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올해는 광복 69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이면 벌써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지만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고노담화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은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어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일본의 자랑인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 있다. 일요시사가 화제의 책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를 연재한다.
영지 안에서는 영주가 그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주종 관계가 강화되었고, 밖으로는 이웃한 영주들로부터 침략을 받고, 침략도 하면서 영주와 가신 사이에는 공동체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영지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영주와 가신은 한배를 탄 처지가 된 것이다.
자신의 주군이 다른 영주로부터 침략을 받아 멸망하면, 가신인 자신도 죽거나 아니면 낭인으로 전락하고, 식구들 또한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손마저 대대로 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주군이 이웃 영주 공략에 성공하면, 할당받는 자신의 영지는 커지고, 부하 군사도 늘어나고, 하인도 더 많아지면서 생활은 윤택하여진다. 그래서 할당받는 영지가 점점 더 늘어나면 언젠가 작은 영주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책과 녹봉은 대물림되어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리게 된다.
영지의 중요성
사무라이에게 있어 영지는 그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 주는 밥줄이자, 신분을 나타내는 벼슬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갖고 있는 영지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고, 남의 영지는 악착같이 더 빼앗아야 했다. 여기에 사무라이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주군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자손들의 영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주군의 멸망이 곧 자신의 멸망이고, 주군의 번창이 바로 자신의 번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지를 잃어버려도 농부나 상공인으로서 살아갈 수는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목숨만이라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그러나 이 또한 현실에 있어서는 대단히 어려웠던 것 같다. 사무라이에게 있어 영지를 잃는다는 것은, 그것이 침략을 받아 빼앗기든 아니면 영주에게 잘못 보여 몰수당하든, 이것은 단순히 밥줄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지배 계급에서 천민 계급으로 신분이 떨어진다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도 자신만이 아니라 자손 대대로 비참한 처지로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뚜렷한 신분 제도를 유지했다.
바로 ‘사농공상’이라는 신분 제도였다. 무사, 즉 사무라이가 지배 계급이자 귀족 계급이었고, 그 다음이 농부이고,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장사꾼은 가장 낮은 신분으로 여겼다. 엄밀히 얘기하면 ‘사농공상’ 외에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히닌(非人)이라는 계급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시체를 처리하거나 사형장에서 형을 집행하는 일을 했다. 조선시대의 백정과 같은 신분이었다.
사무라이에게는 농부나 상공인들이 갖지 못하는 3가지의 특권이 주어졌다. 첫째는 칼을 지닐 수 있었고, 둘째는 성(姓)을 가질 수 있었으며, 셋째는 농부나 상공인들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것을 다이토(帶刀 : 무사가 도검을 차는 것), 묘지(苗字 : 성씨(姓氏) 등 가문의 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것), 기리스테 고멘(斬捨御免 : 서민을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이 세 가지는 무사의 대표적인 특권이었다.
영지는 곧 사무라이의 목숨
영주가 명령하면 할복까지
성(姓)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가문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고, 농부나 상공인들을 즉결 처분할 수 있다는 것은 농부나 상공인이 불순하다고 여겨지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의 제재나 허가 없이 즉석에서 칼을 뽑아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평민의 처지에서 보면, 사무라이를 대할 때마다 사시나무 떨듯 떨며 비굴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이었다. 언제 어떻게 칼 맞아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 같은 인생으로 평생을 비굴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평민들이 얼마나 파리 같은 목숨으로 살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무사도>라는 책에 있다.
한 상인이 사무라이에게 벼룩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공손히 “벼룩을 잡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 상인의 목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벼룩이란 동물에게나 붙어사는 미물인데, 자신에게 그런 미물이 있다고 함으로써 자신을 동물 취급했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는 농민이든 상공인이든 모든 평민들은 이 같이 참담하고 비굴한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이 신분은 대물림되는 것이었다. 무사의 자손은 무사로서 살아가고, 상공인의 자손은 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성(姓)도 없고, 가문도 없이 그마저도 파리 같은 목숨으로 삶을 구걸하며 대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을 평정하고도 무사로서 최고 직책인 ‘쇼군’이 되지 못하고, ‘간파쿠(關白)’라고 하는 행정대신이 되어 일본을 통치했던 이유도 바로 그가 무사 집안의 자손이 아니라 상인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당시는 엄격한 신분 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사무라이가 농부나 상공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마 조선시대에 양반이 천민으로 떨어져 살아가는 처지보다 훨씬 더했을 것이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신분의 하락이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굶어 죽을지언정 ‘어흠’거리며 양반으로 지내려고 했던 것처럼, 주군과 영지를 잃은 사무라이들도, 농부나 상공인으로 살아가려고 하기보다는 낭인으로 지내면서 이 전쟁터, 저 전쟁터를 기웃거리며 재기를 노렸던 것이다.
주군은 사무라이들에게 있어서 절대자였다. 주군의 신임을 통해서만 입지도 굳힐 수 있었으며, 주군의 번창을 통해서만 보다 큰 영지도 하사받을 수 있고, 부리는 하인과 군사의 수도 늘어나서 생활의 윤택 뿐 아니라, 영주로서 출세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전쟁꾼 사무라이
영주가 싫다고, 주군이 싫다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도 없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가문을 중심으로 무사 세력들이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새로운 주군을 만난다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사회였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중앙 세력인 막부가 없어지면서 각 영지가 하나의 독립된 작은 국가처럼 된 마당에 새로운 곳을 찾아 옮겨간다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영주마다 군사력 강화를 위하여 이미 분에 넘치는 사무라이들을 고용함으로써, 여유 세수입도, 나누어 줄 영지도 없는 처지에서 자체 가신도 아닌 타 영지에서 온 사무라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법도 없고, 규범도 없다. 영주가 절대자가 된 마당에, 영주가 곧 법이자 규범이 된 것이다. 영주가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했다. 죽는 시늉만 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시늉만 했다가는 결국 본인도 죽고, 직책과 영지도 몰수당하고, 그 가족까지 하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죽으라고 할 때 실제로 할복이라도 해서 충성심이라도 있는 척하며 죽어야 할당받은 농지도 유지할 수 있고, 그 아들은 무사로서 계속 일할 수 있으며, 그 부인과 딸은 하녀나 ‘게이샤’로 전락되는 신세라도 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