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속 보이는 '이상한 입찰' 막전막후

‘떼논 당상’ 짜고 치는 일감 몰아주기

[일요시사=경제팀] 이창근 기자 = 경찰청은 지난달 30일부로 조달청을 통해 ‘경찰관서 교환기 교체 사업’에 대한 입찰공고를 게시한 바 있다. 연간 사업비 80억원 규모로 IT관련 계약으로는 작지 않은 건이다. 이 입찰공고가 게재되자마자 IT업계에서는 “이번에도 낙찰 받는 업체는 정해져 있다”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오고 있다. 입찰방식과 채점기준이 모두 2011년부터 3년째 99.5%라는 역대 최고의 낙찰율로 수주한 ‘A업체’를 위한 기준이라는 것. 업계에서는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입찰을 왜 붙이나. 차라리 수의계약을 줘라”며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IPT장비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하면 ‘키폰’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장비다. 키폰은 일반전화선을 이용한 통신수단이고, IPT는 인터넷 회선을 기반으로한 통신수단이다. 키폰이 외부로부터 전화를 착신 받아 해당 부서로 연결시키는 기능을 위주로 한다면, IPT는 인터넷이나 전용망과 같은 데이터네트워크에서 음성신호나 영상신호를 실시간으로 전달시키는 기능을 한다.
 
또한 IPT는 온라인이 기반이기 때문에 각종 부가서비스가 지원된다. 예를 들어 외부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담당자가 자리에 없으면 자동으로 담당자의 휴대폰에 ‘민원인의 전화가 와 있으니 신속히 연결 요망’ 같은 메시지를 띄우거나 바로 휴대폰으로 연결시켜 주는 것도 가능하다. 경찰청 본부에서 전화 한 통으로 전국의 일선 경찰들에게 동시에 지령을 내리고 모니터링까지 할 수 있다. 경찰청 정보화사업의 핵심과제 중 하나다. 
 
해보나 마나 한 입찰
 
이에 경찰청은 2014년도 IPT 사업자 선정을 위한 입찰공고를 냈다. 그런데 이를 둘러싸고 여기저기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경찰청 정보화장비 관련 정책부서가 제시한 입찰방식과 심사기준이 특정업체가 수주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A업체는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의 통신운영사업부가 분사하여 설립한 회사로 국내 양대 IPT 장비제조사인 삼성전자와 에릭슨LG 진영 중 에릭슨LG 쪽에 속하는 업체다.
 
이미 2012년과 2013년에 IPT 계약을 따낸 바 있는 A업체로서는 이번 년도에도 수주가 가장 유력시되는 업체로 꼽히고 있다. ‘기존 시스템 연동조건의 증설사업’과 ‘신규지방경찰청 교체 및 경찰서 교체사업’이 1개의 사업으로 통합발주 됐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신규’와 ‘증설’이 분할발주되지 않는 한 ‘이번 역시 해보나 마나 한 입찰’이라는 말이 돌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삼성전자 진영의 중소협력업체들 입장에서는 이번 입찰 기회가 ‘그림의 떡’이 되고 있다.
 
설사 계약을 따냈다고 해도 그간 A업체가 설치한 에릭슨LG 교환기에 삼성전자 단말기를 장착하려면 프로토콜(테이터 처리체계) 맞춰야 하는데 계약을 뺏긴 업체 측에서 순순히 협력해 줄 턱이 없고, 적절한 협력을 받지 못하면 애써 설치한 교환기를 들어내고 삼성교환기를 새로 투입해야 난맥이 생기기 때문이다.
 
말이 공개입찰이지 삼성전자 진영의 중소업체들은 아예 배제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삼성전자 진영이니, 에릭슨LG 진영이니 하는 것은 중소 IPT 프로그램 개발업체들이 어떤 쪽 교환기의 프로그램을 많이 해봤느냐 하는 것일 뿐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에도 차별 아닌 차별을 받게 된 것이다. 신규와 증설부분을 분리발주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교환기 교체사업 입찰공고에 IPT업계 불만
3년 연속 99.5% 낙찰 받은 특정업체가 예약?
 
분리발주에 대한 주장은 나름 근거가 있다. 작년에 IPT 사업을 분리발주 한 육군의 경우 당초 예산 대비 45%를 절감했고, 절감된 예산을 다른 IT부분에 투입함으로써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한 재원의 효율성을 높인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 혈세를 아끼는 방법이라면 경찰청 역시 분리발주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편, 에릭슨LG 진영의 협력사라고 할지라도 A업체가 아닌 다른 중소IPT업체가 낙찰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경찰청이 이번 입찰공고와 함께 밝힌 평가기준에 따르면 전체 배점 100점 가운데 입찰가격평가에 대한 배점은 10점, 기술능력 평가의 배점은 90점이다.
 

동등한 기술수준이라면 입찰가격이 낮은 업체가 유리해야 마땅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A업체가 그간 99.5%라는 놀라운 낙찰율로 계약을 따낸 것만 봐도 가격 문제는 아닌 것이다. 업계에서는 전체 배점 가운데 90점을 차지하는 ‘기술능력 평가’를 주목하고 있다.
 
이 기술능력 평가는 크게 객관적 평가(20점)와 주관적 평가(70점)로 나뉘어 있다. 입찰에 참여한 업체의 재무상태를 반영한 신용등급 및 업체실적, 투입인력의 기술등급과 경력 등이 객관적 평가 항목이고, 각 시스템의 구축방안과 전략, 경찰서간 지방청 집중 통합 서비스 전략, 시스템 구축방안과 설치계획 및 시스템의 안정성과 확장성 등이 주관적 평가 항목이다.
 
주관적 평가 항목 부분에서는 그간 VoIP 분야의 기술이 상향평준화가 됨으로써 상위랭크 업체 간의 격차는 백지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게 업계의 통설이다. 따라서 낙찰여부를 가리는 핵심은 객관적 평가 부분. 입찰업체가 재무적으로 얼마나 탄탄한가, 그 동안의 실적이나 핵심 기술인력의 등급과 경력 등과 같은 외형적 요소가 성패를 가르는 요소가 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 2~3점만 차이가 나면 아무리 획기적인 기술과 저렴한 가격으로 입찰을 한다 해도 뒤집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가격경쟁력의 배점은 10점에 불과하기도 하고 입찰업체 중 최고가와 최저가를 배제한 평균가격이 낙찰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혜택 업체만 들어와라? 
차라리 수의계약 줘라!”
 
업계에서는 A업체가 최근 3년 이상 계약을 따낸 배경도 바로 이 외형적 경쟁력 때문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업체는 국내 유명 전자회사에서 분사한 이후에도 모기업 산하에 있는 통신사의 기지국 관련 일감을 맡고 있기 때문에 재무 건전성이 좋을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다. A업체와 경쟁관계에 있는 업체들이 “대기업 후광 업은 기업만 입찰하란 얘기냐”고 입을 모으게 된 배경도 이부분이다.
 
실적평가 항목에 대한 평가기준을 보면 년간 수주실적이 70억 이상(A등급)이 5점, 50억 규모(B등급)는 4점, 30억 규모(C등급)면 3점인데, IPT 분야에서 중소업체가 70억 정도의 수주실적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기업의 직간접적인 일감 몰아주기’ 없이는 불가능한 실적이란 게 경쟁업체의 시각이다. 기술인력과 관련한 평가항목 또한 마찬가지다.
 
A업체처럼 IPT관련 엔지니어 외에도 기지국 관련한 엔지니어까지 보유하고 있는 업체는 이력서만 추가로 제출해도 고득점을 얻을 수 있는 구조이다. 업계를 통틀어 객관적 평가에서 만점이 가능한 업체는 A업체뿐이라는 푸념이 퍼지는 배경이다.

가격·기술보다 외형
 
IPT 업계에서는 “최소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다. 신규 물량과 증설물량을 따로 입찰해서 업체 간 경쟁을 통한 예산절감 효과와 더불어 여타 중소기업에게도 기회를 제공해주는 방향으로 개선해 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경찰청 입찰공고에 앞서 한 IPT 업체의 임원은 경찰청 정보화장비정책관을 찾아가 위와 같은 사항을 요청한 바 있으나 ‘분리발주는 행정력의 낭비’라는 당혹스러운 답만 듣고 돌아왔다. “육군이 분리발주를 통해 절감한 예산이 수십억인데 실무자가 그만한 수고도 못하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담당자를 설득하진 못한 상태다.
 

한편, 이 사안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이찬열 의원 측은 “분리발주로 인해 예산을 절감한 사례가 있는데도 행정력 낭비 운운하고 있는 경찰공무원의 자세부터 뜯어고쳐야 할 것”이라며 “추후 예산안에 경찰청 노력 여부를 반영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manchoice@ezy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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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