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발 페이퍼컴퍼니 후폭풍

검은돈 가득한 판도라 상자 열렸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열리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는 수십 년간 꽁꽁 싸매인 채 베일에 감춰져 있던 갖가지 정보들이 담겨 있다. 푸틴, 메시 등 오르내리는 이름의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세상 밖으로 꺼내길 주저했던 추악한 진실이 만천하에 공개될 지도 모를 일이다.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도피 관련 문건이 공개되면서 국제적인 파장이 일고 있다. 파나마 최대 로펌이 조세도피처 곳곳에 전 세계 유력인사들을 위한 페이퍼컴퍼니(서류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를 만들어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파나마 페이퍼스’로 불리는 유출 문서가 국내에 어떤 파급력을 불러올지 벌써부터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문건 공개는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의 탐사보도 기자들이 익명의 취재원에게서 자료를 처음 입수하면서 시작됐다. 자료의 방대한 규모와 공적 가치를 고려한 <쥐트도이체차이퉁>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협업을 요청,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모색 폰세카
극비문서 유출

<쥐트도이체차이퉁>의 프레데릭 오베르마이어 기자는 “유출 데이터는 언론인이 입수한 것 중에 사상 최대 규모로 25만 개에 이르는 역외 회사 관련 정보를 담고 있다”며 “이 분야를 이렇게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건 처음 있는 일이다”고 밝힌 바 있다.

자료 분석을 위해 영국 <BBC>, 프랑스 <르몽드>, 독일 <NDR>, 미국 <프로퍼블리카> 등 76개국 109개 언론사, 376명의 언론인이 참여해 1977년부터 2015년 말까지 자료 1150만건을 면밀히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뉴스타파>가 참여했다.


이번에 유출된 파나마 로펌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내부자료는 2.6TB로 역대 최대규모다. 앞서 2010년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국무부 외교문서는 1.7GB, 2013년 ICIJ의 조세도피처 프로젝트 데이터는 260GB였다.

모색 폰세카는 해외법무법인으로서는 세계 4번째 규모의 대형 법인으로 홍콩, 마이애미, 취리히 등 전 세계 35개 이상에 지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이치뱅크를 비롯해 HSBC, 크레디트스위스 등 세계 주요 금융기관과 거래를 하고 있으며, 이들 은행의 고객에게 조세당국이 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어렵도록 도움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파나마 페이퍼스가 알려지자 세계 각국은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 회피 의혹에 대한 관련 조사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법무부가 파나마 페이퍼스 사태와 관련한 조사에 들어갔다고 밝혔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불법적인 자금의 흐름이 정당화되면 안 된다”고 의중을 내비치기도 했다.

영국 국세청(HMRC)도 팔을 걷어붙이긴 마찬가지다. HMRC는 이날 "유출 문건을 기반으로 부유층, 고위층 인사의 자금 세탁이나 조세 회피 등 관련 의혹을 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프랑스도 수사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프랑스 수사 당국은 자국민과 금융 기관들이 파나마를 통해 조세 회피를 했는지 수사에 돌입했다. 이 밖에도 파나마, 독일, 뉴질랜드, 멕시코, 네덜란드 등 각국도 파나마 페이퍼스 관련 조사에 들어갔다.

최대 규모 조세회피 관련 문건 공개
세계 유력인사들 거론…엄청난 파급

어느새 파나마 페이퍼스가 촉발한 조세 회피 문제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마저 점쳐진다. 7일 <마이니치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다음 달 일본 미에현 이세시마에서 열리는 G7정상회의 때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세금 회피 문제를 다루는 의제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국내에서도 파나마 페이퍼스의 후폭풍은 점점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건은 전 세계 72명의 전·현직 정상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출 데이터에서는 ‘Korea’로 검색되는 1만5000여건의 파일 중 한국 주소를 기재한 195명의 한국인 이름이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논란이 되는 인물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인 노재헌씨다. 파나마 페이퍼스를 분석하던 도중 해당 문건에 오른 노씨의 이름이 노 전 대통령의 장남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조사가 이뤄졌고 생년월일과 사진을 검토한 결과 동일인물임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일 <뉴스타파>는 모색 폰세카의 내부 유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노씨를 포함한 196명이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3곳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자료에 따르면 노씨는 2012년 5월18일 버진아일랜드에서 3개의 회사를 설립해 주주 겸 이사에 취임한 것으로 나타났다. 3개 회사 모두 1달러짜리 주식 1주만을 발행한 전형적인 페이퍼 컴퍼니라고 <뉴스타파>는 전했다.

점점 커지는
파나마 후폭풍

3개 회사 이름은 ‘One Asia international’, ‘GCI Asia’, ‘Luxes international’이다. 이 가운데 Luxes international의 주주로 노씨와 GCI Asia가 등재돼 있다. 노씨는 회사 설립 당시 자신의 주소를 홍콩으로 기재했고 2013년 5월 이사직에서 사퇴했다. 이사직은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첸 카이와 한국인으로 보이는 김정환씨가 물려받았는데 두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뉴스타파>는 이런 점에 견줘볼 때 노씨가 설립한 회사는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라고 설명했다. 

<뉴스타파>는 “이 회사들이 소유구조를 매우 복잡하게 내놨다”며 “이렇게 중층적으로 설계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노씨는 의혹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2005년부터 홍콩에 거주했고 2011년경부터 중국 관련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지만 거론된 3개 회사는 사업이 무산돼 휴먼상태에 돌입했다는 주장이다.

노씨는 즉각 반박자료를 내고 “중국사업을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으나 사업진행이 안돼 계좌개설도 하지 않았다”며 “관계당국에서 필요하다면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조세회피처나 비자금 등과는 일절 무관하다”고 말했다.

노씨의 조세 회피 의혹은 갖가지 의혹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정권의 비자금 유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비자금 이동 흔적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조세회피처에 1달러짜리 회사를 세웠다는 점에서 조세당국의 감시를 벗어나고자 했다는 의혹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노재헌씨
커지는 의혹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세웠던 페이퍼컴퍼니를 넘겨받은 인사가 SK텔레콤의 투자회사 관계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SK그룹과의 연관설도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재헌씨의 페이퍼컴퍼니 One Asia international, GCI Asia 2곳을 넘겨받은 중국인 첸카이는 2011년 설립된 SK텔레콤 홍콩 벤처스매니지먼트 이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무작정 의심하기엔 정황상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띈다.
 


일단 노씨가 SK와 사돈지간이라는 이유로 SK와의 연관설이 나도는 상황은 개연성이 떨어지고 SK텔레콤의 지원 의혹을 제기한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실제로 SK 측은 노씨와의 연결 소문에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Korea 파일’ 1만5000여건
한국 주소 기재한 195명

파나마 페이퍼스에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이름이 다수 발견되자 당국의 발걸음도 한층 빨라지고 있다. 국세청은 한국인 명단을 확보한 뒤 탈세 혐의와 관련 세원이 포착되는 경우 즉각 세무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명단을 입수하는대로 정상적인 기업활동인지 거주자인지 등의 여부를 분석해 역외탈세인지 확인한 뒤 엄정하게 처리할 방침이다. 그러나 한국인 명단을 찾아 분석하고 조사하는 데까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외탈세 혐의자에 대한 신병 확보다. 탈세 혐의를 확인한 뒤 세무조사에 착수하게 되면 출국금지 등 신병확보를 할 수 있지만 탈세 혐의자들이 세무조사 이전에 해외로 나가버리면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13년 <뉴스타파>가 버진아일랜드나 케이만 제도 등 조세회피처를 통한 역외탈세 의혹을 제기했을 당시에도 국세청이 압수수색을 하러 현장에 나가보면 자료가 다 삭제되고 당사자는 해외로 도주해버린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당시 유령회사를 설립했다고 여겨지던 한국인 182명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삼남 김선용씨,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 등 유력인사의 이름이 다수 포함됐다. 그러나 182명 중 실제 세무조사를 받은 경우는 48명에 그쳤고 고발조치가 취해진 인물은 3명에 불과했다. 이들에게 추징한 금액은 총 1324억원이었다.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당장 국세청이 세무조사나 고발조치를 하기도 어렵다. 유출된 명단과 해당 인물들의 계좌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단순히 몇명만 고발 조치했다라는 수치만 갖고 미온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혐의내용이 법위반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만 고발조치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는 점도 수사를 늦추는 장애가 될 수 있다. 통상 페이퍼컴퍼니는 서류상 법인자격을 갖추었으니 자회사를 두고 영업활동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탈세 목적의 자금세탁창구로 이용되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유령회사라는 이름이 뒤따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번에도
유야무야?

한편 파나마 페이퍼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뉴스타파>는 수십명의 신원을 이미 확인했고 유력인사들이 포함된 사안에 관해서는 추가 보도할 것이라고 예고한 상태다. 주요 명단이 추가적으로 공개되면 전체 자료 파악 후 해당 인물들에 대한 서면조사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 큰 파장이 몰려 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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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