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여있는’ 조석래·이재현 역할론 막전막후

회장님에 기회를…무르익는 석방 분위기

[일요시사 경제팀] 양동주 기자 = 경제인 사면은 언제나 민감한 사안이다. 그들이 취한 엄청난 폭리 규모는 서민들이 평생을 일해도 모으기 힘든 천문학적인 액수가 다반사다. 그만큼 반대 여론이 거세다. 다만 이들에게 무작정 법의 잣대를 내세우기란 그리 쉽지 않다. 경우에 따라 이들의 허물을 덮어줘야 할 필요성마저 부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잡음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특별사면은 특정 범죄인에 대한 형벌 집행을 면제하거나 유죄선고의 효력을 상실시키는 대통령의 조치를 뜻한다. 역대 대통령들은 ‘국민 화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사면을 단행했다. 주로 연말·연초나 국경일, 석가탄신일, 성탄절 등 특정 계기가 있을 때마다 특별사면을 해왔던 게 관례. 다만 특별사면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아 최근에는 횟수가 이전보다 현격히 줄어든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면은 일종의 필요악으로 비춰지곤 한다. 일단 경제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법의 심판대에 오른 기업 총수들의 향후 거취에 대한 추측이 벌써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건강 안좋고
나이도 많아

지난 9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및 피고인들의 조세포탈 혐의 등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조 회장에게 징역 10년에 벌금 3000억원을 구형했다. 또한 조현준 사장에게는 징역 5년에 벌금 150억원, 이상운 부회장에게는 징역 6년과 벌금 2500억원을 구형했다. 앞서 조 회장은 분식회계 5010억원, 탈세 1506억원, 횡령 690억원, 배임 233억원, 위법 배당 500억원 등 총 7939억원의 기업 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지난해 1월 기소됐다.

검찰은 조 회장이 가짜 기계장치, 해외 페이퍼컴퍼니 등을 통해 납세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대한민국 조세권을 무력화했다고 보고 있다. 효성의 대주주라는 점을 이용해 회사 자금을 개인적 용도로 유용하고 회사를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조 회장의 행동을 단순히 법적 잣대로 처리하기에 애매하다고 말하고 있다. IMF 당시 효성은 누적된 부실자산으로 생존의 기로에 섰지만 일부 계열사를 정리하는 데 실패했다. 정부와 금융권에서 정리를 반대한 까닭이다. 대신 그룹 내 우량계열사와 합병해 부실을 떠안아야 했다.

재계 관계자는 “IMF 당시 부실 계열사 정리를 하지 못한 효성의 속사정에는 외부의 압박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자체적으로 위기를 타개하다보니 어려움이 가중된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소재 부문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효성그룹의 위상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조석래 회장의 선고는 내년 1월에 있을 예정이지만 형량이 확정되더라도 수감생활을 하기는 힘들 전망이다. 조석래 회장은 2010년 담낭암이 발생해 수술을 한 적이 있다. 이후 복귀까지는 약 3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여기에 더해 최근 부정맥과 전립선암까지 발견돼 형 집행정지를 신청할 가능성이 높다.

조만간 판결 예고…집유 가능성 높아
‘필요하다면’ 바로 사면 필요성도 제기

효성의 변호인단은 “조 회장이 담낭암에 전립선암까지 추가로 발병하면서 건강이 좋지 않고 그동안 한국 경제 발전에도 기여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역시 비슷한 처지다. 지난 10일 서울고법에서는 1600억원대 조세포탈·횡령·배임 혐의로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 받은 이재현 회장의 파기환송심 첫 공판이 열렸다. 이날 검찰은 2심과 같은 징역 5년에 벌금 1100억원을 구형했다. 서울고법 형사12부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 이 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법정으로 향했다.
 

건강문제로 구속집행정지 중인 이 회장은 지난해 9월 법정에 선 뒤 14개월만에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1990년대 중·후반 비자금 1600여억원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 2013년 7월 구속기소된 이 회장은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2심 재판부는 원심에서 횡령으로 인정한 600억원을 무죄로 판단해 징역 3년으로 감형했다.


대법원은 이 회장에게 2심까지 배임 혐의에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법)’을 적용해왔지만 “배임에 따른 이득액을 구체적으로 산정할 수 없다”고 판단해 형법을 적용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형법상 배임죄는 금액에 관계없이 10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특경법에 따른 배임죄는 5억∼50억원 미만일 경우 3년 이상의 유기징역,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등에 처해진다. 이 회장의 배임 혐의 액수는 323억원이다. 이 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범죄 정황이 드러난 이상 조 회장과 이 회장에게 무죄가 선고될 확률은 거의 없다. 다만 집행유예로 풀려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문제는 집행유예로 끝나더라도 효성그룹과 CJ그룹이 입는 타격이 상당히 클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되자 특별사면이 이뤄질 경우 두 사람이 명단에 포함될 수 있다는 주장이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

통상 특별사면을 앞둔 시점이 되면 어떤 인물이 사면 명단에 이름을 올릴지 관심이 집중된다. 특히 대기업 총수를 비롯한 경제인들은 특별사면이 이뤄질 때마다 요주의 대상이었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8월 행해진 광복절 특별사면에서도 대기업 총수 일부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엄벌이냐 선처냐
난처한 회장님들

지난 7월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살리고 국가 발전과 국민 대통합을 이루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 및 범위에 대한 검토를 지시한 바 있다.
이후 법무부는 의견수렴을 거쳐 지난 8월 사면심사위원회 회의를 열고 사면 기준 및 대상자 명단을 정리했다. 다만 관심을 모았던 재벌 총수 사면 폭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 특사 명단 포함 여부를 두고 이름이 오르내린 재계 인사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필두로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 집행유예 중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이었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을 제외한 대다수는 특사에 포함되지 못했다.
 

재계에서 특별사면에 민감한 건 그만큼 재벌 총수 사면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SK그룹이 대표적이다.

최태원 회장 특별사면 소식이 전해진 8월13일 SK그룹 관련주들은 일제히 뛰어올랐다. SK이노베이션(6%), SK하이닉스(3%), SK(2%) 등 당일 SK관련주 가운데 SK텔레콤(-1.38%)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 주가가 올랐다. 무엇보다 최 회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미뤄둔 대규모 투자와 경영공백 우려감 등이 일거에 날아간 까닭이다.

SK그룹 관련주들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큰 결단이 필요한 대규모 인수합병과 글로벌 진출 등 굵직한 경영 의사 판단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관측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최 회장이 복역 중이던 2년7개월간 M&A 시장에서 번번이 쓴맛을 봐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차이다.

두 그룹이 흔들리면 경제가 휘청
죄는 미워도…대내외 역할론 부상

반면 김승연 회장의 사면을 내심 기대했던 한화그룹은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앞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 회장이 사실상 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지만 완전한 경영복귀로 해석하기엔 한계가 따른다. 현재 김 회장은 공식적인 대표권이 없으며 해외출장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룹 차원에서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해외 사업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크다. 이라크 신도시 개발 프로젝트를 비롯해 북미 태양광 시장 진출, 국내외 태양광 셀 생산 구축 등 해외에서 굵직한 사업을 벌이는 만큼 아쉬움은 배가 된다. 한발 더 나아가 특별사면의 영향력은 업계 전반의 분위기마저 바꿔놓고 있다.

광복 70주년 특사는 4대강, 호남고속철사업 등 입찰담합 대형 건설사에 부과된 관급공사 입찰참가제한 등 행정처분마저 해제했다. 행정처분 사면 조치에 해당되는 건설사는 78곳에 이르렀다. 현대건설, 삼성물산 등 시공능력평가 30위 내 업체가 26곳, 100위 내 업체가 53곳이다.

이 조치로 공정위에서 이미 입찰담합으로 적발돼 관급공사 입찰참가제한을 받은 건설사들에 내려진 영업정지, 업무정지, 자격정지, 경고 처분이 일순간 해제됐다. 또 현재 공정위의 담합 조사가 진행 중이거나 조사가 진행될 예정인 사업에 대해서도 특별조치 이후 일정기간 내에 담합사실을 자진신고할 경우 입찰참가제한을 하지 않기로 했다.

건설업계에서는 사면으로 그동안 국내외 사회간접자본(SOC)시장에서 위축됐던 국내 건설사들의 위상이 다시 올라갈 수 있게 됐다고 안도하고 있다. 무엇보다 해외경쟁사들의 마타도어로 수주에 어려움을 겪는 해외시장에서 우리 업체들이 받는 불이익은 크게 줄 것으로 보인다.

특사 한다면…
즉각적인 효과

건설업계 관계자는 “해외 프로젝트 수주경쟁에서 중국 등 다른 건설사들이 한국기업의 입찰제한 처분 사실을 발주처에 제보해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속출했다”며 “사면 덕택에 수주에 숨통이 트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물론 내년 초 특별사면이 이뤄질 가능성을 벌써부터 언급하기란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앞서 광복절에 특별사면이 있었던 만큼 내년 초 특별사면이 또 다시 행해지기란 힘들다는 게 주된 요지이다.
 


실제로 대다수 사람들은 오는 2017년 대선 직후 성탄절 또는 2018년 신년, 2018년 차기 새통령 취임 등을 계기로 특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설사 특사가 이뤄진다 해도 법정 형기를 마치지 않은 기업인까지 포함 시킬지는 미지수이다. 재벌 스스로 윤리경영을 강화하고 기업이미지를 쇄신하려는 노력이 제대로 실행되느냐 역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은 취임 후 특별사면을 상당히 자제해왔다. 김영삼(9차례), 김대중(8차례), 노무현(8차례), 이명박(7차례) 등 전임 대통령들이 10차례 가까이 특별사면을 시행한 것과 달리 박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특별사면을 포함하더라도 단 2번에 그쳤다. 무분별한 특별사면을 시행하지 않겠다고 대선 당시 언급한 내용을 지금까지는 충실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 사면이 이뤄지더라도 조 회장과 이 회장이 명단에 포함되리란 법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음에 휩싸인 이들에 대한 사면의 가능성이 언급되는 것은 그만큼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복절 특별사면이 결정될 즈음 여당은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경제인 사면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역시 “국민의 삶이 힘든 시점에서 국민대통합과 경제회복을 위해 매우 시의 적절한 결정”이라면서 “국가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며 특사의 긍정적인 영향을 언급한 바 있다.

특별사면이 결정되더라도 경제인 포함 여부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다만 이전부터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대폭적인 사면이 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여당 측이 누누이 밝혀왔던 점은 조 회장과 이 회장에게 한 가닥 희망의 끈이나 다름없다.

결과는 언제쯤?
빠르면 내년 초

올해 3%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사실상 물 건너간 가운데 내년 전망 역시 밝지 않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3%대로 예측했지만 대다수 국내외 경제기관들은 전망치를 내리거나 2%대 성장률을 예상하고 있다.

결국 현재 처한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의 역량이 극대화되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욱이 서민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정부의 의중이 명확히 부각되기 위해서라도 기업의 현실을 일정 부분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밉던 곱던 간에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작정 간과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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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