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판을 바라보면 나오느니 한숨밖에 없다. 아사리판도 이럴 수는 없을 정도다. 대통령을 포함하여 여야 가리지 않고 대혼란 상태에 빠져 있는 듯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판이 살아야 이 나라가 그나마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현대 정치사에서 정치인의 표본을 보였던 홍익표 선생을 소개해본다. 물론 정치꾼들에게 그 분을 본받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작금의 정치판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고 또 그들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그냥 우리 정치사에도 이런 분이 있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알아주었으면 하는 차원이다.
우연히 유항(柳巷 : 고려 말 정치가요 사상가였던 한수의 호) 사상 연구원 송암(松巖) 한익수 대표께서 집필하신 <인의(仁義)의 정치지도자 우연 홍익표(于淵 洪翼杓)선생>을 읽어보았다.
현대인에게는 낯설지만 우연 홍익표 선생은 책 제목에 실려 있듯이 인의의 정치지도자로, 광복 이후 제헌국회에서 헌법 기초위원을 역임하셨고 6선 국회의원을 지내신 분이다.
한국의 정치인으로는 너무나 진중하고 과묵하셨던 분이었기에 낯설게 느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면정권 시절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셨을 때 그분의 부인이 남편이 아닌 거주 지역의 경찰서장으로부터 임명 사실을 알 정도였다.
그분이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셨을 때의 일화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구파와 장면 총리의 신파 간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점으로 그때 행해진 조각에 대해 구파와 소장층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서면서 분당의 위기까지 몰렸었다. 장관을 임명하는 과정에 구파와 소장층이 배제되고 너무 신파에 쏠렸다는 의미였다. 그에 즈음하자 우연 선생은 당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곧바로 사표를 던지고 또 자신의 후임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셨다.
그뿐만 아니었다. 5·16혁명(필자는 5·16에 대해 한국어로는 혁명, 외래어로는 쿠데타라 명명함) 이후 새로운 권력에서 그분의 진정을 알고 정성을 다해 스카우트하려 시도했으나 당신의 뿌리를 버릴 수 없다며 야당을 고수했고, 사재를 털어 지역사회에 소방기구를 기증하는 등 ‘나’가 아닌 ‘우리’, 위민을 몸소 실천하셨다.
하여 박정희정권 시절인 1976년 그분이 무일푼으로 타계하시자 여야가 합심하여 사회장으로 모셨고, 또한 그분을 기리기 위해 김대중정권 시절 후배정치인들이 기념관을 세웠다. 경기도 청평을 가기 전 대성리 우탄골에 아담하게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이 바로 ‘우연 홍익표 선생 기념관’이다.
여하튼 그 책자에 흥미로운 글귀가 있어 인용해본다. 송암 선생과 우연 선생 간에 바둑을 두면서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한 군, 바둑에 공피고아(攻彼顧我)란 경구가 있네. 자네 한문 공부했다니 이를 풀어보게.”
“글자 풀이대로라면 상대를 치기 전에 나를 돌아보라는 말이지요.”
“그러이, 세상일이 다 그렇듯 바둑에서 가장 잊어서는 안 되는 덕목이라네. 내 욕심을 상대가 먼저 눈치 채고 짐짓 모른 체 하다가 상대가 조금 방심하는 듯하면 자기도 모르게 한 귀퉁이가 함몰되는 것이지.”
국민들은 모두 알고 있으니 정치판 인간들 똑바로 하라는, 그러지 않을 경우 한방에 날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모두에서 말한 것처럼 현 정치판 인사들이 절대로 관심 기울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오늘 우연 선생을 생각하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작금 정치판 인간들이 이 세상 마감할 때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말이다. 혹여 시중에 떠도는 우스갯소리, ‘한강에 국회의원과 거지가 빠져서 허우적대면 한강물이 오염될까봐 국회의원 먼저 건진다’는 즉, ‘대한민국 오염되니 매장도 하지 말라’하지 않을까.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