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징크스> ‘진도의 저주’ 내막

품으면 사건사고 펑펑 ‘도미노 잔혹사’

[일요시사 경제팀] 김성수 기자 = 재계에 흉흉한 괴담이 돌고 있다. 이른바 ‘진도모피의 저주’. 이 소문은 호사가들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과연 어떤 내용일까. 그 실체를 파헤쳐봤다.

 
‘사채 괴담, 사정 괴담, 사옥 괴담, M&A 괴담….’
 
재계가 온갖 괴담으로 뒤숭숭하다. 안 그래도 경영난을 겪는 기업으로선 소소한 입방아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정국이 혼란스럽고 검찰발 사정이 한창이라 더욱 그렇다. 한번 퍼지면 좀처럼 진화되지 않아 심각성을 더한다.

‘인수→위기’
 
진도모피의 저주. 재계 호사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이 괴담은 모피로 유명한 ‘진도’를 인수하면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한마디로 ‘망한다’는 표현이 정확할 수도 있다. 설립 이후 회사를 장악한 점령군이 줄줄이 추락하면서 저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소문이나 괴담은 거의 대부분 출처와 실체가 불분명한 낭설로 끝나기 일쑤다. 진도모피의 저주는 소설 같은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정설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물론 그럴 만한 사례가 근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그 첫 번째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국내 대표 모피브랜드 진도는 고 김성식(1981년 작고) 창업주가 운수업을 하다 1965년 의류공장을 세운 게 모태다. 정식으로 설립된 건 1973년. 외국업체 주문생산만 하다 1980년대 들어 직접 모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엔 모피가 수입금지 품목이었다. 때문에 진도모피는 불티났다. 만드는 족족 팔려 나가 김 창업주 일가는 돈을 긁다시피 했다. 사업도 환경, 건설, 무역, 철강 등으로 늘었다. 진도그룹은 한때 재계서열 50위권에 들기도 했다.
 
김 창업주가 별세한 뒤 그의 아들(영원-영철-영진-영도-영기)들이 공동으로 경영했다. 이들은 각각 진도그룹 회장과 부회장, ㈜진도 대표, 진도물산 대표, 진도산업개발 대표를 맡았다. ‘진도’란 회사 이름은 김 창업주가 영진-영도 형제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재수 없는…’ 흉흉한 소문 돌아
인수한 회사·오너 줄줄이 곤욕  
 
잘나갔던 진도그룹은 1990년대 후반부터 어려워졌다. 무리한 투자가 발목을 잡았다. 결국 1998년 외환위기 때 경영이 악화돼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소유권이 채권단에 넘어간 것. 그룹은 공중분해 됐다. 오너일가는 부실경영의 책임을 지고 모두 퇴진했다.
 
당시 그룹을 이끌던 김영진 전 회장은 철창신세까지 졌다. 대검 중수부 산하 공적자금비리 특별조사단은 2001년 비리 경영인 33명을 적발했다. 이 중 한 명이 김 전 회장이었다. 그는 3500억원대 사기대출과 횡령 등 혐의로 이듬해 구속됐다. 김 전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년에 마가 낀 것 같다”는 얘기를 끝으로 야인으로 돌아갔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진도는 C&그룹(당시 쎄븐마운틴그룹)에 인수됐다. 새 주인은 임병석 회장. 진도모피의 저주, 바로 두 번째 에피소드 주인공이다.
 
목포 해양대를 졸업한 임 회장은 항해사로 일하다가 30세 때인 1990년 단돈 500만원으로 칠산해운을 세웠다. 사업 초기 선박과 화물 중개업으로 돈을 벌어 1995년 해운업에 본격 진출했다. 2002년부터 세양선박, 황해훼리, 필그림해운, 한리버랜드, KC라인, 우방 등을 잇달아 인수해 2조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한때 계열사가 40개가 넘기도 했다.
 
 
‘M&A의 귀재’로 불린 임 회장은 진도를 인수할 때가 최고 전성기였다. C&그룹은 2004년 6월 진도를 1744억원에 인수했다. 진도는 4개월 뒤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법원 승인이 떨어진 날 임 회장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해외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계획”이라며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이날 임 회장은 유난히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는 게 간담회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이도 잠시. 3년이 채 되지 않아 암운이 드리웠다. C&그룹은 2007년 무리한 인수·합병(M&A) 후유증을 겪다 이듬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그룹 전체가 자금난에 빠졌다. 직원들 월급까지 밀릴 정도로 급속도로 무너졌다. 버티다 못한 임 회장은 주요 계열사 매각에 나섰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결국 C&그룹은 사실상 파산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검찰 수사까지 더해졌다. 임 회장은 2010년 10월 대출사기와 횡령, 배임 등 1조원대 경제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됐다. 수사 과정에서 진도의 모피코트를 명절선물 등으로 유력 인사들에게 로비했다는 증언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나중에 임 회장은 진도의 본사 부지를 매각하면서 횡령한 혐의도 드러나 망신을 당했다.
 
기업 몰락 검찰 수사
‘굿이라도 해야 하나∼’
 
임 회장은 1심에서 징역 10년, 2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사건을 돌려보냈고, 서울고법이 다시 징역 5년을 선고한데 이어 2013년 6월 원심을 확정 받았다. 만기출소가 3개월가량 남은 셈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얼마 전 부상했다. 진원지는 임오그룹. 비자금 의혹이 나오면서다. 이는 진도모피의 저주가 불거진 계기가 됐다.
 
두 주인을 잃은 진도는 또 다른 주인을 맞았다. 임오그룹(임오파트너스)은 2009년 2월 진도를 인수했다. 당시 45억원에 매입해 ‘헐값’논란이 일었다. 추후 80억원을 더 투자했지만 ‘거저먹었다’는 뒷말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국내 주방업계 대표주자인 임오그룹은 남대문시장 0.7평 구멍가게로 시작한 임오식 회장이 일궜다. 
 
임 회장은 1970년 맨손으로 주방·가전제품 유통업체인 임오(옛 삼성상회)를 창업해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코렐, 테팔 등 글로벌 주방용품의 국내 판권을 딴 게 발판이 됐다. 수저업체 화인센스, 냉동업체 임오냉동 등을 인수해 몸집을 불렸다. 주방과는 거리가 먼 진도도 그중 하나. 진도는 임오그룹 품에서 재무구조가 크게 안정되면서 마침내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5년 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그야말로 초상집이 따로 없다. 임 회장이 교도소 담벼락을 걷고 있어서다.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는 최근 임 회장의 횡령 혐의를 포착, 그룹 본사와 임 회장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다. 임 회장은 2005년부터 회사 매출액을 부풀리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회사에서 근무한 적 없는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급여를 지급한 것처럼 회계장부를 꾸며 회삿돈 100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명의 이전을 통해 그룹 소유 부동산을 빼돌리고 회계자료를 조작해 세금을 내지 않은 혐의도 받고 있다.
 
임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횡령 사실에 대해 일부 인정했지만 금액엔 차이가 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임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검찰은 지난 10일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지난 15일 법원은 “피의자의 주거가 일정하고 현재까지 수집된 증거자료와 수사상황에 비춰 피의자가 방어권 행사 범위를 넘어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검찰은 보강 수사를 통해 영장을 재청구할 예정이다.

세 가지 에피소드
 
진도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었다. 여러 번 바뀐 주인들이 하나같이 위기에 처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저주란 단어가 그냥 붙은 게 아닌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kimss@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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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