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윤석금 판결 막후

다들 잡아넣고 윤 회장만 봐주나

[일요시사 경제팀] 양동주 기자 = 하루를 사이에 두고 재벌그룹 오너 두 사람이 연이어 법정에 섰다. 1000억원대 배임 행위라는 비슷한 혐의를 받았지만 판결은 감형과 실형으로 엇갈렸다. 전자는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후자는 이재현 CJ그룹 회장이다. 재판부의 결정을 두고 논란이 불거진 건 당연했다. 사법부가 말하는 공정성이라는 잣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다. 한쪽만 봐준 것 아니냐는 목소리마저 들끓고 있다.

책 외판원에서 대기업 총수로 올라선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1980년 한국 브리태니커에 입사한 이래 최고의 영업맨으로 불리던 그는 자본금 7000만원으로 독립해 웅진그룹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후 웅진그룹은 웅진식품, 웅진코웨이 등 15개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샐러리맨 신화
경제사범으로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웅진그룹의 위용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불어닥친 200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흔들린다. 건설경기 악화, 금융업 부실, 태양광산업 침체 등 연속된 악재로 위기에 봉착한 것도 이 무렵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윤 회장은 지난 2012년 7월부터 9월까지 채무 상환의 능력과 의사가 없는데도 1198억원 상당의 CP를 발행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당시 웅진그룹은 CP 발행 전에 이미 회생신청을 내부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CP 발행 사기’ 의혹을 샀다. 2011년 9월부터 2012년 5월까지 웅진홀딩스·웅진식품·웅진패스원 등 우량회사 자금을 임의로 끌어다 부실회사인 웅진캐피탈에 지원해 968억원의 손해를 입힌 혐의도 추궁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8월 윤 회장의 구속 여부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윤 회장이 극동건설과 웅진캐피탈 등 그룹내 부실 계열사에 715억원을 부당지원한 배임횡령 혐의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다만 윤 회장이 2012년 1000억원 규모의 기업어음을 발행한 사기혐의는 무죄로 판결했다.

피해보전을 위해 노력한 점을 감안해 법정구속은 하지 않아 항소심에서 감형 받을 여지도 남겨뒀다. 이 같은 결정은 웅진그룹이 경영공백을 맞이하면 피해자 구제가 더욱 어려워질 것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 회사들에 대한 구체적 변제계획을 제출했다”며 “항소심에서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법정구속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어음 발행부분이 무죄로 인정받으며 최악의 상황을 모면한 웅진그룹은 형량 감형을 위해 항소했고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지난 14일 열린 항소심에서 결국 윤 회장에게 재판부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최재형)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윤 회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추가적인 변제 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을 상당부분 인정해준 셈이다. 윤 회장과 함께 기소된 웅진그룹 전·현직 임직원들에게는 징역 2년6개월과 집행유예 3∼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윤 회장의 지원행위 자체가 지원 회사 고유의 이익보다는 극동건설이나 서울상호저축은행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며 “윤 회장은 CP 발행 당시 웅진코웨이 매각대금으로 CP를 변제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뒤 웅진코웨이 매각을 진정성 있게 추진했다”고 판시했다.

문제는 윤 회장에게 감형을 선고한 재판부의 판단을 수긍하기 애매하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추가 변제 방안을 위해 노력한 윤 회장의 행보를 사실상 인정했지만 이전부터 윤 회장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잡음이 이어져왔다. 특히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 직전에 윤석금 회장의 부인이 웅진씽크빅 보유주식을 전량 처분했던 정황은 도덕성에 대한 자질을 의심케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불구속 재판
처음부터 영∼

윤 회장의 부인인 김향숙씨는 지난 2012년 9월24일과 25일 양일에 걸쳐 소유하고 있던 웅진씽크빅 주식 4만4781주(0.17%) 전량을 장내에서 팔았다. 웅진씽크빅 주가가 8850∼8960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도금액은 3억9750만원가량이다.

당시 증권가에서는 김씨가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의 동반 법정관리 신청 직전에 보유 주식 전량을 매도해 손실을 줄였다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실제로 김씨가 주식을 팔던 당시 웅진씽크빅 주가는 8000원 후반이었고 26일 종가가 전일보다 13.39%(1200원) 내린 7760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씨는 법정관리 신청 하루 전에 보유 주식을 매도해 5000만원가량의 손실을 줄인 셈이다.

1000억대 배임 혐의 항소심서 집유
실형 선고받은 이재현 회장과 상반

이렇게 되자 김씨가 웅진씽크빅 미공개 내부 정보를 이용해 손실을 회피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회사 측은 “김씨가 보유한 지분이 워낙 적고 경영권과 관련이 없었기에 진작부터 정리하려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윤 회장의 친인척들이 비슷한 시기에 웅진코웨이 주식 장내 매도에 나선 정황도 포착됐다. 당시 웅진코웨이 주가는 매각 이슈로 3만원대에서 4만원 이상으로 올랐다.


윤 회장의 감형은 최근 대기업 오너일가의 비리에 엄중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던 사법부의 입장과도 궤를 달리한다. 하루를 사이에 두고 상반된 결정이 이뤄진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비교하면 더욱 극명해진다. 

지난 15일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판사 이원형)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2년6개월에 벌금 252억원을 선고했다. 1600억원대 횡령·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적용된 252억원 상당의 조세 포탈 혐의와 115억원 상당의 횡령 혐의는 지난 9월 대법원 판결의 기속력에 따라 더 이상 변동의 여지가 없게 됐다.

재판부는 “다수 임직원을 동원해 거액의 세금을 포탈하며 조세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은 책임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며 “기업의 총수라도 엄중히 처벌받게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할 필요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선고 직후 이 회장 측 변호인은 재상고할 뜻을 밝혔지만 대법원의 판단이 크게 달라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법원의 취지에 따라 형법상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한 파기환송심을 대법원이 다시 깨뜨릴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만성신부전증으로 신장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구속집행정지가 결정된 이후 이 회장은 건강상태 악화로 불구속 상태에서 치료를 받으며 재판을 이어왔다. 신장이식 수술 뒤 급성 거부 반응, 수술에 따른 바이러스 감염 의심 증상, 유전적인 질환인 ‘샤르코마리투스(CMT)’질환 등을 앓는 것으로 전해졌다.

비록 실형 선고를 받았지만 이 회장은 곧바로 수감절차를 밟지는 않는다. 내년 3월21일까지 예정된 구속집행정지 결정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다만 대법원은 이 회장이나 검찰 측의 상고로 심리가 진행되면 기록을 넘겨받은 이후 구속집행정지 만료일 전까지 유지 또는 연장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부도 전 주식처분
도덕성도 꽝인데…

구속집행정지가 연장되지 않을 경우 이 회장은 2년6개월 가운데 지난 2013년 7월1일∼8월20일, 지난해 4월30일∼6월24일까지 두 차례 구금된 일수를 제외한 나머지 형기를 채워야만 한다. 이 회장이 재상고 하더라도 10년 미만 징역형에 대해선 양형 부당을 이유로 대법원에서 다툴 수 없다. 혐의 중 일부에 대해 무죄 판단을 받지 못하는 한 이 회장은 별다른 대응책을 찾기 힘든 셈이다. 

이 회장에 앞서 자금 수백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으로부터 실형 확정 판결을 받았던 최태원 SK그룹 회장 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 역시 재판부로부터 비슷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최 회장 형제 사건을 맡았던 항소심 재판부는 “기업인으로서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 부를 축적해야함에도 일확천금 획득을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물론 윤 회장과 마찬가지로 김승연 한화 회장의 경우 개인적 이익을 위한 범행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전례가 있다. 김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사건을 맡았던 재판부는 “한화그룹 자체의 재무적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우량 계열사 자산이 동원된 것으로 기업주가 회사 자산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전형적 사안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윤 회장과 김 회장의 사례는 시기상으로 격차가 있고 그 사이 오너 일가의 비리를 바라보는 재판부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감안해야 한다.

윤 회장의 감형은 웅진그룹에 청신호나 마찬가지다. 윤 회장의 두 아들을 그룹 전면에 내세우고 본격적인 2세 경영체제로 들어갔지만 아직까지 그룹에는 윤 회장이 필요한 상황이다. 두 아들 모두 30대에 불과한 젊은 나이인 점을 감안하면 윤 회장의 빈자리를 대체하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윤 회장의 경험과 추진력이 절실한 셈이다.

재판부가 나서 웅진그룹 걱정?
비슷한 죄목 전혀 다른 법 잣대

실제로 현재 웅진그룹은 법정관리를 거치며 외형이 크게 줄어들었다. 웅진코웨이(현 코웨이)와 웅진케미칼(도레이케미칼), 웅진식품 등 핵심 계열사 대다수는 팔려나갔다. 윤 회장은 우선 그룹이 적극적으로 진행 중인 화장품사업에 역량을 집중할 전망이다. 과거의 방식을 벗어나 온라인 방문판매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방식을 개발 중이며 수입 위주의 제품에서 자체 브랜드 화장품을 선보이겠다는 전략도 마련했다.


또 2017년부터는 정수기와 공기청정기 등 현재 코웨이가 하고 있는 환경생활가전사업도 추진할 수 있다. 2013년 매각 당시 5년간 겸업을 할 수 없다는 조항을 뒀지만 5년이 지난 시점부터는 이 사업을 재개할 수 있다. 웅진싱크빅을 중심으로 스마트러닝사업에도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총수 부재에 직면한 CJ그룹은 불투명한 미래에 직면했다. 특히 투자비용이 많이 드는 해외 시장 개척이나 대규모 인수합병에서 회장 부재로 인한 차질이 크다. 이는 그룹의 성장동력과 직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실제로 CJ그룹 투자실적은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다. 2012년 3조원에 육박했던 CJ그룹 투자는 지난해 2조원을 밑돌았다. 이 회장 부재 이후 큰 규모의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회 줘야한다”
그룹 재건 가능?

현행법에 따르면 300억원 이상 배임횡령의 양형기준은 징역 5∼8년이고 감형사유에 따라 징역 4∼7년형이 선고된다. 그러나 법의 적용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비슷한 배임혐의라도 ‘국가 경제활동에 기여할 기회를 줘야한다’는 판결과 ‘누구에게나 비슷한 잣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엇갈린다. 물론 법 적용 과정은 끊임없는 고민의 산물이다. 다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사안인가에 대한 물음에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따른다. 감형이 결정된 윤 회장에게 꼬리표처럼 붙는 의문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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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