 여사가 활동하던 대한여자청년단은 1·4후퇴 당시 피난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에 있는 해운회사 사장이었던 김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긴 김 전 대통령과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이 만나는 자리서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도 이뤄졌다. 

이 여사는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간헐적으로 김 전 대통령과 교우했지만 곧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램버스대서 사회학 학사 학위, 스카릿대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8년 귀국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서른일곱의 엘리트 신여성이었던 이 여사는 여성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당시 여성계를 선도하던 엘리트 집단인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의 총무를 맡아 축첩 반대, 혼인신고 하기 등 각종 여권신장운동을 벌였고,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운명적인 만남
끝까지 바라지

여성운동에 매진하던 이 여사는 1962년 만 40세의 나이로 김 전 대통령과 운명적 결혼을 하면서 ‘정치인 아내’의 길로 들어섰다. 김 전 대통령은 1945년 차용애씨와 결혼해 홍일, 홍업씨를 얻었지만 차씨는 1959년 세상을 떠났다. 

주변에서는 ‘정치 낭인’에 불과한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 아들과 노모, 아픈 여동생을 거느린 정치 재수생이었다. 운도 매번 그를 비켜가 1954년 민의원 선거서 낙마했고 58, 59, 60년 선거서도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1961년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 당선돼 4전5기에 성공했지만 사흘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 여사의 주변에서는 그런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말리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여사는 연인의 비범함을 알아봤다. 그를 도와 남녀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고 이 여사는 자서전서 밝혔다.

1962년 결혼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는 등 이 여사는 ‘민주화 운동가의 아내’로서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을 눈엣가시로 여긴 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은 끊임없이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도쿄 시내 호텔에 머무르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해 대한해협에 수장시키려고 했다. 기적적인 생환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은 재야활동을 계속했고,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이 반복됐다. 

“하늘나라 가서 
평화통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혐의는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한 내란음모죄. 거짓 모함이었지만 이 일로 아들들까지 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겪어야 했다. 이 여사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 온 힘을 다해 남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 여사는 가계를 홀로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의 심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옥바라지에도 지극정성이었다. 이 여사는 옥중의 김 전 대통령에게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돕는가 하면, 청와대 안가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하기도 했다. 

남편의 수감 시절 면회시간이 한 달에 20분밖에 되지 않자 이 여사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 시절 가족이 보낸 900여통의 편지와 김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은 각각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미국 망명시절과 이후 54차례 이어진 가택연금 때도 이 여사는 남편의 가장 든든한 동지이자 참모로 묵묵히 곁을 지켰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이후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섰지만 1987, 1992년 대선에서 줄줄이 낙선했다. 당시 이 여사는 남편의 정치활동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지만 여성 문제에 한해서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 전 대통령은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정책을 국회에 제시했다.

상속과 이혼문제에서 남녀차별 요소를 삭제한 가족법 개정안이 89년 통과된 데에도 이 여사의 공로가 숨어 있었다. 

1992년 대선 이후 은퇴를 선언한 김 전 대통령은 3년 뒤 지방선거 지원 유세를 계기로 정계에 복귀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5월 당내 경선서 대선 후보로 선출되며, 대통령이 될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이 여사는 여느 선거 때처럼 남편의 유세를 적극 지원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특히 여성단체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지지를 호소했다. 과거 분열로 낙선의 쓴맛을 봤던 김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서 자민련의 김종필, 박태준씨와 손을 잡아 3전4기의 신화를 완성했다. 헌정 사상 처음 평화로운 정권교체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청와대 안주인이 된 이 여사는 아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두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김대중정부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되자 ‘국민의 정부 여성 정책 뒤에는 이희호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여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남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이 여사도 2000년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이희호는 
이희호다

이 여사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47년 동안 함께했던 ‘동지’와 작별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동교동계의 구심점이자 재야인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2011년 말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조문단 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 <동행>서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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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 충돌’ 검찰개혁 엇박자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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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추석 연휴 전에 검찰개혁을 진행하려던 더불어민주당이 신중한 입장에 들어갔다. 검찰개혁 초안을 발표하려던 당의 의견에, 주체이자 객체인 법무부의 수장 정성호 장관이 다른 의견을 내면서다. 정 장관의 의견에 대해 여권 관계자들은 공개적으로 비판까지 했다. 당정 간 불협화음으로 검찰개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왔다. 당 지도부와 정부는 뒷수습에 나섰지만, 완전히 진화될지 관심이 모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계속 강조해 온 ‘검찰개혁’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공언대로 ‘추석 전 검찰개혁 입법 마무리’를 목표로 속도전에 돌입한 가운데 친명(친 이재명)계 좌장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민주당 지도부와 결이 다른 의견을 연일 내놓으며 당정 간 불협화음이 나타났다. 속도전 앞두고… 민주당 국민주권 검찰 정상화 특별위원회는 지난달 26일, 회의를 열고 검찰개혁의 대원칙인 수사권·기소권 분리 내용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확정할 방침이었다. 민주당은 이번 개정안으로 수사권·기소권의 분리 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검찰청을 폐지한다. 그리고 기존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이관하기 위해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을 설치할 예정이다. 공소청은 기존 검찰의 기소권을 이관받아 기소와 공소 유지, 영장 발부 등 검찰의 고유 업무를 도맡는다. 중수청의 경우, 검찰의 수사 대상이었던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의 수사를 담당한다. 이 외에도 국수위 설치 여부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국수위는 국무총리 산하 기관으로 경찰을 비롯해 중수청,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 국가 수사 기관 전체를 통솔하는 시스템이다. 이번 검찰 조직 재편으로 수사 기능을 갖게 될 중수청을 행정안전부와 법무부 중 어느 소속으로 할지 등의 쟁점 현안들도 정리돼 개정안에 담길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검찰을 제외한 수사기관은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있다. 이들은 각각 행안부와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소속돼있다. 이 같은 초안에 대해 당 안팎에선 우려를 제기했다. 특히 국수위의 권한이 자칫 과도해지면, 정부의 수사 통제와 외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또 앞서 밝힌 것처럼 행안부 산하에 이미 경찰이라는 수사기관이 있는 상황에서 중수청까지 포함될 경우, 행안부의 수사 기능이 자칫 과도하게 커지는 것도 우려되는 지점이다. 공소청의 보완수사권에 대한 당과 정부의 이견도 걸림돌이다. 당은 수사와 기소 분리 대원칙 측면에서 공소청에 보완수사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법무부는 경찰이 수사종결권을 가진 상황에서 원활한 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공소청에 보완수사권 부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6일 초안 발표 예정이었지만 구체안 두고 특위·법무부 입장 차 지난달 25일 민주당 검찰정상화특위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비공개 회의를 열었지만 최종안을 내지 않았다. 민형배 특위위원장은 지난 7일 비공개 당정대 협의 후 기자들과 만나 “속도 조절론은 없다”며 이날 회의를 최종안 확정을 위한 데드라인으로 예고했지만, 180도 달라졌다. 대신 이날 회의는 법안의 완결성에 집중했다고 한다. 특위 간사인 이용우 의원은 "초안이 사실상 나왔다고 보면 된다"면서도 "그야말로 특위안이고, 당정대 간의 논의 과정이라든지 국민적 공론화를 해 나가는 과정이라든지 이 과정이 여전히 많이 남아서 최종적으로 가다듬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속도조절 배경에는 개혁의 주체이자 객체인 법무부의 입장이 있던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5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주당 송기헌 의원은 정 장관에게 ‘검찰개혁의 핵심이 수사와 기소의 분리냐’고 물었다. 이에 정 장관은 “그렇다”면서 “검찰이 수사를 개시하거나 인지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은 분리해낸다는 게 1차적인 목표”라고 답했다. 다만 정 장관은 “현재는 (검찰이) 보완수사 요구 또는 재수사를 할 수 있는데, (사건이) 핑퐁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과거보다 사건 처리 기간이 2배 이상 늘었다”며 “이런 문제가 심화할 가능성이 있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사건) 전건 송치를 할 것인지, 전건 송치를 하지 않는다면 수사지휘권을 줄 것인지, 송치된 사건에 대한 보완 수사 범위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부연했다. 정 장관은 민주당이 중수청을 행안부 산하에 두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경찰·국가수사본부·공수처·중대범죄수사청 4개 수사기관이 모두 행안부 밑에 들어가면 권한이 집중된다”고 우려했다. 또 기존 검찰청을 공소청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도 “검찰은 헌법상 검찰총장 임명 관련 규정들과 검사 관련 규정들도 있기 때문에 위헌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정 장관의 다른 의견 국수위에 대해서는 “지금 나와 있는 안에 의하면 국수위가 경찰의 불송치 사건에 대한 이행을 담당하게 돼있는데 최근 통계에 4만건 이상 된다”며 “독립된 행정위원회가 4만건 이상 사건을 다룬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26일 예결위 전체회의에서도 국민의힘 정점식 의원이 ‘검찰 조직을 폐지하는 것이 적절하냐’고 묻자 정 장관은 “검찰을 해체한다고 표현하지만 저는 검찰이 수행해오던 기능을 재분배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에 대해 “민주당의 당론은 아직 아니”라며 “1차 수사기관, 특히 경찰의 부실·봐주기 수사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의원이 ‘검찰청 폐지로 검찰의 전문 수사 역량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는 취지로 질문하자 정 장관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주가조작 등 자본시장을 교란하는 금융 범죄 또는 조세 사건은 굉장히 난이도가 높아 고도의 수사 기법이 필요하고 법리적 쟁점들이 많다”며 “이런 전문 수사 역량을 중수청에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정 장관은 회의 당일 페이스북을 통해 “검찰의 수사개시권과 인지수사권은 완전히 배제돼야 한다”면서도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검찰개혁의 본질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견설 진상은? 그러면서 “수사기관과 공소기관 사이의 ‘핑퐁’ 등 책임 떠넘기기, 수사 지연, 부실 수사로 인해 국민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현실적이고 촘촘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며 “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성공한다”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정 장관의 발언 이후 당 안팎에서는 정 장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민주당 검찰개혁 특위 위원장인 민형배 의원은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검찰 보완수사권 전면 폐지를 재논의해야 한다는 정 장관의 입장에 관한 질문에 “당 지도부는 장관께서 좀 너무 나가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민 의원은 “특위안에는 그런 내용이 없고, 당정에서 합의됐거나 의논해서 한 건 아니”라며 “법무부 장관이 개인적 의견을 말씀한 것 같다”고 언급했다. 정 장관이 행안부 산하 중수청 설치 방안에 우려를 밝힌 데 대해서도 “당에서 입장을 내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장관 본분에 충실한 건가, 이런 우려가 좀 있다”면서 “(장관이) 저희 특위 초안을 모르는 상태 같다”고 지적했다. 당 지도부의 의견을 내세워 정 장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다. 이른바 ‘검찰개혁 4법’을 발의하고 관련 논의를 주도해 온 김용민 의원 역시 이날 페이스북에서 “바꾼다고 모든 것이 개혁은 아니다”라며 “개혁을 왜 하려고 하는지 출발점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지도부·정부 나서 진화 “당 결정대로 따라갈 것” 민주당과 정 장관의 의견이 갈리면서 ‘당정이견’설이 분출한 가운데, 당 지도부가 진화에 나섰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28일 오후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에서 열린 국회의원 워크숍 지도부 인사말에서 “개혁의 작업은 한 치의 오차·흔들림·불협화음 없이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대적 과제”라며 “이 과정에서 당정대는 원팀 원보이스로 굳게 단결해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김병기 원내대표도 “국민주권정부의 실질적 성과는 당정대 원팀 정신이 그 중심에 있다”며 “다음 주부터 우리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첫 정기국회가 시작된다. 이재명정부 국정 기조와 국정 과제의 실천을 (당이) 더 확실하게 뒷받침해야 한다”고 당정 일치 기조를 강조했다. 정부와 대통령실에서도 수습·진화에 나섰다. 이날 워크숍 현장에 방문한 정 법무부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이견은 없다”며 “어쨌든 입법의 주도권은 정부가 아니라 당이 갖고 있다. 당에서 잘 결정되는 대로 잘 논의해서 따라갈 것”이라고 한발 물러났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도 당과 법무부 사이 이견에 대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며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 만찬에서 전체적인 로드맵을 합의했다. 정부와 당이 각자 검찰개혁안에 대한 여러 가지 각론에 대한 의견들을 제기하기도 하고 수렴하기도 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 수석은 “당과 정부의 의견만 다른 게 아니라 당 내부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 각각의 의견들이 다 도출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론화 과정에 이제 들어간 것이다. 대통령실은 이 내용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 수석은 “다만 바라건대 내용 자체의 토론에 좀 집중했으면 좋겠다”며 “특정인과 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사람에 대한 공격 같은 건 하지 말고 이렇게 내용 토론으로 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법조계 의견은? 한편 법조계에선 정 장관이 민주당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평소 소신과 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검사장 출신 한 법조인은 “정 장관은 외골수처럼 직진하기보다 남의 편을 설득하고 내 편을 혼내가면서 합의점을 찾는 정치를 해온 사람”이라면서 “강성 개혁에 집착하기보다는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변화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