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오락고수 집결지 ‘정인오락실’ 가보니…

마우스? 조이스틱 협객들의 한판 승부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골목에 위치한 정인오락실은 전국구 오락실로 유명해 오락실계의 성지로도 불린다. 정인오락실의 게이머들은 주로 고시생, 학생, 노동자들로 국내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 동전 몇 푼만 있으면 1∼2시간 동안 게임을 이어가는 건 기본. 몇몇 게이머들의 게임 장면은 인터넷방송을 통해 생중계되기도 한다. <일요시사>가 그곳을 찾아가봤다.

노량진에는 각종 학원가 및 고시원이 즐비해 있다.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시생이거나 공시생이다. 이들은 시험준비에 매우 바쁜 하루를 보낸다. 합격을 위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량진에는 시험이 아닌, 다른 경쟁도 존재한다. 바로 오락실 게임 경쟁이다. 세계적인 종합격투기 UFC처럼 치열한 격투가 벌어지는 옥타곤이 노량진 골목에 숨어있다.

과거 전성기를 누렸던 오락실. 요즘은 동네에서도 오락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오락실은 ‘멸종’ 위기다. 특히 PC방의 등장은 이를 가속화했다. 넘쳐나는 PC방에 비해 오락실은 문을 닫고 있는 형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리는 오락실이 있다. 바로 노량진에 위치한 ‘정인오락실’이다.

이곳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오락실계의 ‘성지’로 통한다. 먼 길을 찾아오는 성지 순례객도 있다. 오락실 향수에 젖은 고수 게이머들로 가득찬 정인오락실에 들어가봤다.

향수 부르는
추억의 오락실

오락실 문 앞에는 선물 뽑기, 인형 뽑기, 완력 테스트기, 농구 게임 등이 있었다. 겉모습은 일반 오락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간판에 있는 게임 캐릭터가 이곳의 정체성을 말해줬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사람들로 붐빈다는 것.


파리 날리는 일반 동네오락실과 달리, 이곳의 모습은 매우 활발하고 열정적이었다. 게임할 자리가 없어 서서 구경하는 이들이 많았다.

찬찬히 이들 틈에서 게이머들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조이스틱의 화려한 움직임이 그들의 ‘스킬’을 대변했다. 조이스틱을 잡은 왼손과 버튼을 누르는 오른손은 매우 재빠르게 움직였다. 실력자들이 모여 있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오락실을 한바퀴 쭉 둘러보니 이들이 주로 하는 게임은 ‘킹 오브 파이터, 94∼2002 시리즈’ ‘스트리트 파이터’ ‘철권 시리즈’ 등으로 압축됐다. 다른 게임도 있지만 역시나 주력 게임은 ‘대전 액션게임’이다.

계속 구경을 하던 중, 드디어 자리가 났다. 반대쪽에 앉은 게이머는 매우 작은 체구로 게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킹 오브 파이터즈’ 오락 기계에 미리 준비해둔 동전을 넣고 대결을 신청했다. 하루 종일 오락실에서 놀았던 초등학교 당시 기억을 되살리며 주력 캐릭터 3개를 고르고 게임에 임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힘 한 번 못써보고 캐릭터 하나가 쓰러졌다.

‘오랜만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다시 두 번째 캐릭터로 힘을 써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세 번째 캐릭터까지 처참하게 무너지며, 상대방 캐릭터 하나에 세 캐릭터가 몰살당했다.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게임 패배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노량진 골목에 위치…전국구 최강 오락실
전국서 모인 최고 실력 챔피언급 플레이

자존심을 구긴 채, 아쉬운 마음을 붙잡고 ‘아도겐’으로 유명한 ‘스트리트 파이터’ 기계로 자리를 옮겼다. 구경꾼들이 많아 부담이 컸지만, 이내 동전을 넣고 플레이를 시작했다. 초반에는 나름대로 기술을 써가며 버텨봤지만, 기량 차이가 뚜렷했다. 이렇게 또 패배하며 2패의 전적을 안고 붉어진 얼굴로 구경꾼들 사이로 돌아갔다.

사실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한때 하루 종일 조이스틱을 잡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인오락실 게이머들은 당해낼 수 없었다. 그들의 실력은 ‘최상급’이었다. 구경꾼들이 쉽게 동전을 넣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자리에서 계속 구경만 하고 있던 A씨에게 말을 건넸다. 왜 계속 구경만 하냐고. 그는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다”고 말했다. 패배가 두려운 게 아니냐는 질문에는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면 쪽팔리다”고 일축했다.

멍하니 서서 게임을 지켜보던 A(27)씨는 사실 공무원 준비생이었다. 흔히 ‘공시생’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정인오락실은 공시생들의 스트레스 해소의 장이다. 공시생들은 학원과 독서실에서 찌든 스트레스를 이곳에서 종종 푼다고 한다.

게임마다 다르지만 보통 100원에서 300원이다. 1000원짜리 한 장만 있으면 1시간 버티는 건 일도 아니다. 물론 자신보다 기량이 높은 실력자와 붙었을 때는 말이 달라진다.

현란한 조이스틱
화려한 기술 연발

노량진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고시생, 공시생들만 있는 건 아니다. 교복 차림의 여고생들도 오락실 안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이 주로 하는 게임은 ‘펌프’였다.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춘 화려한 발동작을 볼 수 있었다.

여고생 B(18)양에 따르면 정인오락실은 고등학생들도 많이 찾는 일종의 아지트다. 방과 후 오락실에서 펌프를 하고 노래방 기계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일상이 됐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건전한 행동이라고.

그런데 기자가 오락실에 들어올 때부터 스트리트 파이터 기계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1시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켰다. 오락실 게임 협객임이 분명해 보였다. 목장갑을 끼고 조이스틱을 잡고 있던 그는 갈색 안전화를 신고 남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인상착의를 보아 하니 일용직 노동자였다. 나이도 꽤 많아 보였다.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게임이 끝난 그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쉽지 않았다. 게임을 마친 그는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 주변 게이머들에게 물어보니 오락실에서 꽤나 유명한 고수 중 한 명이었다. 실력과 더불어 매너도 좋다고 전해진다.

정인오락실은 예전 오락실 모습 그대로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유명하다. 추억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차별점도 있다. 실제로 TV에 나오는 유명 게이머들의 게임 장면을 실시간으로 ‘아프리카 TV’를 통해 생중계하고 있다.

생중계 장면은 오락실 좌측 벽에 붙어있는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다. 물론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혹은 스마트폰을 통해 시청이 가능하다. 이 방송 화면은 각종 이벤트 시 유용하게 활용한다고 전해진다. 마니아들은 게임 방송을 꾸준히 시청하며 자신의 실력을 보완하기도 한다.

보통의 오락실의 경우 스틱 게임보다는 리듬 게임이나 슈팅 게임 등 체감형 기계들을 앞으로 뺀다. 반면 정인오락실은 옛 오락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다. 최신 기계들을 구석으로 넣고 고전 스틱 게임을 전면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평일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임 기계 앞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추억의 80∼9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응답하라 1990
20세기 오락실


정인오락실 내 리듬 게임은 단 세 대다. 펌프인 ‘FIESTA EX’와 ‘EZ2DJ’의 구버전인 BE, 신작 AE가 놓여있다. 리듬 게임은 일반 오락실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정인오락실의 사정은 다르다. 오락실계의 효자로 알려진 ‘코인 노래방’은 총 12대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기계가 많았다. 근처 고시생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그래도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역시나 스틱 게임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철권’이다. 정인오락실에는 철권 시리즈가 알차게 들어가 있다. 철권 시리즈의 요금은 300원이다. 단 ‘철권6’의 플레이 요금은 200원이다. 타 오락실에 비해 저렴한 가격을 자랑한다.

가장 많은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건 ‘킹 오브 파이터즈’일 것이다.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 기계 앞에 모여있다. 그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요금은 100원이다.

무려 20년 넘게 오락실계의 왕좌로 군림하고 있는 ‘스트리트 파이터’는 고전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게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게임을 하고 있으면 세월이 멈춘 듯한 느낌마저 받는다. 플레이 요금은 역시나 100원이다.

정인오락실은 노량진동의 고시생, 공시생 및 노동자, 그리고 학생들의 놀이터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격투 게임 마니아들의 성지임과 동시에 삶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끝없는 매치’ 서 있는 구경꾼이 더 많아 
역사 속으로…PC방에 밀려 ‘멸종’ 위기


한국 오락실의 역사는 1980년대 초반 흑백 오락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락실 기계는 나무로 처리돼있었고 흑백 게임이었다. ‘벽돌깨기’와 ‘스페이스 인베이더’ 이 두 게임이 한창 인기였다.

벽돌 깨기는 조이스틱이 아닌 다이얼을 좌우로 돌려서 바를 좌우로 이동시키는 독특한 조작 방식이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흑백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모니터에 노랑, 빨강, 파랑의 셀로판지를 붙이기도 했다.

80년대 초반은 오락실 붐의 시작이었다. 흑백 오락기와 함께 컬러 오락기가 하나둘 늘었기 때문이다. 방구차, 팩맨, 갤러그, 개구리, 엑스리온, 너구리, 뽀빠이, 킹콩, 타잔 등 다양한 게임이 쏟아져 게이머들은 쾌재를 불렀다.

특히 그중에서도 ‘갤러그’는 단연 지존이었다. 특유의 ‘뿅뿅’ 총알 쏘는 소리는 오락실의 트레이드마크 역할을 했다. 유독 갤러그 기계는 여러대 설치될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갤러그는 그 자체가 오락실을 대표했다. 남녀불문 손 쉬운 플레이로 국민게임으로 자리매김했다.

팩맨은 입이 달린 노란색 덩어리가 작은 노란색 덩어리들을 먹고 다니는 게임으로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오락실 게임 중 하나다. 움직일 때 ‘파쿠파쿠’ 소리를 내 ‘파쿠맨’이었고 표기는 ‘Puck man’이었다. 하지만 욕설 같다는 문제가 미국에서 제기돼 ‘Pac man’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방구차는 방구같은 매연을 내뿜어서 쫓아오는 다른 차들을 못 움직이게 만들고 코스상의 깃발들을 모조리 먹는 것이 포인트인 게임이다. 중독성 강한 배경음악으로도 유명하다. 요즘 아이들까지 이 배경음악을 알 정도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퀄리티 높은 그래픽에 다양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게임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에는 너무나 많은 게임이 나와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 그 중에서 특히 ‘버블보블’의 인기는 갤로그 이후 엄청난 바람을 일으켜 새로운 국민게임으로 등극했다.

어느 오락실에 들어가나 버블버블 효과음이 가장 먼저 들려왔다. 원제는 ‘버블보블(Buble Boble)’이지만 한국에서는 ‘보글보글’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후 여러 개의 속편이 나왔지만 최초의 버블보블만한 게임이 없다는 평가가 많다.

한국 오락실의
어제와 오늘

80년대 후반에는 그래픽과 사운드가 더욱 향상됐다. 이 시기의 메이저 게임은 ‘테트리스’였다. 사실 테트리스는 당시 나온 게임들과 비교해 그래픽과 사운드는 별로였지만 중독성 면에서는 최강이었다. 러시아풍의 멜로디도 매력 중 하나였다.

90년대 들어서 더욱 더 화려한 그래픽과 사운드로 무장한 게임들이 나왔다. 대전 격투 액션게임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였다. ‘스트리트파이터2’가 지금의 오락실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트리트파이터2는 87년에 나온 ‘스트리트파이터’의 속편으로 제작됐지만 철저하게 대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방향키와 버튼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다양한 액션은 모든 대전 격투 액션게임의 기초가 됐다. 이후 ‘아랑전설’과 ‘용호의 권’ 등의 대전 격투게임이 잇따라 나왔다.

본격적인 대전 격투 액션게임의 시대는 90년대 중후반에 터졌다. 그리고 ‘킹 오브 파이터즈’와 ‘철권’이 대전 격투게임의 양대산맥으로 자리 잡게 된다. 킹 오브 파이터즈는 ‘94’ 시리즈를 시작으로 인기를 누려 ‘98’ 시리즈로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동전 있으면 1∼2시간 훌쩍
스트레스 날릴 최적의 장소

‘철권’은 한국인 캐릭터의 등장으로 주목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3D 대전 격투게임을 대표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리듬&댄스 게임 시대가 도래했다. ‘비트매니아’라는 게임은 대전 격투게임 일색이던 오락실의 판도를 180도 뒤집었다. 특히 ‘DDR’이 대히트를 치며 국내 오락실은 리듬&댄스 게임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리듬&댄스 게임에 밀려 기존의 게임들은 사라져갔고 리듬&댄스의 시대도 저물었다. 그러면서 오락실 전체가 자연스레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98년, PC게임 ‘스타크래프트’의 등장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불면서 ‘PC방’이 생겼다. PC방은 게임방으로서 오락실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때부터 오락실은 점점 줄어들고 PC방이 급증했다.

현재까지도 많은 게이머들 PC방을 찾는다. ‘온라인 게임’을 ‘e스포츠’라고 부를 만큼 인기가 높다. 그러나 여전히 조이스틱의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늘도 옛 오락실을 추억한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추억의 오락실 게임
‘뿅뿅’ 스마트폰서 부활

추억의 오락실 게임이 스마트폰에서 부활하고 있다. ‘벽돌깨기’ ‘1942’ 등 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임들이 모바일 타이틀로 부활하면서 세대를 뛰어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기존의 게임성을 계승 발전시킨 친숙한 플레이 방식과 다양한 콘텐츠를 결합시켜 남녀노소를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

특히 그래픽은 물론 게임 내에 등장하는 기기들도 당시 실존했던 캐릭터들로, 매우 자세하게 묘사해 신구세대를 모두 만족시키고 있다.

복고 바람 타고 모바일 재탄생

오락실 게임의 간단하고 쉬운 플레이 방식이 모바일 게임에 적용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초기부터 많은 게임들이 오락실 게임의 방식을 차용했다.

‘애니팡’이 대표적이다. 애니팡은 퍼즐게임의 원조인 ‘비주얼드’가 뿌리다.

고전 게임의 원리에 다양한 아이템과 소셜 요소를 집어넣어 현대인의 손맛을 잡는 데 성공했다.

최근에는 아예 고전게임의 IP(지적재산권)를 직접 들여와 게이머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경향도 있다.

한 모바일게임 업체 관계자는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중장년층이 늘면서 과거 그들이 즐겼던 오락실 게임들이 모바일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며 “최근 사회의 복고트랜드와 맞물려 이같은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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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