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펀드 안 내는’ 간큰 회장님 막전막후

낼 돈 없다고?…대통령이 지켜본다

[일요시사 경제팀] 양동주 기자 = 청년층의 경제적 자립 여부는 어느덧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매김했다. 야심차게 출발한 청년희망펀드의 취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단 대통령이 직접 나선 만큼 순조롭게 모금이 이뤄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재벌의 참여를 강요한 까닭이다. 다만 몇몇 재벌 총수는 자발적 참여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인상이 짙다.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니면 간이 큰 걸까.

재벌 총수들이 릴레이식 동참에 나선 청년희망펀드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지난 9월 조성된 펀드다. 청년층 취업 기회 확대를 도모한다는 취지에 맞게 펀드기금은 청년 일자리 창출에 쓰일 예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제안하고 직접 기부를 한 이후 민·관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기부를 받고 있다.

버티는 대기업
안한 곳 상당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가세한 후 재벌총수들의 참여가 가속화됐다. 출범 초기 삼성그룹이 이 회장 명의로 200억원,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사재를 털어 20억원을 내놓았고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150억원 기부 의사를 표명했다. 이어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60억원, 구본무 LG그룹 회장 70억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70억원,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30억원을 각각 기부했다. 이후에도 재벌 총수 및 대기업의 기부행렬은 계속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기부금 액수에 일정한 규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재계 서열 순이다. 그 사이 청년희망펀드 기부금 액수는 1000억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좋든 싫든 간에 기부금을 낸 기업들은 청년희망펀드를 기업 이미지 쇄신용으로 적극 활용하는 양상이다. 특히 면세점 사업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였던 롯데, SK, 신세계, 두산은 비슷한 시기에 모두 청년희망펀드에 기부했다.


이들 뿐만 아니라 기부금을 낸 기업들은 앞다투어 기부금 액수와 자신들의 사회공헌사업을 연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기왕 내야 할 돈이라면 최대한 생색내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 기부금을 안낸 기업도 다수 눈에 띈다. 10대 기업 가운데 현대중공업(8위)이 기부금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고 50대기업까지 범위를 넓히면 약 2/3가 아직까지 요지부동이다. 자발적 참여라는 점에서 어물쩍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선 마당에 기금을 내지 않는다는 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꼴이다. 다만 그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VIP 기부 이어 재벌 총수들 릴레이식 동참
재계 서열 따라 금액 책정…할당제 논란도

청년희망펀드에 기부금을 내지 않은 회사 가운데 일부는 정황상 기부금 액수를 제대로 책정하지 못하거나 내기 애매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물론 이들 상당수가 조만간 기부 대열에 동참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업계에 따르면 KT(11위)는 조만간 청년희망펀드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하고 재원 마련 방식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부액은 기업 규모에 걸맞게 책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지금껏 이어진 청년희망펀드 기부는 재벌 총수가 솔선수범해 사재를 내놓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KT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 KT는 한 해 20조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는 대기업이지만 사주가 따로 없다. 황창규 회장은 자사주를 5000주밖에 보유하지 않은 전문 경영인이다. 올해 3분기까지 10억원이 넘는 급여를 받았지만 재벌 총수에 비하면 재산이 현저히 적다.

만약 황 회장이 다른 재벌 총수처럼 혼자서 수십억원을 기부하려면 올해 연봉을 전부 내놔도 부족하다. 결국 KT가 회사 규모에 걸맞게 기부액을 책정한다면 임원들의 부담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내놓을 액수
눈치전 팽팽

기부금은 둘째 문제고 재벌 총수를 둘러싼 각종 악재를 처리하는 것만 해도 정신없는 기업도 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은 회사 자금 횡령한 혐의 등으로 지난 5월 구속 기소된 상태다. 매주 금요일마다 검찰과 장 회장 측 변호인이 위법 여부를 놓고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것만 해도 바빴다.
 

물론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이재현 CJ그룹(14위) 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24위) 회장은 이미 기부금을 내놨다. CJ그룹은 이재현 회장과 임원진의 이름으로 청년희망펀드에 25억원을 책정했고 효성그룹은 조석래 회장 및 임원진의 이름으로 20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1600억원대 조세포탈·횡령·배임 혐의로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 받은 전력이 있고 조석래 회장은 조세포탈 혐의 등의 혐으로 검찰로부터 징역 10년에 벌금 3000억원을 구형받은 상태다. 다만 동국제강은 이들보다 회사 사정이 더 나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극도로 나빠진 회사 사정상 기부금을 선뜻 내기 힘든 총수와 기업들도 제법 보인다. 대우조선해양(16위)은 얼마전 산업은행의 추가 자금 지원이 결정되고 나서야 겨우 기사회생했고 대우그룹 공중분해 이후 수차례 매물로 나온 대우건설(25위) 역시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금호아시아나그룹(17위)은 박삼구 회장이 이제야 회사를 수습하고 나선 상황이고 동부그룹(20위)은 최근 5년간 10개 기업을 인수합병 했지만 이 중 8곳이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는 등 한창 그룹 재편에 바쁜데다 김준기 회장은 자금 한 푼이 아쉬운 처지다.

경영진이 외국 인사거나 혹은 외국계인 기업들도 청년희망펀드에 무반응이다. 국내 기업문화가 제대로 반영되기 힘들다는 핑계가 그나마 먹힐만하다. S-OIL(26위), 한국GM(36위) 등 외국계 회사들은 아직까지 별다른 기부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얼마전 사모펀드에 인수된 홈플러스(37위)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총수와 기업이 한 몸으로 움직이는 일반적인 국내 재벌기업 형태와 조금 차이가 있다.

대림산업(18위), 부영그룹(19위)은 기부금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그간 활동이 일종의 가림막이다. 대림산업의 경우 이준용 명예회장이 얼마 전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에 전 재산 200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사회공헌사업에 힘쓰고 있다. 이 명예회장은 지난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폭발사고 때도 피해 복구와 유가족 성금으로 당시 재계에서 가장 많은 20억원을 기탁 한 바 있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역시 연세대학교 기숙사 기증을 비롯해 지난 8월 건국대에 80억원 기부 등 사회공헌사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청년희망펀드에 아직 기금을 내놓지 않고도 나름의 이유로 이리저리 빠져 나갈 구멍을 마련해놓은 기업과 총수들이 상당수다. 별다른 이유 없이 기부금 행렬에 동참하지 않은 기업도 여럿 된다.

자발적 아닌
사실상 반강제

흥미로운 점은 범현대가에 뿌리를 둔 기업들의 참여가 유독 저조하다는 사실이다. 펀드 설립 초기에 기부금을 내놓은 현대자동차그룹과 30억원을 기부하기로 한 현대백화점그룹을 제외한 현대중공업그룹(8위), 현대그룹(21위), KCC그룹(28위), 한라그룹(33위), 현대산업개발(41위) 등 50위권에 포함된 범현대가 기업 상다수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그나마 현대중공업은 대주주인 정몽준 이사장이 경영에서 손을 뗐다는 이유라도 있지만 다른 곳들은 총수가 직간접적으로 회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외에도 OCI(23위)를 비롯해 30위 내 몇몇 기업들도 청년희망펀드 기부에 동참하지 않은 상황이다. 한술 더 떠 50위까지 규모를 넓히면 참여한 기업의 비율은 더욱 줄어든다. 어쩌면 자신들 앞선에서 기부금을 내지 않은 곳 많은 만큼 일종의 면죄부가 쥐어졌다고 볼 수 도 있다. 물론 자발적인 참여인 만큼 표면상 기부금을 내지 않아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건 겉보기에 국한될 뿐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청년희망펀드가 재벌기업 사이에 할당제쯤으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얼마?’아직 고민 중인 회장
‘강제로 못내’무시한 회장도


펀드 출범 초기엔 사회 지도층, 공직자, 일반 국민의 자발적 참여로 기금을 마련한다는 취지였다. 지난 9월 황교안 국무총리는 “삼성에 2000억원을 내라고 하고 마찬가지로 다른 기업에 돈을 내라고 하면 1조원을 모을 수 있겠지만 기업이 스스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노력에 제한이 된다”며 기업 기부는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기대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지금은 준강제적인 모금으로 변질된 모습마저 보여준다. 좋은 취지와 별개로 청년희망펀드는 기업의 입장에서 얼핏 ‘울며 겨자 먹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최근에는 정부가 청년희망펀드 기부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에 기부액 규모와 참여 시기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불거졌다.
 

청년희망펀드는 이런 배경 탓에 진정성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그룹 총수의 기부행렬이 청년들의 실업의 아픔을 헤아린 기부가 아닌 마지못해 하는 기부 아니냐는 것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돈을 내고도 찜찜한 상황이 됐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2000만원과 매달 월급의 20%씩 기부하는 청년희망펀드의 ‘1호 가입자’이지만 이달 중순까지 재벌총수의 참여가 있기 전까지 기부액은 60억원에 그쳤다.

이렇게 되자 청년층을 위한 기부가 아닌 정부의 눈치보기에 불과하다는 비아냥마저 나온다. 대통령이 앞장선 상황에서 눈치껏 기부금을 내는 게 차라리 속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 아무리 재벌 총수라도 약자에 속한다. 일부 기업들은 정부 인허가 사업이 걸려 있거나 총수와 기업 핵심 인사들이 수사 명단에 포함된 상황이다.

“낼까? 말까?
내는 게 속편해”


결국 알면서도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있는 재벌기업 총수들이 시기를 봐서 기부 행렬에 동참할 거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치 없는 총수 혹은 기업으로 비춰지는 것보다 차라리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는 게 속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지금껏 자발적으로 사회공헌사업에 충실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추가로 좋은 일에 동참한다고 봐야지 별수 있겠나”며 “청년희망펀드가 어떤 식으로 쓰일지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냥 있기도 애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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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