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서민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는 가운데, 푼돈과 생필품을 훔치다 붙잡히는 안타까운 소식이 연일 들리고 있다. 이른바 ‘21세기 장발장’이라고 불리는 생계형 범죄자들이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눈물겨운 사연이 있지만 그렇다고 처벌 자체를 면할 수는 없다. 반면 생활고와 취업난이라는 사회적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는 생계형 범죄에 엄격한 처벌만으로는 오히려 중범죄자를 양산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기 침체로 ‘생계형 경범죄’를 저질러 경찰서에 끌려오는 경범죄 사범들이 여전히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가 우발적으로 선을 넘어 철창 신세를 지게 된 사람들이다.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최근 청년들도 취업난으로 생활고를 겪으면서 생계형 범죄로 내몰리고 있다.
우발적 범행
홀로 자취를 하는 권모(20)씨는 지난해 10월30일 광주시 동구 지산동의 한 식당서 계산대 위에 손님이 놓고 간 체크카드를 훔쳐 달아났다. 그는 카드로 3차례 총 18만5000원어치를 결제했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권씨는 범죄사실에 대해 순순히 자백하면서 “배가 고파서 카드를 훔쳐 썼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최저 임금을 받으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폐지 수집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김모(75) 할아버지는 지난해 3월 서울 서초구 방배천로 주택가를 지나다 문 앞에 놓여 있는 택배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값비싼 물건 같아 순간 유혹을 느껴 훔쳤지만 포장을 뜯고 보니 2만원 어치 생활용품이었다.
집주인의 신고로 붙잡힌 김씨는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 다행히 경찰은 김씨가 범죄 전력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 형사 입건하지 않기로 했다.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있던 장모(58)씨는 지난달 16일, 광주 북구의 한 대형마트 1층 의류판매장서 9만9000원 상당의 겨울 외투를 훔쳤다. 장씨는 옷을 사겠으니 잠시 기다려달라 말한 뒤 매장을 떠났다가 종업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옷을 훔쳐 달아났다.
그러나 장씨의 ‘절도 사연’이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새 옷을 사 입기 위해 마트에 들렀다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임이 드러나면서 주위의 동정을 사고 있다. 포항, 순천, 경기 등 전국서 장씨를 돕고 싶다는 전화가 경찰서로 걸려오고 있다.
생계형 범죄는 법원의 감형 사유로 참작되기도 하지만 처벌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실제로 지난해 10개월 집행유예 기간 중 배고픔을 못 이겨 라면과 요구르트 등을 훔친 생계형 도둑에게 법원이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대전에 거주하는 A씨는 캔 음료 6개, 라면 5봉지 요구르트 10여개 등을 모두 3차례에 걸쳐 훔쳤다가 기소됐다. 법원은 절도죄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형이 확정된 A씨가 두 달도 되지 않아 다시 범행을 저질렀으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집행유예 기간임에도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고 최종 형량 범위에서 가장 낮은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지난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경찰청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푼돈을 훔쳐 붙잡히는 절도 범죄가 급증하는 추세다. 1만원 이하 절도범 검거 실적은 2011년 1만563건에서 지난해 1만4810건으로 약 40% 증가했다.
같은 기간 1만원 초과∼10만원 이하 절도범 검거는 3만9566건서 5만1551건으로 32%, 10만원 초과∼100만원 이하 절도범 검거는 11만2486건서 12만3225건으로 17% 늘었다.
푼돈·생필품 절도 생계형 범죄 늘어
감형 사유 참작되지만 처벌 불가피
금 의원은 “생계형 범죄는 생활고와 취업난이라는 사회적 문제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며 “엄격한 처벌만 강조하면 사회적 분노만 키워 중범죄를 양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경찰청은 경미범죄심사위원회를 운영해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현대판 장발장’들을 구제해주기로 했다. 경미범죄심사위원회는 단순 절도나 무전취식 등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경범죄 사범을 심사해 피해 정도와 죄질 등 사유에 따라 처분을 감경해준다.
지난 10일 경찰청에 따르면 경미범죄심사위원회가 설치된 지난해 3월8일부터 11월30일까지 전국 142곳 경찰서에서 경범죄로 형사입건 대상이 된 1469명 중 1375명은 즉결심판으로 감경했으며 972명은 훈방 조치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경찰의 이 같은 조치로 전과자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 즉결심판(20만원 이하의 벌금·구류 또는 과료에 해당하는 사건)이나 훈방 조치가 되면 범죄경력(전과)이 남지 않는다. 만약 이들이 형사입건돼 기소됐다면 소설 속 ‘장발장’ 꼴이 났을 수도 있다.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평생 ‘전과자’ 낙인이 찍혀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 경찰청 관계자는 “단순 절도 등 순간적인 실수로 죄를 짓게 되었을 때 처벌해서 전과자를 만드는 대신 반성의 기회를 주기 위해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생계형 범죄자들은 대부분 지자체가 운영하는 긴급복지원 대상자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춥고 배고파서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지자체와 복지단체의 문을 먼저 두드려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충북 청주시 청원구 한 주민센터는 지적장애 3급인 출산 여성의 긴급복지를 지원했다. 이 여성은 이혼한 남편이 교도소에 있고 의지할 가족이 없는 막막한 상황에 갓난아이를 안고 주민센터 문을 두드렸다.
주민센터 측은 이 여성을 쉼터로 안내한 뒤 긴급복지 예산을 활용, 60만원의 해산비를 지원했고 분유와 기저귀, 신생아 용품, 생활용품, 김치, 쌀 등도 가져다줬다. 전국 거의 모든 지자체는 위기에 직면한 저소득층 주민을 돕는 이 같은 ‘긴급복지’ 제도를 운영 중이다.
지원대상은 4인 가족 월 소득이 300여만원 이하거나 중위소득 75% 이하 등으로 배고파서 생필품을 훔치는 이들 대부분이 포함된다. 도움을 청한 이들은 비록 적은 액수지만 생계비, 의료비, 연료비, 해산비, 장례 보조비, 전기요금 등을 도움받을 수 있다.
전과자 낙인
그러나 긴급복지 제도 자체를 알지 못하거나 신청하지 않으면 지원 자체가 불가능하다. 스스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보건복지콜센터나 거주지 읍·면·동 사무소로 당사자가 직접 신청해야 한다. 읍·면·동 사무소에는 희망복지팀이나 맞춤형 복지팀이 꾸려져 있지만 이런 조직만으로는 관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을 찾아내는 게 어렵다.
복지대책에 대한 보완책도 물론 필요하다. 한 전문가는 “현재 일회성에 그치는 지원책을 취업 지원 등으로 이어지게 복지제도를 더욱 촘촘하게 구축해야 하는 것은 정부와 지자체의 몫”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