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20여개 지점을 가지고 있는 국내 최고의 여성전용바인 ‘레드모델바’를 모르는 여성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현재 레드모델바는 기존의 어두운 밤 문화의 하나였던 ‘호스트바’를 건전하게 바꿔 국내에 정착시킨 유일한 업소로 평가받고 있다. 이곳에 근무하는 ‘꽃미남’들만 전국적으로 무려 2천명에 이르고, 여성들의 건전한 도우미로 정착하는데 성공했으며 매일 밤 수많은 여성손님들에게 생활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한때 ‘전설의 호빠 선수’로 불리던 김동이 대표의 고군분투가 녹아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과 유흥업소의 창업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여자의 밤을 디자인하는 남자>를 펴낸다. <일요시사>는 김 대표의 책 발행에 앞서 책 내용을 단독 연재한다.
“동이는 주·조연급, 그리고 나머지도 조연급으로 캐스팅됐다”
“사실은 내가 PD쪽에 3000만원을 주기로 약속 했어”
■ 캐스팅의 대가, 3천만원
드디어 가슴 뛰는 첫 연습시간이 왔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직원이 연습실로 안내해주었고 그곳에는 눈에 익숙한 연기자 한명이 있었다. 방송국 15기 탤런트. 유명한 사람을 바로 내 눈 앞에서 본다니, 나도 이제 곧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 듯 했다. 연습실에는 나 말고도 인형 같은 얼굴을 한 여자들도 두 명이 나와 있었다. 현직 탤런트가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연기 지도를 해준다니 역시 전속다운 특별 대접을 받는 듯 했다.
첫 대본 연습은 어렵다는 사극이었다. 사극은 대사를 할 때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혀가 꼬이기 때문에 가장 힘든 장르이기도 하다. 일반 드라마야 그저 평소에 말하듯 하면 되지만 사극은 대사의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가장 어려운 장르의 대본으로 연습을 하니 그냥 일반적인 대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드디어 연습이 시작됐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스럽게 대사를 했다. 나를 비롯해 다른 두 명의 여자들도 꽤 연기 연습을 했던 것 같이 그럭저럭 소화를 해냈다. 현직 탤런트 역시 나에게도 칭찬을 해주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열심히만 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이었다. 아, 나는 그때 또 한 번 행복감을 느꼈다. 이런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것만으로도 이제까지의 ‘호빠선수 김동이’가 아니라 ‘예비 배우 김동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더욱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여기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남자는 나 혼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만약 남자 배우에 대한 캐스팅 문의가 들어오게 되면 당연히 내가 ‘캐스팅 0순위’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딱딱 맞아 떨어진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약 한달 간 연기연습에 몰입을 했다. 탤런트가 오지 못하는 날이라도 여자 연기 지망생들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쳤다. 그렇게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갈 즈음, 우리들은 그날도 별일 없이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다르게 회사 여직원이 연습실로 들어와 이야기를 했다.
“오늘 대표님께서 방송국 PD님과 미팅을 하신 후 조금 이따 들어오신대요. 그래서 모두 남아 있으시래요.”
우리 회사 대표님이 방송국 PD와의 미팅을 했다고? PD라면 캐스팅에 직접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아닌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심장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혹시 대표님이 드라마나 영화출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30분 후, 대표님이 사무실에 도착했고 모두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아, 도대체 어떤 말씀을 하실까.
대표님의 얼굴도 약간 상기되어 있는 듯 했다. 손에 들고 계신 노란색 봉투에서 새로운 대본이 꺼내졌다. 우리는 모두들 그것을 하나씩 받아들었고 약간은 어리둥절했다. 드디어 대표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이번 수목 드라마의 캐스팅은 우리 기획사에서 맡게 됐어. 동이는 주·조연급, 그리고 나머지 수빈이와 세미도 조연급으로 캐스팅됐다. 자, 다들 열심히 해야 돼! 너희들의 첫 데뷔작품이란 말이야. 알겠어?”
■ 첫 작품이 주·조연?
한 달 만에 갑작스러운 캐스팅에 우리는 모두 놀라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표님의 말씀에는 한치의 의심도 있을 수 없었다. 특히 나는 ‘조연’도 아니고 ‘주조연’이었다. 가슴 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흥분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대표님이 이야기를 했다.
“동이야, 넌 잠깐만 남아봐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표님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아까 우리들에게 캐스팅 소식을 알렸을 때의 활기찬 모습은 다소 사라진 모습이었다.
“동이야, 이번에 네가 주·조연급이 된 건 정말 큰 행운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 이번 네 캐스팅을 따내면서 내가 PD랑 약속한 게 있다. … 그쪽에 3000만원을 주기로 했어.”
순간 약간 멍해졌다. 캐스팅의 대가로 돈을 주어야 한다니. 대표님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요즘 같은 때에 주·조연급을 맡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야. 너도 잘 알잖아. 요즘 회사 사정도 어렵고 해서… 네가 이 돈을 좀 준비해주어야 하겠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 순간 나는 ‘절대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럼 돈은 언제까지 준비해야 되죠?”
사실 그런 말을 내가 해놓고도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3000만원이란 거금을 지금 당장 어떻게 구하겠는가. 하지만 천금같이 나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대표님은 내일 방송국 담당 PD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옷도 지금보다 더 깔끔하게 입고 오라는 충고도 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는 복잡했다. 하지만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머리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번 일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어떤 친구는 자신도 돈이 없으니 정말 미안하다고 했고, 또 어떤 친구는 ‘뜬구름 잡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속상하고 분했다. 내가 가진 소중한 꿈을 ‘뜬구름’이라고 하다니. 그래 내가 뜨기만 해봐라. 너희같은 녀석들은 쳐다보지도 않을테니. 걱정과 기대, 두려움과 즐거운 상상이 교차되는 밤이 지나고 드디어 PD를 만난다는 날이 다가왔다.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의외로 결론도 빨랐고 기분도 좋았다. 나를 보자마자 PD가 말했다.
“어, 괜찮네. 좋았어. 마스크가 아주 좋아. 그런데 연기는…?”
대표님이 나선다.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모델 생활만 7년차고 우리 회사에서 연기도 제일 잘하는 친구예요. 벌써 대본 연습만 해도 거의 두 달 가까이 되고 있거든요. 지금 맹연습 시키고 있으니까 실전에 투입되면 충분히 자기 몫은 해낼 친구에요. 하하”
PD가 다시 말을 받았다.
“음, 그 정도면 훌륭하구만. 그럼 이번에 캐스팅된 걸로 알아도 되겠어.”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