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검찰총장의 오른팔로 불리는 대검 범정(범죄정보기획관실)이 해체됐다. 범정은 중수부가 해체된 이후 대검의 유일한 칼날이었다. 각종 범죄정보를 수집· 분석하며, 사실상 인지수사에 버금가는 역할을 해왔다. 새 정부의 검찰개혁 기조와 ‘우병우 라인’ 청산 등 검찰 개혁 작업의 신호탄으로 분석된다.
지난 25일 대검 범정이 발칵 뒤집어졌다. 예고도 없이 해체된다는 언론보도에 범정 수사관들은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검은 이날 오전 범정 소속 수사관 40여명에게 “이달 말 정기 인사서 전원이 일선 검찰청으로 내려갈 것”이라며 “기존 업무를 중단하고 희망 근무지를 적어내라”고 지시해서다.
내부 대수술
살벌한 물갈이
외부서 평상시처럼 정보활동을 하던 수사관은 물론 휴가자도 대검에 복귀했다. IO(Intelligence Officer) 단체 카카오톡 방에서도 나가버렸다. 이날 부로 수사관들은 사무실서 짐을 빼고 대외 정보활동을 중단했다. 지난 31일자로 검찰 수사관 정기인사가 예정돼있는 점을 감안해도 수사관 전원 물갈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통상 범정은 각종 경로를 통해 범죄정보를 입수해 분석·평가한 뒤 내사를 본격화할지 판단하며 내사 이후에는 다음 단계의 수사로 나아갈지를 결정한다.
범정은 범죄정보1담당관과 2담당관 체제로 구성된다. 범정1담당관은 부정부패 정보, 경제 사범, 언론·정보통신을 포함한 각종 범죄 첩보를 수집 및 관리한다. 2담당관은 공안, 선거, 노동, 대공, 사회단체 및 종교 등과 관련한 각종 정보 동향을 수집·관리한다.
범정 수사관들은 전국 각지와 관계기관 등에서 범죄 첩보와 정보를 입수해 생산하며 범정기획관실은 이를 토대로 분석한 뒤 각급 검찰청에 사건을 배당하는 역할을 한다.
범죄 수사의 단서가 되는 범죄정보는 물론 검찰 조직이나 총장과 관련한 동향 정보도 광범위하게 수집한다. 이뿐만 아니라 국회와 정부 부처, 기업 등을 상대로 얻은 정부 기관 동향과 정보를 검찰총장에게 직보하고 있다. 이런 점들이 검찰총장의 힘을 과도하게 키운다는 지적이 이어지며 적절성 논란을 빚기도 했다.
문무일 취임 첫날 전격 지시
대대적 조직 개편 단행 예정
이명박·박근혜정부서 범정은 검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핫라인’으로 활용됐다. 특히 정치권과 재계가 연루된 권력형 부패 사건 등의 기초 범죄정보를 수집해 검찰 일선 수사 조직을 지원해왔다.
따라서 이번 조치로 범정의 업무가 대폭 축소되면 검찰의 수사 시스템 변화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의 검찰개혁 기조와 문무일 검찰총장의 임명에 따라 검찰의 특수수사와 공안 분야 수사가 대폭 재편될 전망이어서 범정 분야에 대해서도 재편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검찰은 이번 기회에 전반적인 범죄정보 수집 및 생산, 관리 체계를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향후 범정의 정보수집 대상과 내부 보고 체계 등이 손질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직 축소는 현재 고려 대상이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대검 관계자는 “범정의 역할과 대외 활동 방식 등에 대해 구체적 방침을 정하는 등 ‘리빌딩(조직 재편성)’을 한 뒤 다시 인력을 충원해 범정을 운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범정을 해체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같은 조직 개혁은 검찰 권한 축소, 정치적 중립성 확보 등을 꾀하는 문 총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범정 소속 검사와 수사관들은 정해진 업무 영역을 벗어나 청와대 하명수사에 동원되거나 정치적 활동을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상대 전 검찰총장 재임 시절 박영선 당시 법제사법위원장(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출입국 기록을 조회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눈·귀 역할
스스로 막아
범정 물갈이의 표면적 이유로 조직 개편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검찰 내 ‘우병우 사단’ 솎아내기 의도가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재임한 박근혜정부 시절에 이뤄진 검찰 수사 가운데 부적정 처리된 사건 중 이러한 수사의 근거를 제공한 범정을 대상으로 한 ‘적폐 청산’으로 볼 수도 있다는 취지다.
검찰 안팎에서는 정권 교체 이후 단행된 검찰 간부 물갈이 인사에도 불구하고 검찰 내 ‘우병우 라인’이 계속 남아 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우병우 라인으로 지목된 정수봉 전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은 최근 서울고검으로 좌천됐다. 당시 청와대는 정 전 기획관을 포함한 고검장·검사장급 인사에 대해 과거 중요 사건의 부적정 처리를 명분으로 사실상 좌천하는 인사를 단행한 바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파견 당시 우 전 수석 지시를 받아 ‘삼성 경영권 승계’ 문건 작성에 관여한 이영상 범죄정보1과장은 이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검사들의 팔다리 역할을 해온 수사관들 전면 교체는 솎아내기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일선 수사관까지 전원 교체한 것에 대해 ‘가혹하다’는 말도 나온다. 전직 범정 관계자는 “범정 수사관 중에는 오로지 묵묵하게 첩보활동만 한 사람들도 많다”며 “범정이 사실상 물갈이 되면서 소신을 갖고 일한 수사관들이 도매금으로 전정권 부역자로 낙인이 찍혀버렸다”고 말했다.
수사관 40여명 일선 복귀
서울지검도 업무중단 지시
일각에선 이번 대선 전후 범정서 현 여권 인사들의 정보를 수집했고 이 때문에 청와대 눈 밖에 났다는 말도 나온다. 또 박근혜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서 우병우 전 민정수석비서관과 함께 근무했던 검사가 검찰로 돌아와 범정에 근무하며 청와대와 자주 연락하는 업무를 담당해 미운털이 박혔다는 얘기도 돌았다.
이와 더불어 서울중앙지검 범정도 일시 폐쇄 조치됐다. 지난 27일 서울중앙지검은 문 총장이 취임한 직후 2차장 산하 총무부 소속 검사들을 보내 3차장 산하 범죄정보과를 전격 폐쇄조치했다.
서울중앙지검 범정과는 특별1부 소속으로 3차장의 지휘를 받는다. 대검 범정처럼 각종 범죄 관련 정보·첩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며 지검장을 보좌해온 곳이다. 대검 범정기획관이 검찰총장의 ‘눈과 귀’였다면 서울중앙지검 범정과는 서울중앙지검장의 눈과 귀였다.
총무부 소속 검사들은 서울 서초동 청사 8층에 위치한 범정과 사무실에 갑자기 들어가 수사관 등 직원들의 업무를 중단시키고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이후 개인 소지품 외 모든 업무일지, 메모지 등은 물론 컴퓨터에 내장된 자료들을 수거하거나 봉인하고 사무실을 폐쇄했다.
범죄현장 압수수색을 방불케 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날 현재까지도 해당 사무실은 폐쇄 중이다.
이들은 역시 지난 31일자 직원인사에 따라 전원 다른 지방검찰청 등으로 이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정보과는 현재 3차장 산하서 향후 ‘소윤(작은 윤석열)’이라는 별칭을 가진 윤대진 1차장 산하로 옮겨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윤 차장은 현 정부 개혁인사의 상징인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과 사이가 각별한 것으로 유명하다. 검찰이 제 살을 일부 깎아내면서까지 문재인정부 개혁 기조에 일단 부응하는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검찰 개혁 의지
과거 라인 정리
문 총장은 지난 25일 서울 서초동 대검 청사서 취임식을 갖고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문 총장은 “권위적인 내부 문화를 바꾸는 등 검찰을 투명하고 열린 조직으로 만들겠다”며 “수사기록 공개 범위를 전향적으로 확대해 불필요하게 제기되는 의심과 불편도 거둘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