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발 페이퍼컴퍼니 후폭풍

검은돈 가득한 판도라 상자 열렸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열리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는 수십 년간 꽁꽁 싸매인 채 베일에 감춰져 있던 갖가지 정보들이 담겨 있다. 푸틴, 메시 등 오르내리는 이름의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세상 밖으로 꺼내길 주저했던 추악한 진실이 만천하에 공개될 지도 모를 일이다.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도피 관련 문건이 공개되면서 국제적인 파장이 일고 있다. 파나마 최대 로펌이 조세도피처 곳곳에 전 세계 유력인사들을 위한 페이퍼컴퍼니(서류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를 만들어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파나마 페이퍼스’로 불리는 유출 문서가 국내에 어떤 파급력을 불러올지 벌써부터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문건 공개는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의 탐사보도 기자들이 익명의 취재원에게서 자료를 처음 입수하면서 시작됐다. 자료의 방대한 규모와 공적 가치를 고려한 <쥐트도이체차이퉁>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협업을 요청,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모색 폰세카
극비문서 유출

<쥐트도이체차이퉁>의 프레데릭 오베르마이어 기자는 “유출 데이터는 언론인이 입수한 것 중에 사상 최대 규모로 25만 개에 이르는 역외 회사 관련 정보를 담고 있다”며 “이 분야를 이렇게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건 처음 있는 일이다”고 밝힌 바 있다.

자료 분석을 위해 영국 <BBC>, 프랑스 <르몽드>, 독일 <NDR>, 미국 <프로퍼블리카> 등 76개국 109개 언론사, 376명의 언론인이 참여해 1977년부터 2015년 말까지 자료 1150만건을 면밀히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뉴스타파>가 참여했다.


이번에 유출된 파나마 로펌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내부자료는 2.6TB로 역대 최대규모다. 앞서 2010년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국무부 외교문서는 1.7GB, 2013년 ICIJ의 조세도피처 프로젝트 데이터는 260GB였다.

모색 폰세카는 해외법무법인으로서는 세계 4번째 규모의 대형 법인으로 홍콩, 마이애미, 취리히 등 전 세계 35개 이상에 지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이치뱅크를 비롯해 HSBC, 크레디트스위스 등 세계 주요 금융기관과 거래를 하고 있으며, 이들 은행의 고객에게 조세당국이 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어렵도록 도움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파나마 페이퍼스가 알려지자 세계 각국은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 회피 의혹에 대한 관련 조사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법무부가 파나마 페이퍼스 사태와 관련한 조사에 들어갔다고 밝혔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불법적인 자금의 흐름이 정당화되면 안 된다”고 의중을 내비치기도 했다.

영국 국세청(HMRC)도 팔을 걷어붙이긴 마찬가지다. HMRC는 이날 "유출 문건을 기반으로 부유층, 고위층 인사의 자금 세탁이나 조세 회피 등 관련 의혹을 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프랑스도 수사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프랑스 수사 당국은 자국민과 금융 기관들이 파나마를 통해 조세 회피를 했는지 수사에 돌입했다. 이 밖에도 파나마, 독일, 뉴질랜드, 멕시코, 네덜란드 등 각국도 파나마 페이퍼스 관련 조사에 들어갔다.

최대 규모 조세회피 관련 문건 공개
세계 유력인사들 거론…엄청난 파급

어느새 파나마 페이퍼스가 촉발한 조세 회피 문제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마저 점쳐진다. 7일 <마이니치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다음 달 일본 미에현 이세시마에서 열리는 G7정상회의 때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세금 회피 문제를 다루는 의제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국내에서도 파나마 페이퍼스의 후폭풍은 점점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건은 전 세계 72명의 전·현직 정상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출 데이터에서는 ‘Korea’로 검색되는 1만5000여건의 파일 중 한국 주소를 기재한 195명의 한국인 이름이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논란이 되는 인물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인 노재헌씨다. 파나마 페이퍼스를 분석하던 도중 해당 문건에 오른 노씨의 이름이 노 전 대통령의 장남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조사가 이뤄졌고 생년월일과 사진을 검토한 결과 동일인물임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일 <뉴스타파>는 모색 폰세카의 내부 유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노씨를 포함한 196명이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3곳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자료에 따르면 노씨는 2012년 5월18일 버진아일랜드에서 3개의 회사를 설립해 주주 겸 이사에 취임한 것으로 나타났다. 3개 회사 모두 1달러짜리 주식 1주만을 발행한 전형적인 페이퍼 컴퍼니라고 <뉴스타파>는 전했다.

점점 커지는
파나마 후폭풍

3개 회사 이름은 ‘One Asia international’, ‘GCI Asia’, ‘Luxes international’이다. 이 가운데 Luxes international의 주주로 노씨와 GCI Asia가 등재돼 있다. 노씨는 회사 설립 당시 자신의 주소를 홍콩으로 기재했고 2013년 5월 이사직에서 사퇴했다. 이사직은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첸 카이와 한국인으로 보이는 김정환씨가 물려받았는데 두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뉴스타파>는 이런 점에 견줘볼 때 노씨가 설립한 회사는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라고 설명했다. 

<뉴스타파>는 “이 회사들이 소유구조를 매우 복잡하게 내놨다”며 “이렇게 중층적으로 설계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노씨는 의혹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2005년부터 홍콩에 거주했고 2011년경부터 중국 관련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지만 거론된 3개 회사는 사업이 무산돼 휴먼상태에 돌입했다는 주장이다.

노씨는 즉각 반박자료를 내고 “중국사업을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으나 사업진행이 안돼 계좌개설도 하지 않았다”며 “관계당국에서 필요하다면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조세회피처나 비자금 등과는 일절 무관하다”고 말했다.

노씨의 조세 회피 의혹은 갖가지 의혹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정권의 비자금 유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비자금 이동 흔적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조세회피처에 1달러짜리 회사를 세웠다는 점에서 조세당국의 감시를 벗어나고자 했다는 의혹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노재헌씨
커지는 의혹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세웠던 페이퍼컴퍼니를 넘겨받은 인사가 SK텔레콤의 투자회사 관계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SK그룹과의 연관설도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재헌씨의 페이퍼컴퍼니 One Asia international, GCI Asia 2곳을 넘겨받은 중국인 첸카이는 2011년 설립된 SK텔레콤 홍콩 벤처스매니지먼트 이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무작정 의심하기엔 정황상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띈다.
 


일단 노씨가 SK와 사돈지간이라는 이유로 SK와의 연관설이 나도는 상황은 개연성이 떨어지고 SK텔레콤의 지원 의혹을 제기한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실제로 SK 측은 노씨와의 연결 소문에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Korea 파일’ 1만5000여건
한국 주소 기재한 195명

파나마 페이퍼스에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이름이 다수 발견되자 당국의 발걸음도 한층 빨라지고 있다. 국세청은 한국인 명단을 확보한 뒤 탈세 혐의와 관련 세원이 포착되는 경우 즉각 세무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명단을 입수하는대로 정상적인 기업활동인지 거주자인지 등의 여부를 분석해 역외탈세인지 확인한 뒤 엄정하게 처리할 방침이다. 그러나 한국인 명단을 찾아 분석하고 조사하는 데까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외탈세 혐의자에 대한 신병 확보다. 탈세 혐의를 확인한 뒤 세무조사에 착수하게 되면 출국금지 등 신병확보를 할 수 있지만 탈세 혐의자들이 세무조사 이전에 해외로 나가버리면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13년 <뉴스타파>가 버진아일랜드나 케이만 제도 등 조세회피처를 통한 역외탈세 의혹을 제기했을 당시에도 국세청이 압수수색을 하러 현장에 나가보면 자료가 다 삭제되고 당사자는 해외로 도주해버린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당시 유령회사를 설립했다고 여겨지던 한국인 182명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삼남 김선용씨,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 등 유력인사의 이름이 다수 포함됐다. 그러나 182명 중 실제 세무조사를 받은 경우는 48명에 그쳤고 고발조치가 취해진 인물은 3명에 불과했다. 이들에게 추징한 금액은 총 1324억원이었다.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당장 국세청이 세무조사나 고발조치를 하기도 어렵다. 유출된 명단과 해당 인물들의 계좌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단순히 몇명만 고발 조치했다라는 수치만 갖고 미온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혐의내용이 법위반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만 고발조치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는 점도 수사를 늦추는 장애가 될 수 있다. 통상 페이퍼컴퍼니는 서류상 법인자격을 갖추었으니 자회사를 두고 영업활동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탈세 목적의 자금세탁창구로 이용되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유령회사라는 이름이 뒤따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번에도
유야무야?

한편 파나마 페이퍼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뉴스타파>는 수십명의 신원을 이미 확인했고 유력인사들이 포함된 사안에 관해서는 추가 보도할 것이라고 예고한 상태다. 주요 명단이 추가적으로 공개되면 전체 자료 파악 후 해당 인물들에 대한 서면조사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 큰 파장이 몰려 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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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