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에 일이다. 토요일 점심 무렵 아내와 함께 손위 동서 집을 방문해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중에 처형이 살이 통통하게 오른 중개(태어난 지 3∼4개월가량 지나 중간 정도 크기로 자란 개) 한 마리를 건네줬다. 무슨 의도로 줬는지는 모르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고 길을 나섰다.
집으로 향하는 중에 아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개를 끌고 친구들과 자주 개를 잡아먹고는 했던 야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우리 모두는 그 개고기를 안주 삼아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이 우리 집을 방문하고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그 개의 소재를 물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 개로 한 끼 맛있게 해결했다며 고마움을 표하자 잠시 멍한 상태에 빠져있던 처형이 한마디 한다.
“애완용 강아지를 잡아먹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자 즉각 반응한다. “그 개 잡아먹으라고 준 게 아니냐”고. 그러자 처형이 개를 준 사연을 밝히고 나섰다. 그 때까지도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가 적적할까봐 줬다고 말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개라고 하면 그저 식용으로 생각했었다. 필자 역시 여름이면 개고기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하루가 멀다시피 먹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또 불교 신자인 어머니께서 혹시라도 부정 탈지 모르니 아내가 임신하고 있는 동안 개고기를 삼가라는 말에 개고기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개고기를 삼가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내가 건강한 딸아이를 출산하자 이상하게도 개고기가 입에 당기지 않았다. 하여 이후에는 누군가 개고기를 먹자고 하면 따라 나설 뿐이지 필자가 앞서 개고기를 먹자고 제안하지는 않게 됐다.
아니,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음식의 다양화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하다. 그 전까지 여름날 보양식하면 으레 개고기를 최상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여러 보양 음식들이 등장하면서 굳이 개고기를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각설하고, 최근 개고기 식용 문제로 찬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동물보호 단체가 중심이 되어 개식용을 반대하는 반면, 개식용을 주장하는 육견협회 등의 반발이 흡사 한 판 벌일 기세다.
이와 관련해 이상돈 바른미래당 의원이 가축의 정의에서 개를 명시적으로 제외한다는 축산법 개정안을 제출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말인즉 개는 가축이 아닌 만큼 식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다. 그런 그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행한 발언을 요약해보자.
『우리나라에선 개가 집을 지켜주고, 서양에선 양을 지켰다. 개와 함께 사냥을 하기도 했다. 말이 없으면 교통이 안 됐잖느냐. 개와 말은 문명사로 볼 때 인간과 교감하면서 생존을 같이 해왔다. 일각에선 개와 닭, 돼지가 뭐가 다르냐고 하지만 개는 애당초 우리 안에서 키울 수 없는 동물로 하나하나 감옥을 만들어 키우는 게 얼마나 추악한 일인가. 개 농장을 없앨 수 있느냐 여부가 대한민국 문명화의 척도다.』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난해하지만,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연상된다. 마치 그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동양인들 특히 우리 민족에게 개는 궁극적으로 식용됐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 무지하기 때문이다.
여러 소리 않겠다. 그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사자 성어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헤아리고, 국회의원으로서 그렇게 할 일 없으면 애완동물을 키우다 무책임하게 버리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안이나 발의할 것을 주문한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