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금기어로 본 재벌가 비사 - 롯데 ‘사모님’

베일에 싸인 회장댁 마님들

[일요시사=경제1팀] 재벌가 혼맥, 대박 브랜드 비밀, 망해도 잘사는 부자들, 기업 내부거래 등을 시사지 최초로 연속 기획해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일요시사>가 2014년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직원들이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금기어'를 통해 기업 성장의 이면에 숨겨진 '비사'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일반인은 잘 모르는, 기업으로선 숨기고픈 비밀, 이번엔 롯데의 '사모님'이다.

롯데와 일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일본에서 지금의 롯데를 일궜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롯데 일가엔 유독 일본인이 많다. 2대가 모두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이는 '한국기업이냐, 일본기업이냐'란 롯데의 국적 정체성 혼란을 부추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기업 맞아?

'현해탄 사랑'은 7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2년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신 총괄회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도왔다. 신 총괄회장은 1940년 같은 마을에 살던 첫 번째 부인 고 노순화씨와 결혼했다.

당시 18세로 가장이 된 그는 경남 양산 경남도립종축장에 취직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무료한 직장생활을 하던 신 총괄회장은 큰 결단을 내린다. 일본에 갈 생각을 품었다. 이듬해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일본 시모노세키행 연락선에 몸을 실은 그의 주머니엔 달랑 83엔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태어났다. 이를 몰랐던 신 총괄회장은 '시게미쓰 다케오'란 일본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껌으로 대박을 터뜨릴 즈음인 1951년 신 이사장을 홀로 키우던 노씨가 세상을 떠났다. 노씨는 원래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신 총괄회장은 이듬해 당시 일본 외무성 대신의 여동생 다케모리 하츠코씨와 재혼했다. 1954년 신동주 일본롯데 부회장이, 1955년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태어났다. 둘은 각각 '시게미쓰 히로유키' '시게미쓰 아키오'란 일본이름을 갖고 있다. 하츠코씨는 언론 등 외부에 노출된 적이 일절 없다. 신 회장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누나 생모인 노씨의 제사를 꼬박꼬박 챙긴다고 한다.


1948년 일본롯데에 이어 1967년 국내에 들어와 큰 성공을 거둔 신 총괄회장은 며느리도 일본인을 얻었다. 롯데 일가의 국제 혼사는 2세들까지 이어졌다. 일본에 살고 있는 장남 신 부회장은 1992년 재미교포 사업가 조덕만씨의 차녀 은주씨와 결혼했다. 당시 38세 노총각이었던 신 부회장은 일본롯데의 미국법인 롯데USA 지사장으로 일하던 중 현지에서 은주씨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올린 두 사람의 결혼은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돼 큰 화제를 모았다. 다만 취재를 피하기 위해 결혼식 시간을 실제 예식이 열리는 11시보다 1시간 늦춘 12시로 발표했었다. 고 남덕우 전 총리의 주례로 진행된 결혼식은 일체의 외부인사 초청 없이 양가 친척들과 롯데 임원들만 참석했다. 축의금, 화환도 받지 않았다.

2대 걸쳐 일본인과 결혼 "모두 일본 거주"
외부 접촉 끊고 두문불출…툭하면 괴소문

형보다 먼저 결혼한 차남 신 회장은 일본 최고의 명문가 여식을 아내로 맞았다. 그는 1985년 일본의 대형 건설사인 다이세이건설 부회장을 지낸 오고 요시마사씨의 차녀 오고 마나미씨와 혼인했다. 요시마사 가문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귀족가문으로, 일본 귀족학교인 가쿠슈잉(학습원)대학을 졸업한 마나미씨는 한때 일본 황실의 며느리 물망에까지 올랐을 만큼 재원 중 재원이란 평이다. 신 총괄회장이 둘째 며느리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신 부회장의 결혼식이 공개된 것도 화제를 모았지만 신 회장의 5시간이 넘는 일본전통 혼례식 또한 이슈가 됐다.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가 중매를 서고 주례까지 맡았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등 일본 전·현직 고위 관료들이 결혼식에 대거 참석해 한·일 양국 재계 관계자들의 입이 떡 벌어지기도 했다. 신 회장은 한·일 양국의 호적에 오른 채 이중국적자로 국내에서 활동하다 1996년에야 일본 국적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 안주인'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도 있다. 바로 서미경씨다. 미스롯데 출신인 서씨는 신 총괄회장의 '첩'이다. '영원한 샤롯데'이자 '롯데가 별당마님'으로 통하는 서씨는 1977년 미스롯데로 뽑힌 뒤 연예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1980년대 초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얼마 뒤 신 총괄회장의 세 번째 부인으로 나타났다. 둘의 나이 차이는 무려 37살. 큰 이목구비의 서구적인 마스크였던 서씨는 1983년 딸 유미씨를 낳았고, 유미씨는 1988년 신 총괄회장의 호적에 올랐다. 이들 모녀는 롯데 가문에서 철저히 소외되다가 2008년부터 서서히 첩이란 족쇄에서 벗어나 롯데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등 본격 대외 행보를 시작했다.


숨은 여인들

신 총괄회장의 숨겨둔 여인들이었던 만큼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내부적으론 ‘사모님’과 ‘따님’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씨는 그룹 내부에서 곳간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님’으로 통할 정도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신 총괄회장을 보기 위해 롯데호텔을 방문할 때면 직원들이 꼭 ‘사모님’이라 부른다는 게 내부 관계자의 귀띔이다.

유미씨는 신영자-신동주-신동빈 틈에서 롯데 경영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현재 롯데의 중심인 롯데쇼핑 지분(0.1%)과 롯데삼강(0.33%)·코리아세븐(1.40%) 등 지분도 보유하고 있다. 업계는 은둔 중인 서씨와 유미씨가 앞으로 신 총괄회장이 세상을 뜨면 롯데 재산분할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시선을 고정하고 있지만, 정작 그룹 측은 "총수의 집안 일"이라며 애써 모른 척하고 있다.

김성수 기자 <kimss@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베일 싸인 롯데 3세들

롯데 2세 경영은 신동빈(한국)-신동주(일본) 체제로 정리된 지 오래다.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과 유미씨 등 딸들도 한몫씩 챙겼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롯데 3세들은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을 뿐더러 사진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신 이사장은 1남3녀(재영-혜선-선윤-정안)를 뒀다. 이중 재영씨는 롯데 계열사들의 일감으로 운영되는 유니엘, 비엔에프통상 등을 경영 중이다. 세 딸은 SNS인터내셔날, 시네마푸드, 시네마통상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신동빈 회장은 1남2녀(유열-규미-승은)를, 신동주 부회장은 외아들(정훈)만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일본에 살고 있다. 아직 학업 중이라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롯데 계열사 지분도 없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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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