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홍정순 기자] “5월은 노무현입니다.” 5월이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전국적 추모행렬이 정점을 찍으며 여기저기서 들리는 목소리다. 하지만 올해 추모식은 어쩐지 찬물이 끼얹어진 분위기였다.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의 ‘괴자금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검찰이 건평씨의 재산관리인으로 알려진 측근 계좌에서 뭉칫돈이 발견됐다고 의혹을 제기한 것. 하지만 불과 나흘 뒤 검찰은 스스로의 발언을 뒤집었다. 민감한 시기에 발맞춘 설익은 의혹제기에 검찰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뭉칫돈은 사업 자금일까? 검은돈일까?”
창원지검은 지난 18일 “노건평씨 자금관리인으로 추정되는 영재고철의 소유주 박영재씨의 계좌에서 수백억원의 뭉칫돈이 발견돼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건평씨가 공유수면 매립과정에 개입해 9억4000만원을 받은 혐의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 확인이 필요하다는 게 검찰의 입장이었다.
검찰의 언론플레이?
검찰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시절에는 문제의 계좌로 수백차례 돈이 입출금됐던 점과 퇴임 후에는 거의 입출금 흔적이 없던 점 등을 들어 이같이 주장했다. 즉각 보수언론들은 대서특필했고 순식간에 불붙은 ‘노건평 괴자금’ 사태에 세간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특히 검찰의 이번 발언은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과 맞물리며 급속도로 파문이 확산됐다.
건평씨는 즉각 “정치적 표적수사”라고 반발했다. 그는 “혹시나 해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박씨 사업과 관련해 청탁전화를 했거나 거래를 한 적이 없다”면서 “뭉칫돈은 나와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계좌주인으로 지목된 박씨도 뭉칫돈에 대해 “사업자금일 뿐이다”고 선을 그었다. 특히 박씨는 지난 22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검찰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박씨는 검찰의 뭉칫돈 주장에 대해 “2005년부터 동생의 계좌에서 왔다 갔다 한 돈이 500억원 가량 된다”며 “250억원이 잔고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장 많았을 때도 2~3억원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그는 “건평씨와는 중학교 선후배 사이다”면서도 “금전거래는 일절 없었다”고 전했다. 박씨는 운영하고 있는 고철사업체가 참여정부 들어 급성장했다는 의혹에 대해 “고철 값이 올라서 매출액이 늘어난 것이다”며 “거래된 돈은 건평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일축했다.
검찰 역시 불과 나흘 뒤 스스로 말을 뒤집었다. 이준명 창원지검 차장검사는 지난 2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계좌의 뭉칫돈을 건평씨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며 뭉칫돈이 머물러 있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
다시 말하면 검찰이 계좌의 돈이 건평씨와 직접 연관성이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으며, 그간 입출금된 금액 합계가 수백억원일 뿐 현재 계좌에 남아있는 금액과는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차장검사는 “현재 조사를 하면서 (뭉칫돈의 성격을) 알아가는 중이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추모행렬 정점 찍을 무렵 검찰의 폭탄발언
피의사실 공표로 형님 의혹 제기…문재인 겨냥했나?
검찰은 여전히 건평씨가 수백억원대 뭉칫돈의 거래내역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돼 있을 것이란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분위기다. 창원지검 관계자는 21일과 22일 이틀에 걸쳐 농협 진영지점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실시해 관련자료를 확보했으며, 분석작업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게다가 대검에서 계좌추적팀까지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검찰이 폭발력이 강한 사안에 대해 수사가 아닌 확인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의혹을 공개한 시점과 방식이다. 검찰이 자금조성 경위나 규모, 사용처와 관련자 조사 등 기초적인 수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건평씨와 관련이 있는 듯 서둘러 공개해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는 것. 검찰 스스로 나흘 뒤 말을 바꾼 것 자체가 부적절하고 무책임했음을 자인한 셈이다.
박용진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지난 20일 논평에서 “검찰은 ‘건평씨 300억 차명계좌 의혹’이라는 어마어마한 휘발성 발언을 해놓고서는 정작 그와 관련한 영장도 청구하지 않고, 수사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돈인지조차 특정하지 않았다. 다만 건평씨의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이번 의혹 제기를 통한 모든 정치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건평씨 측에서는 “피의사실을 언론에 공표한 검사를 고소하겠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과거 검찰은 노 전 대통령과 한명숙 전 총리, 곽노현 교육감 등 정치성을 띤 수사 때마다 피의사실 공표로 논란을 빚었다. 특히 이때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언론플레이를 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일각에선 노 전 대통령 3주기 추모식을 앞둔 시점에 검찰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공개한 것을 두고 모종의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다.
비리가 있으면 검찰이 수사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간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검찰이 또 다시 민감한 시기에 설익은 의혹을 제기한 의도 자체가 불순하고 의심스럽단 지적이다.
노무현 그림자 노렸나?
특히 연말 대선을 앞둔 최근 정국의 최대 이슈는 정부의 실정과 대통령 최측근 인사들의 비리 등 MB정권의 초대형 악재들 투성이다. 이는 참여정부와 MB정부의 비교 학습효과로 유권자들의 회고적·응징적 성격의 투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다.
게다가 5월이면 ‘노풍’이 정국을 휘감아왔다. ‘노건평 괴자금’에 대한 발언 시기를 두고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 검찰의 노림수가 빤히 읽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