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오너일가 2·3세를 바라보는 세간의 인식은 마냥 호의적이지 않다. 이들을 지칭하는 ‘금수저’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세 대다수는 별다른 능력 검증을 거치지 않고 회사를 물려받는다. 경영 일선에 나서는 연령대마저 낮아지면서 새파란 나이에 그룹 내 요직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재벌가 후계자들은 평균적으로 20대 후반에 아버지 회사에 입사해 30대 초반에 임원으로 승진한다. 임원으로 승진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4년이 채 되지 않는다. 말단 직원의 임원 승진 확률이 극히 희박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출발선부터 다른 셈이다. 한발 더 나아가 임원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연령대는 더 낮아지고 있으며 남성에 국한되던 승계구도에도 일대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경영일선서
진두지휘
지난달 22일 부산 향토기업인 조광페인트 최대주주에 고 양성민 회장의 셋째 딸인 양성아(1977년생)씨가 이름을 올렸다. 영업본부 상근이사직으로 조광페인트에서 근무 중인 양씨는 지분 17.84%을 보유해 언니 양은아(5.82%)씨나 양경아(5.73%)씨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했다.
30대에 불과한 여성 후계자가 그룹의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분명 이례적이다. 다만 비슷한 사례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한술 더 떠 20대 때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여성 후계자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했다. 특히 젊은 피 수혈에 적극적인 패션분야 중견기업에서는 약 10년 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현상이다.
메트로시티 브랜드를 선보이고 있는 엠티콜렉션의 양지해 대표는 창업주인 양두석 회장의 장녀다. 20대 중반이던 2004년 사장으로 취임한 후 400억원 수준이던 매출을 약 1300억원 규모로 키워놓았다.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된 덕분에 사업계획 수립뿐만 아니라 창업자와 직원 간 소통 창구 역할도 한다.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의 막내딸 박이라씨는 계열사인 ‘세정과미래’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캐주얼 ‘NII’의 재도약과 ‘크리스크리스티’ 시장 확대를 성공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20대 중반부터 이름을 알린 그녀는 남편인 김경규 사업본부장과 함께 웰메이드를 론칭해 2년 만에 4000억원대 매출을 올리며 경영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최혜원 형지I&C 상무는 20대 때부터 착실히 실력을 쌓은 후 최근 여성복 '캐리스노트' 사업부장으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패션그룹형지가 새롭게 조직을 꾸리는 가운데 최 상무가 백화점 영업을 진두지휘하게 된 것이다.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의 장녀인 그는 그동안 본사 경영기획실 이사로 활동하다 지난해부터 영업 일선에 섰다.
20대 나이에 경영일선 전면 등장
요직에 이름 올리고 영향력 확대
어쩌면 앞에서 열거한 사례는 시작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오너일가 여성 후계자들의 경영 일선 진출 연령대가 더욱 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대에는 실무를 쌓고 30대 나이에 본격적으로 일선에 모습을 드러내던 유형은 더 이상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20대 중반부터 요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본사 지하 1층 회의실에서 열린 토니모리 정기 주주총회에서 배해동 회장의 장녀인 배진형 씨의 사내이사 선임안이 통과됐다. 배씨의 선임 안건이 통과되면서 토니모리의 사내이사는 2명에서 3명으로 늘었다. 현재는 배해동 회장과 홍현기 경영지원본부장이 사내이사직에 올라있다.
1990년생인 배씨는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후 지난해 토니모리 해외사업부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현재 토니모리 지분 8.5%(100만주)를 소유하고 있다. 이를 포함한 특수관계인 지분은 모두 64.94%에 달한다. 최대주주인 배 회장의 지분율은 30.93%다. 배씨는 지난해에야 회사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에 기반을 둔 주류업체 보해양조는 지난해 11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창업주인 고 임광행 회장의 손녀이자 보해양조 최대주주인 임성우 창해에탄올 회장의 장녀 임지선(1985년생)씨가 부사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재계에서는 임 부사장에 대한 인사 조치를 ‘3세경영’ 차원으로 보고 있다.
임 부사장은 대표이사 재임기간 ‘부라더시리즈’를 선보여 주류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그러나 지난 4월 대표이사에 선임된 데 이어 부사장으로 임명되자 생각 이상으로 승진 속도가 빠르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여식에게
믿고 맡긴다
경영 일선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직간접적으로 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입지를 다지는 경우도 빈번해지고 있다. 이 경우 다량으로 보유한 지분이 큰 무기가 된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2세 경영의 초석으로 비춰질 수 있는 사안이다.
아모레퍼시픽의 서경배 회장의 장녀인 서민정씨의 아모레퍼시픽그룹 지분은 26.48%로 서 회장 다음으로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에뛰드와 이니스프리 지분 외에도 지난 2003년과 2006년 서 회장으로부터 아모레퍼시픽 우선주를 증여받아 지분 0.01%를 보유하고 있으며, 외가 쪽인 농심홀딩스 주식 1만주(0.26%)를 보유해 20대 여성 주식부호 1위에 올라있다.
서씨는 2014년 코넬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지난해 7월께 베인앤컴퍼니에 입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벌써부터 재계는 민정씨가 서 회장의 뒤를 이어 총수에 등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오리온그룹 담철곤 회장의 딸 담경선(1985년)씨는 2004년 서울국제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나 2008년 뉴욕대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오리온 지분 0.53%를 갖고 있으며, 어머니 이화경 부회장(14.48%), 아버지 담 회장(12.9%)에 이은 3대 주주다. 오리온그룹에 따르면 담씨는 후계자 수업을 받기 위해 2010년 오리온에 입사해 ‘마켓오’ 사업부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현재는 전략기획팀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장녀 박하민씨는 미국 코넬대 인문학부에서 사학을 전공한 뒤 조기 졸업했다. 이후 매킨지코리아와 다국적 부동산컨설팅 업체 CBRE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소속으로 국외부동산 투자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보유한 미래에셋컨설팅 지분은 8.19%다.
구소희씨는 LS그룹 구자균 부회장의 차녀다. 구 부회장은 LG그룹 창업주 고 구인회 동생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3남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구씨는 구자균 LS산전 부회장의 차녀로 LS그룹 오너 여성 중에선 처음으로 회사에 입사했다. 뉴욕 시러큐스대 마케팅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 대학원 국제통상학과를 수료했던 그녀는 2011년 말 사직했다.
지분 쥐고
영향력 확대
이성훈 서울반도체 대표이사의 딸인 이민규씨는 서울반도체의 지분을 지분 8.71%을 보유한 2대 주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주가 폭락 시기에 서울반도체 지분을 저가로 대량 증여받은 뒤 주식가치가 크게 올라 편법 증여 논란이 일었다.
2008년 12월 서울반도체 주식 448만주씩을 주당 9000원에 넘겨받았다. 증여 당일 종가 기준으로 주식가치는 406억원이었으나 서울반도체가 코스닥 시가총액 1위를 기록하는 등 주가가 크게 오르며 지분가치가 높아졌다. 2014년 이민규씨는 국내 주식부호 조사에서 28세의 최연소 주식부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오뚜기 창업주인 함태호 명예회장의 손녀이자 함영준 회장의 장녀인 함연지씨는 오뚜기 주식 4만주를 보유하고 있다. 지분율은 1.16%. 함씨는 ‘뮤지컬 천재소녀’라고 불려질 만큼 뮤지컬계에서도 유명하다. 함연지는 2008년 뮤지컬 <인어공주’의 ‘Part of the world>를 부른 동영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또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사에 따르면 함씨는 지난해 9월 오디션에서 300 대 1 경쟁률을 뚫고 얼터너티브에 뽑히기도 했다.
지분 대량 보유…후계구도 초석
‘미검증 금수저’ 임원은 부글부글
잇단 여성 후계자들의 등장에 대해 재계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시대적 흐름에 맞고 여성의 ‘꼼꼼함’이 경영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김은선 보령제약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들의 경우 40∼50대 나이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회사의 전권을 넘겨받았다는 점에서 20대 여성 후계자들과 차이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능력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20대 자녀를 향한 승계 구도는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뜻이다.
통상 재벌가 2·3세는 조기 해외 유학을 다녀와서 20대 중반에 입사한 후 초고속으로 승진해 임원 배지를 달고 경영자의 지위에 오른다. 평사원을 거치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 설령 밑에서부터 차근히 단계를 밟더라도 짧은 시간 동안 경영능력을 검증받고 통솔력을 갖추기란 그리 쉽지 않다.
경험 부족은 위기관리능력의 부재로 연결된다. 재벌가 2·3세가 임원에 임명된다는 것은 핵심 의사결정권자로 발돋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들의 의사결정에 따라서 기업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선대와 달리 기업가 정신이 부족하다는 지적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전 세대가 개척자 정신으로 회사를 일궜다면 2·3세는 선대의 의지를 갖추지 못한 경우가 빈번하다. 대다수 재벌 2·3세들을 잡초 근성이 부족한 온실 속의 꽃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계 관계자는 “창업주와 달리 2·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책임감이 희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평범한 직장인들이 꿈꾸기 힘든 자리에 어렵지 않게 도달하는 2·3세들은 애초부터 특권의식에 사로잡히곤 한다”고 언급했다.
부정적 시선
그래도 금수저
예전부터 재벌그룹의 최대 난제는 대외적인 정세 변화가 아닌 ‘오너리스크’란 말이 있다.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창업주가 일신상의 이유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후임자의 능력 부족으로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이런 위험이 회사 내부에서 사그라 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긴 힘들다.
재계 관계자는 “물론 20대 젊은 여성 후계자들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며 “다만 실무 경험이 미천한 재벌가 2·3세에게 애초부터 큰 기대를 갖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