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경제팀] 양동주 기자 = 부정부패로 얼룩진 국제축구연맹(FIFA)의 내부 비리가 만천하게 공개되면서 철권통치를 자행하던 블래터 회장이 물러났다. 그 사이 FIFA 차기 회장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던 정몽준은 전임 회장의 덫에 걸려 원치 않게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생각지 못한 전개가 시작되고 있다. 최악으로 내몰린 줄 알았던 정몽준에게 새로운 기회가 부여될 가능성마저 점쳐진다.
지난 8일 FIFA는 5년 전 부회장의 지위를 이용해 한국의 월드컵 유치활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정몽준 FIFA 명예부회장에게 자격정지 6년을 내렸다. 이로써 오는 26일 이전에 회장 후보에 등록하려던 정몽준의 계획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 차기 FIFA 대권을 노리던 정몽준의 꿈이 깨진 순간이다.
연이은 악재
비록 FIFA 징계와 관련해 스포츠중재재판소 제소 등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을 천명했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해결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1994년 부회장직을 시작으로 FIFA와 인연을 맺은 정몽준은 2011년 부회장직에 낙선하기까지 17년 간 FIFA에서 제프 블래터의 반대 세력으로 활동했다. 그 사이 줄기차게 FIFA 개혁을 요구하면서 ‘반블래터’ 세력의 주축으로 손꼽혔다.
정몽준에 대한 징계가 발표되자 국내에서는 정몽준과 대립각을 세웠던 블라터 회장의 정치적 음모가 개입됐다는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실제로 블래터 전 회장의 측근이 다수 포진한 FIFA윤리위원회는 ‘블래터의 살인청부업자’라 불릴 만큼 그의 반대파들을 축출하는데 앞장서온 게 사실이다.
문제는 정몽준을 둘러싼 악재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정몽준은 안팎으로 내홍에 휩싸인 상황이다. 특히 정몽준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 내부에서 그의 행보에 대한 반감이 확산된 분위기다.
회사가 하청업체에 지급하는 기성금 삭감으로 ‘먹튀 폐업’을 유도하는 등 그룹 내 구조적 문제는 등한시하면서 비리 등 부패 문제가 불거진 국제축구연맹을 개혁하겠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지난달 22일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스위스 원정투쟁단을 구성해 정몽준 대주주가 국제축구연맹 회장 후보로 나설 자격이 없음을 폭로할 것”이라며 “10월18일 출국해 국제노동기구(ILO)와 대형선주사 엠에스시(MSC)가 위치한 제네바와 국제축구연맹 본부가 위치한 취리히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비록 자격정지 6년 결정으로 이 계획은 취소됐지만 정몽준의 입장에서는 꽤나 골치 아픈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이 실적 부진을 거듭하는 상황도 정몽준에게 악재이긴 마찬가지다. 안살림은 내팽개친 채 잿밥에만 골몰한다는 비아냥이 쏟아진 것도 이 무렵이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은 최근 4년간 매출총이익이 2011년 6조9385억원, 2012년 4조6532억원, 2013년 3조2551억원으로 뚜렷한 감소세를 나타내다 지난해 7170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그 사이 자산총액은 31조9994억원으로 감소했고 결국 올해 초 열린 제41기 주주총회에서는 대규모 적자의 영향으로 배당을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지난 8월 한국신용평가는 현대중공업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AA-(안정적)'에서 'A+(부정적)'로 떨어뜨렸다. 예상 범위를 웃도는 손실을 기록했고 향후 수익구조 개선의 불확실성이 증대된다는 것이 하향 이유였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경영 목표로 매출 24조3259억원, 수주 229억5000만달러를 제시했지만 이마저도 그리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블래터 음모’ 멀어지는 FIFA 대권
국내 여론 반등…생각지 못한 반전
게다가 노조와의 임급협상이 지연될수록 정몽준에 대한 성토는 커지고 있다. 노조의 올해 임협 요구안은 ▲임금인상 요구액 12만7560원 ▲직무환경수당 100% 인상 ▲고정 성과금 250% 이상 보장 ▲노후연금 현실화 ▲사내근로복지기금 출연 ▲통상임금 1심 판결결과 적용 ▲임금·직급체계 및 근무형태 개선 노사 공동위원회 구성과 내년 6월1일부터 시행 ▲성과연봉제 폐지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처우개선 등이다. 아직까지 회사와 뚜렷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계에서도 정몽준은 차츰 설자리를 잃어가는 양상이었다. 한 때 월드컵 개최 1등공신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대선에 참가할 만큼 정몽준은 정치권에서 거물로 통했다. 울산과 서울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냈고 한나라당 대표도 겸임했다.
지난해 6·4지방선거에서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도전장을 던질 수 있었던 것도 그이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아들의 부적절한 언행 등이 논란으로 번지면서 결국 고배를 마셨고 이후 정계에서 서서히 자신의 입지를 잃어간다.
이처럼 정몽준을 둘러싼 복합적인 악재는 FIFA 회장 입성이 사실상 힘들어진 이 시점에서 정몽준을 진퇴양난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최근 의외의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정몽준이 FIFA로부터 자격정지를 받은 소식이 전해지자 대중의 관심에서 한 발 떨어져 있던 정몽준에게 긍정적인 시선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동정론도 상당수 껴있지만 최악의 순간 새로운 돌파구가 열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불의에 항거하는 투사의 이미지마저 덧칠해졌다.
그동안 정몽준은 ‘금수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를 향한 금수저라는 인식은 커다란 장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과거 교통카드 논란에서부터 아들의 부적절한 언행에 이르기까지 서민의 입장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비아냥이 계속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엔 공교롭게도 그의 출신마저 긍정적인 면모로 비치고 있다. 일단 돈이 연루된 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핵심이다.
실제로 정몽준은 지금껏 금전적인 문제로 별다른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았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만큼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사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노출된 기나긴 시간 동안 금전적인 비리로 잡음을 만들지 않았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FIFA 내부에서 개혁세력으로 꼽힌 것도 어쩌면 그의 행적과 연관된다. 여기에 때마침 FIFA 내부 비리가 한꺼번에 터지면서 위력이 더해진 셈이다.
이렇게 되자 최근 정몽준의 대중적인 입지는 다시 올라가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는 여야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주 주간집계와 동일한 21.5%로 1위,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0.4%p 상승한 19.9%로 2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점은 정몽준의 이름이 여전히 순위권에서 등락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몽준 에 대한 선호도는 약 3.0% 수준. 한창 정계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부 거물급 정치인들과 엇비슷하다. 홍준표 경남지사가,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남경필 경기지사 등보다 오히려 높은 수치다.
탈출구 열리나
성공한 사업가이자 정치인, 그리고 월드컵의 기적을 이끌어낸 장본인. 정몽준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수사어구다. 한 마디로 거칠 것 없이 잘 나가던 사람이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최근 몇 해는 정몽준에게 악재의 연속이었다. 정계에서 차츰 멀어졌고 자신이 대주주인 회사의 수익은 곤두박질쳤다. 물론 결정타는 FIFA의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러나 미묘하게 변해버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또 다른 반전을 예고한다. 작금의 상황에서 정몽준은 어쩌면 희미하게나마 미소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