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억 위조사건 2005년 무슨 일이…

사라진 백지수표 정체를 드러내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60∼70대 노인 등으로 구성된 일당이 백지수표에 액수를 써 넣어 만든 500억원 위조수표를 현금화하려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 위조수표의 등장은 세 번째다. ‘500억 위조수표’의 첫 여정은 울산서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서울 강남 한복판에 거액의 수표로 둔갑해 등장했고 2014년 1000억 정치비자금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꽤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도난 수표. 이 수표의 존재가 최근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얼마나 더 있는 것일까? 

허술한 계획
현금화 시도

서울 강북경찰서는지난 23일 위조유가증권 행사 및 사기미수 혐의로 정모(49)씨와 김모(71)씨를 구속하고 범행에 쓰인 위조수표를 제공한 김모(69)씨 등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 등은 지난해 11월22일 위조수표를 서울 강북의 한 은행서 현금화하려 시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씨 일당이 내민 수표를 받은 은행원은 발행일이 워낙 오래됐을 뿐 아니라 수표가 다소 조악하고 금액이 매우 높은 점 등을 수상하게 여겨 발행한 은행에 확인했고, 그 결과 발행 이력이 없는 수표로 드러났다. 

은행 측은 500억원을 입금했다가 뒤늦게 발행되지 않은 수표인 점을 발견하고 정씨 등이 현금을 인출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 등이 현금화하려던 수표는 2005년 울산 두북농협 봉계지점에 공기총을 들고 침입한 2인조 강도가 훔쳐갔던 액면 금액이 없는 백지수표 71장 중 한 장으로 파악됐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인 이모(71)씨 등을 통해 발행일이 오래된 위조수표를 갖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이 과정서 그는 공범 정 씨에게 “위조 수표를 구해오면 이를 현금화해 나눠가지겠다”며 수표를 구해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후 수표 소지자 김모씨를 알게 된 이 씨는 전달책들에게 “거제도에 아파트 사업을 하고 있으니 성공하면 이를 주겠다”고 꼬여 수표를 전달하게 했다. 

경찰조사에서 김씨는 범행을 시인하며 “수표가 워낙 오래됐기 때문에 은행서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13년전 울산 두북농협 공기총 강도 침입
노인 2인조 액면 금액이 없는 71장 털어

위조수표를 소지하고 있던 또 다른 김씨는 “사망한 교수로부터 위조수표를 받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관계자는 “2005년 도난 당한 백지수표가 어떻게 위조됐으며 어떻게 유통됐는지 등 더 구체적으로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울산 두북농협 봉계지점은 2005년 12월20일 공기총을 들고 침입한 2인조 강도에게 현금과 수표 등 7000만원 상당을 빼앗긴 적이 있다. 당시 20~30대로 추정되는 2인조 총기 복면강도가 침입해 현금과 수표 등 7000만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공기총을 든 범인 중 한 명은 농협 입구를 지키고 다른 한 명은 지점 안에 있던 남녀 직원 6명과 손님 3명을 위협하면서 모 은행 김해지점에 개설된 계좌번호를 제시하며 “9억5000만원을 입금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직원들이 “거액의 현금을 이체하는 데는 본부의 승인이 필요하다”며 시간을 끌자 범인들은 가방을 던지며 현금을 요구했다. 

직원들이 금고에 있던 현금 6000만원과 10만원권 수표 100장 등 7000만원을 건네자 범인들은 미리 준비한 경북 번호판의 흰색 엑센트 승용차를 타고 달아났다. 

범인들이 타고 달아난 차는 오전 10시45분경 농협서 20km 떨어진 경북 경주시 외동읍 북토마을 입구서 불에 탄 채 발견됐다. 

세번째 등장
모두 실패?

직원들은 울산서부경찰서 지구대 및 경비업체와 연결된 비상벨을 눌렀으나 범인들이 머물렀던 4∼5분 동안 경찰과 경비업체 직원은 출동하지 않았다. 

농협서 경찰 지구대는 약 8km 떨어져 있다. 또 당시 농협 CCTV가 가동됐으나 범행 시간대에는 녹화되지 않아 치밀하게 모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사건은 은행에 직접 침입한 2명 외에도 이들을 돕거나 범인들이 입금하기로 한 돈을 찾기 위해 다른 은행에서 기다리던 사람들까지 총 8명이 범죄에 연루돼있어 충격을 줬다. 

범인들이 타고 달아난 차량은 1시간여 지난 10시45분쯤 경북 경주시 외동읍 북토리 마을 입구서 불에 탄 채 발견됐다. 

총기 강도 중 1명과 범행을 도운 일당 5명은 사건 6일 만에 검거됐고, 중국으로 달아났던 다른 강도도 2006년 5월 위조 여권으로 국내로 돌아와 숨어 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울산 두북농협 은행 강도 사건에서 도난당한 자기앞수표가 세상에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서울 동작경찰서는 1000억원 상당의 수표를 위조해 정권 비자금이라고 속여 유통시킨 남성을 검거했던 적이 있다. 

당시 60대 후반이었던 류모씨는 정권 비자금으로 발행한 수표가 있는데 이것을 대기업서 환전하면 15%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대형식당 업주인 장모씨를 속여 사전작업비 명목으로 1500만원을 받아 챙겼다. 

이후 장씨가 돈을 갚을 것을 요구하자 위조한 수표를 건넨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동작경찰서가 언론사에 제공한 사진을 보면 류씨가 범행에 사용했던 수표에는 ‘두북농협 봉계지점’이라는 지점명이 선명하게 박혀있다. 

동작경찰서에 따르면 검거된 류씨는 2013년 서울 광진구에서 구모(사망)씨로부터 울산 농협이 발행한 백지 자기앞수표 20매를 1000만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이 중 2매를 위조해 범행에 사용했으니 18매가 남은 셈인데, 경찰은 이를 수거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류씨 사건 당시 경찰 관계자는 정권 비자금 등을 운운하며 고액의 약속 어음이나 수표를 담보로 제공할 경우 해당 은행에 위조 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강남경찰서 유 팀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17매의 자기앞수표에 대해 “누군가 또 다시 수표를 이용하기 전까지는 그것들을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전했다. 

정치 비자금?
허점 투성이

위조지폐가 두 번째로 등장한 시기는 지난해 7월이다. 

당시 서울 강남서 500억원대 위조수표를 담보로 대부업체서 돈을 빌리려던 50대 후반의 남성이 경찰에 구속됐다. 검거된 남성은 자신이 가진 수표가 정치권 비자금의 일부라며 이를 담보로 5억원 상당을 대출받으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수표의 출처에 대해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 강남에 있는 대부업체 직원 A씨는 500억원대 수표가 찍힌 사진 한 장을 문자로 전송받았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사업상 알고 지내던 정모(59)씨. 

A씨에 의하면 정씨는 사진 속 수표를 담보로 6000만원을 대출해 달라고 요구했다. 정씨의 요구에 의심이 생긴 A씨는 은행에 수표 번호 조회를 요청했다. 
 

그 결과 수표가 위조된 것 같다는 은행의 답변이 돌아왔다. A씨는 정씨에게 대출을 해줄 것처럼 말하면서 일단 사무실로 오라고 답신을 했고 정씨는 A씨의 부름에 의심없이 사무실을 찾아갔다. 

정씨는 A씨가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자 작은 가스라이터만한 전기 스틱을 꺼내 수표 용지를 긁으면서 이 방식이 수표가 진짜임을 확인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3년전 울산 두북농협 공기총 강도 침입
노인 2인조 액면 금액이 없는 71장 털어

또한 자신이 서울중앙지검에 근무한다는 둥, 필요하면 수표를 발행한 은행의 지점장을 2시간 안에 불러오겠다는 둥의 말을 늘어놨다. 그 사이 A씨는 경찰에 신고했고, 정씨는 사무실로 들이닥친 서울 강남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에 현행범으로 검거됐다. 

정씨는 검거되는 과정에서 30여분간 소리를 지르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경찰에 따르면 검거된 정씨는 당시 보호관찰법 위반으로 부과된 벌금을 내지 않아 수배 중에 있었으며, 사기 등 전과가 20범에 이르는 화려한 범죄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은 정씨가 가지고 있던 수표의 출처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정씨가 가지고 있던 수표는 2005년 울산 두북농협 봉계지점에서 도난당한 자기앞수표 일반권 가운데 1매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씨는 위조된 수표를 최 사장이라는 사람에게 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잊을만 하면…
한장 한장씩

정씨에 따르면 최 사장은 위조수표를 정씨에게 건네며 “이걸 담보로 대부업체서 5억원을 빌려오라”고 말했다. 정씨는 검거되기 전까지 수표가 가짜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경찰이 정씨에게 수표를 건넸다는 최 사장에 대해 캐묻자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고 말해 수사진을 당혹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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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