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운설’ 청와대와 풍수지리 대해부

“북악산에 살기 감돈다”

[일요시사 정치팀] 김정수 기자 = 청와대와 풍수지리.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인 ‘집무실 광화문 이전’이 무산됐다. 공약 파기에 대한 비난이 불거진 가운데 때아닌 풍수지리설이 고개를 들었다. 그간 풍수지리학자들 사이에선 청와대 터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흉지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반박이 치열했다. 양 측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에 궁금증은 증폭되고 있다. 청와대 터는 정말 괜찮은 땅일까?
 

▲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9대 대선 당시 ‘광화문대통령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소통 부재가 탄핵 정국을 야기했다는 진단에 따른 것이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이전, 대국민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 책자형 선거공보를 통해 “퇴근 후 시장에 들러 넥타이를 풀고 국민들과 소주 한 잔 나누는 소탈하고 친구 같은 대통령을 꿈꿔왔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11개월 만에 
없던 일로∼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유홍준 자문위원은 지난 4일, 춘추관 브리핑서 광화문 이전 불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유 위원은 이날 “집무실을 광화문 청사로 이전할 경우 청와대 영빈관과 본관, 헬기장 등 집무실 이외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서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경호·의전이라는 게 엄청 복잡하고 어렵다는 사실을 문 대통령도 인지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2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광화문시대위원회는 그렇게 11개월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야당의 비판은 거셌다. 야 4당은 이구동성으로 문 대통령의 공약 파기를 문제 삼았다.


자유한국당 이양수 원내대변인은 “집무실 이전 공약의 취지는 국민과의 상시적 소통이었지만 문 대통령은 취임 후 국민의 목소리조차 듣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바른미래당 김정화 대변인은 광화문 이전 공약을 “현실성 없는 거짓 공약”이라며 “국민을 우롱한 문재인정부는 국민께 사죄해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범진보 진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평화당 김정현 대변인은 “공약을 못 지키게 됐으면 대통령이 우선 국민들께 경위를 직접 설명하고 사과하는 게 옳다”며 촉구했고,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지난 5일 “국민은 면밀한 검토 없이 제시된 ‘공약(空約)’에 속이 쓰리다”고 비판했다.

여당은 강하게 항변했다. 더불어민주당 조승현 상근대변인은 “모든 이슈에 대해 정치공세로 일관하는 야당서 나라를 걱정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야 공방이 가열되는 가운데 청와대 터를 둘러싼 풍수지리설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광화문시대 무산되니 풍수 불쑥
민심 흉흉하니 흉지론까지 부상

논란에 단초가 된 것은 광화문시대위원회 유 위원의 발언이었다. 유 위원은 광화문 이전 공약 철회를 설명하던 중 “현재 대통령 관저가 갖고 있는 사용상의 불편한 점이 있다. 나아가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생각한다면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풍수상 불길한 점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유 위원은 웃으며 “수많은 근거가 있다”고 답했다.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이름을 떨친 유 위원은 풍수에 대해서도 나름의 식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풍수가 등장하면서 여파도 거셌다. 지천타천으로 청와대 터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 문재인 대통령

물론 쟁점은 청와대 부지의 길흉 여부다. ‘청와대 흉지설’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은 최창조 전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다. 최 전 교수는 자타공인 풍수지리 전문가로 풍수 관련 서적만 20권 넘게 집필했다. 최 전 교수는 행정수도 계획이 발표될 당시 ‘행정수도 불가론’을 내세우며 아홉 가지 이유를 들어 주목을 받았다.


최 전 교수는 저서 <한국의 풍수지리>를 통해 “청와대 터의 풍수적 상징성은 그곳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터가 아니라 죽은 영혼들의 영주처이거나 신의 거처”라며 “사람이 신적 권위를 부여받았으니 나쁠 것도 없지 않느냐고 얘기할 수도 있으나 풍수에서는 결코 인사(人事)가 천도(天道)를 넘보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코에 걸면…
귀에 걸면…

김두규 우석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최 전 교수의 불가론에 대해 반박했다. 김 교수는 지난 2017년 12월 <월간 조선> 칼럼을 통해 “최 전 교수는 조선총독들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이 신적인 권위를 지니고 살다가 뒤끝이 안 좋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여기에 풍수술사들까지 덩달아 진지한 성찰 없이 그 내용을 확대시키면서 청와대 흉지설이 굳어졌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신의 거처, 즉 큰 사찰이나 성당이 들어서려면 풍수상 2가지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터는 흙산이 아닌 돌산이어야 하고, 좌우 산들이 이를 완벽하게 감싸줘야 한다. 김 교수는 두 번째 조건을 지적하며 “내백호와 내청룡의 지맥이 낮고, 서로 교차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터를 둘러싼 길흉 논란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세종 15년의 풍수관리 최양선이 ‘경복궁 이전’을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현재 청와대는 경복궁 터의 일부다.

세종은 황희 등을 비롯한 신하들과 풍수가에게 직접 현장에 가서 확인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세종이 직접 북악산에 올라 살펴본 뒤 “경복궁은 길지”라고 결론내렸다.

현재 청와대는 풍수지리학서 이상적인 배치로 여겨지는 배산임수 지형이다. 청와대 뒤편 북악산을 시작으로 좌우엔 각각 낙산과 인왕산이, 청와대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청와대 터는 길지 중의 길지라는 해석이다.

청와대가 명당이라는 주장에는 청와대 경내서 발견된 글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청와대 관저 신축공사 도중 ‘천하제일복지’라는 글이 새겨진 바위가 발견됐다. 천하제일복지는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을 일컫는 말이다. 바위에 새겨진 글은 약 300∼400년 전 쓰인 글로 추정됐다. 

“그걸 믿어?”
이견도 팽팽

청와대서도 현재 위치를 길지로 보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따르면 현재 위치한 지역은 ‘옛날부터 풍수지리학상 길지로 알려진 곳’으로 ‘890년 전 고려시대에 남경의 이궁이 있던 곳’이다. 남경은 고려 3경(개경·서경·남경) 중 하나를 뜻하고, 이궁은 임금이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이다. 남경 이궁은 고려시대 숙종 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도 청와대 터는 명당으로 지목됐다. 

반면 청와대 흉지설도 만만치 않다. ‘칠궁’에 대한 주목이 대표적이다. 칠궁은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 7인의 묘다. 조선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도 여기에 있다. 후궁 7인은 모두 왕을 낳았지만 그들의 위패는 종묘에 모셔지지 못했다. 종묘에 모셔진 건 후궁이 아닌 왕비였다. 


현재 칠궁은 청와대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 연유로 몇몇 풍수학자들은 청와대 터에 ‘한’이 서려 있다고 주장한다. 후궁들은 왕자를 낳고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소외됐기 때문이다. 

청와대 터가 내시와 무수리의 임시 무덤으로 쓰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일부는 이곳이 무인들의 무예시험장소와 전국 유생들의 과거시험 장소였다고 말한다.

청와대가 북악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점도 흉지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북악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다. 풍수학에선 바위가 크고 많은 산을 ‘살기’가 가득한 산으로 본다. 
 

▲ 신년 기자회견 갖는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대통령의 말로가 모두 혼탁했던 것 역시 흉지론에 설득력 갖게 한다.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캠프에 참여했던 건축가 승효상씨는 지난 2017년 10월 청와대 내부 강연서 풍수지리를 신봉하지 않는다면서도 역대 대통령들의 후일이 좋지 못한 이유에 대해 "청와대가 풍수지리상 그리 좋은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 않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역대 대통령 중 그 누구도 임기를 순탄하게 끝내지 못했다. 수사와 구속은 물론이고 탄핵까지 그 결과는 암담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청와대에 들어왔다. 당시 청와대의 이름은 경무대였다. 이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지 2년 뒤 6·25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이 끝난 뒤엔 4·19혁명이 있었다.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해 5년 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음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이 선출됐다. 경무대의 이름이 청와대로 바뀌게 된 때이기도 하다. 윤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대통령 자리서 물러났다.

역대 대통령 말로 비참…정말 터 때문?
“기운 탓 아닌 사람 탓” 경계 목소리도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윤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게 됐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을 겪었고, 자신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의해 피살당한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선출됐지만, 1979년 신군부의 12·12사태로 최 전 대통령은 8개월 만에 물러나게 된다. 최 전 대통령은 역대 최단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장악했지만 다음 대통령인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수의에 고무신을 신고 나란히 법정서 재판을 받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문민정부가 탄생했지만 IMF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 아들의 비리 연루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됐다.

끝이…
가시밭길

다만 일각에선 청와대 흉지론에 대한 맹목적 신뢰와 확대 해석을 경계한다. 국내 풍수학 박사 1호인 이몽일 박사는 <영남일보> 칼럼을 통해 “새 대통령이 나오면 얼풍수들은 으레 그 사람의 조상 묘터는 말할 것도 없고, 생가터를 이 세상의 둘도 없는 대명당으로 미화한다”며 “그러다가 퇴임 시 정쟁이나 비리로 대통령의 위상이 추락되면 그것을 오롯이 ‘청와대의 터’ 탓으로 돌린다”고 비판했다. 이 박사는 “사람의 일을 탓하지 않고 땅을 탓할 때 풍수는 미신이 되고 만다”고 일갈했다.


<kjs0814@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집무실 이전 추진 왜?

청와대 집무실 이전은 오랜 기간 단골 대선 공약 중 하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광화문 정부청사로 집무실을 옮기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청와대 집무실을 쓰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 후보를 제치고 승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행정수도로 집무실을 이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경호, 의전, 예산 등을 이유로 집무실 이전은 무산됐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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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