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에 논란이 되고 있는 국회선진화법을 살피면 불현듯 ‘작법자폐(作法自斃)’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가 만든 법에 자신이 죽다'라는 뜻으로, 자기가 한 일로 인해 자신이 고통 받는 경우를 비유한다. 하여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 단어가 생겨난 배경, 즉 고사를 먼저 살펴본다.
때는 중국의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 중국의 춘추시대 이후부터 진(秦)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으로 진·조·위·한·제·연·초의 칠웅(七雄)이 할거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초에 진나라는 칠웅 중에서 정치, 경제, 문화 수준이 가장 낮은 나라였다. 그러나 기원전 361년에 효공(孝公)이 즉위하면서 일대 반전이 이뤄진다. 효공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진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인재 등용을 가장 우선시 여기고 중국 전역에서 인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위나라 사람으로 상앙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위나라 명문가의 자손으로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부터 중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상앙이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건너간다.
진나라로 건너간 상앙은 효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으레 그러하듯 개혁은 반드시 기득권 세력과 마찰을 빚게 되고 상앙의 개혁 역시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상앙은 이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효공을 설득해 세습 귀족들의 이익을 박탈하는 등 전반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 법의 실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른바 연좌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당시에 연좌법은 열 집을 한 단위로, 또 다섯 집을 한 단위로 만들어 서로 살피고 관리해 서로서로 고발하도록 한 제도로 만일 한 집이라도 법에 걸리는 잘못을 저지르면 이들 모두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를 바탕으로 상앙은 개혁을 추진했고 그로 인해 진은 나라를 정비하고 그 힘을 크게 떨치게 된다. 그러나 상앙의 가장 큰 후견자인 효공이 죽자 상황이 급변한다. 효공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혜왕이 상앙이 아닌 귀족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상앙은 졸지에 역적으로 둔갑된다.
결국 상앙은 도망길에 나서다 한 객사에 도착해 묵고자 하는데 주인이 거절한다. 그 사유가 걸작이다.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을 숙박시켰다가는 상앙이 제정한 연좌죄를 범하게 되어 처벌받기에 절대로 묵게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주인의 거절사유를 접한 상앙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사마천의 <사기>에 실려 있는 글을 인용한다. “아, 법을 만든 폐해가 내게까지 미치는구나”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 하나 숨길 수 없게 된 상앙은 급기야 체포되고 거열형에 처해지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 고사로 인해 작법자폐라는 말이 탄생되었는데, 이제 이를 염두에 두고 국회선진화법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과 현실을 돌아보자. 말은 돌아보자고 했으나 사실 돌아볼 필요도 없다. 흡사 작법자폐란 말이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만들어진 말인 듯 여겨진다.
이를 살피면 가슴 한 쪽이 아련해지면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정도가 아닌 꼼수를 선택하게 되면 당장이야 고비를 넘길 수 있지만 길게 바라보면 결국 제 발등 제가 찍는 형국이 된다는.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