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신상사' 신상현 회고록 전격 공개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4.01.06 13: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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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시라소니 "이정재 암살계획 짰다"

[일요시사=사회팀] 조폭이 미화되던 시기가 있었다. 조폭 영화가 흥행하고, 조폭을 꿈꾸는 사람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조폭은 그저 깡패일 뿐이다. 최근 붙잡힌 양은이파 전 두목 조양은 역시 실상은 깡패에 불과하다. 이를 확인하듯 주먹계 원로 신상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지금 주먹세계는 돈과 폭력만 있을 뿐 낭만과 가치가 사라졌다." 그가 직접 밝힌 주먹세계의 빛과 그림자는 어떤 모습일까. 




전국구 조폭 시대가 저물었다. 범서방파 전 두목 김태촌(64)의 사망과 칠성파의 와해, 양은이파 전 두목 조양은(64)의 구속 등으로 이른바 '3세대 조폭'들은 역사에서 퇴장했다. 

전국구 조폭
차례로 몰락

지난달 23일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윤재필)는 사기 대출을 받아 수십억원의 대출금을 가로챈 혐의로 조양은을 구속 기소했다. 조양은은 지난 2010년 8월 서울 강남 일대에서 풀살롱 형태의 P유흥주점을 운영하면서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가장한 22명을 내세워 허위선불금 채권을 담보로 제일저축은행으로부터 29억9600만원의 대출금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조양은은 자신의 존재와 범행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영업사장이나 바지사장 명의로 유흥주점을 인수한 뒤 서류작성자, 모집책, 모집총책 등으로 역할을 나눠 사기 대출을 공모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양은은 이렇게 불법 대출 받은 돈을 유흥주점 인수대금이나 운영자금으로 썼으며 자신의 생활비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조양은은 바지사장에게 "사건을 떠안고 가라"며 협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 허위 진술을 강요한 사실도 적발됐다.


앞서 사정당국은 지난 2011년 6월 중국을 거쳐 필리핀으로 도주한 조양은을 지명수배와 함께 인터폴에 적색수배했다. 조양은의 신병을 추적하던 당국은 필리핀 현지 카지노에서 조양은을 붙잡아 2년여 만에 국내로 압송했다.

마지막 낭만협객이 본 주먹세계 빛과 그림자
자서전 <주먹으로 꽃을…> 발간 뒤늦게 확인

그래도 한때는 전국구 조폭으로 불렸던 조양은. 그러나 그는 필리핀 도피생활 동안 거의 잡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전해진다. 카지노 주변의 관광객이나 교민들을 상대로 소위 '삥'을 뜯으며 연명했다는 것이다.

과거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 조직원은 "그 형님 시대가 끝난 지 언제인데 아직도 이름값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또 그는 "칼로 뜬 사람(조양은)은 건달이 아닌 양아치에 불과하다"고 못박았다.

조양은은 우리나라 주먹사에서 회칼을 처음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양은은 지난 1975년 서울지역 최대의 폭력조직인 신상사파를 기습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연장을 사용했다. 훗날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건으로 조양은은 주먹계의 거두가 됐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주먹계의 진짜 보스는 조양은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그의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김태촌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솔직히 나(김태촌)나 조양은이나 무슨 두목이냐. 우리는 평생 교도소나 다니는 실패한 인생이다. 진짜 두목들은 뒤에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건달은 죽고
양아치 남았다


신상사파 전 두목 신상현(82)씨는 김태촌이 인정한 진짜 두목이다. 195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명동을 거점으로 암약했던 신씨는 전국구 보스 '신상사'로 30년 넘게 막후에서 군림했다.

신씨는 1세대 조폭인 김두한, 시라소니(본명 이성순), 이정재 등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때문에 신씨는 소위 말하는 '낭만시대'의 마지막 남은 증인이다.

지난해 신씨는 자신의 회고록인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를 <월간중앙>과 함께 발간했다. 이 책에서 신씨는 어둠의 세계 한 가운데 있던 비화들을 한 보따리 풀어놨다. 신씨가 경험한 주먹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혹은 영화화나 드라마화 된 것)과 어떻게 다를까.

먼저 낭만시대 주먹은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양은이 칼을 사용한 75년을 전후로 조폭들은 빠르게 '양아치화'됐다.

당시 조폭들은 흉기를 사용하는 일을 치욕으로 여겼다. 또 여러 명이 한 명에게 몰매를 가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다구리(몰매)'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조폭들은 격투기를 직접 익혀 자신의 몸을 단련했다. 맨주먹을 무기로 삼을 뿐 특별한 도구나 흉기를 동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직의 보스가 되기 위해선 이른바 '맞짱' 싸움 실력이 필수였다. 신씨는 주로 상대의 턱을 노려 싸움을 재빨리 끝냈다고 한다.

건달은 감옥서도 호의호식
출소 후엔 재벌들과 어울려

1949년 신씨는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1953년 특무부대 상사로 제대했다. 신씨의 암흑가 별명인 '신상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쨌거나 나랏밥을 먹었던 신씨가 남은 반평생을 깡패로 살았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신씨처럼 나름의 배경을 갖춘 조폭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세대 조폭들은 대의와 명분을 중히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구마적(고희경)과 신마적(엄동욱)은 깡패였지만 협객으로 포장됐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대의와 명분을 앞세웠기 때문에 사회적 평가가 박하지 않았다.

명동·종로 등 번화가에서 이득을 챙기던 조폭들은 광복 후 활동 영역을 넓혔다. 상권은 상권대로 관리하고 정치인과 손을 잡았다. 이중 김두한은 좌익 인사를 상대로 한 백색테러로 의회에까지 진출했다.

김두한이 떠난 주먹계는 이화룡, 시라소니 등이 버틴 명동사단과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이 있던 동대문사단으로 양분됐다. 신씨는 같은 시기 주먹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했다.

신씨가 증언한 1950년대의 서울 주먹은 이른바 3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미관을 중심으로 한 김두한파, 명동 시공관을 중심으로 한 명동파, 동대문시장으로 진출한 이정재파가 꼭지점을 이뤘다.

신씨는 이중 이화룡이 만든 대동강동지회 즉 명동파와 교류했다. 하지만 이화룡 밑에서 일한 적은 없다는 것이 신씨의 주장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명동사단과 동대문사단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승만정권 말기에 다툼은 더 심했는데 이들의 전쟁은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동대만사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정재는 경무대 경찰서장인 곽영주를 후견인으로 삼고 ‘장충동테러사건’을 비롯한 각종 정치테러를 주도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그의 심복 유지광과 연예계 황제 임화수는 이정재와 합심해 독보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어찌 보면 이때가 정치 깡패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이승만정권의 총애를 받던 이정재는 4·19혁명으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군사정권에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신씨는 "이정재의 거대한 야망이 화를 불렀다"고 평했다. 이처럼 권력에 기생한 조폭들은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가장 먼저 사회의 희생양이 됐다.

권력에 빌붙은
정권의 희생양

신씨는 1세대 주먹사의 가장 중요한 비화로 '이정재 암살 계획'을 언급했다. 그는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이정재를 제거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워두었지만 실행 직전 이정재와 김두한이 청요리집인 관수동 대관원에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돼 없던 일이 됐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정재가 그때 살해됐다면 전체 주먹계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란 해석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이 없는 법. 자유당의 비호 아래 철권을 누리던 동대문사단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가장 먼저 패망했다. 반면 자유당의 타깃이 됐던 명동파는 군사정권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화룡이 떠난 명동의 새로운 패자는 '신상사'가 됐다.


5·16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민심을 잡기 위해 각지의 깡패를 잡아들였다. 1961년 한 해에만 모두 1만3000여명이 검거됐다. 하지만 검거된 깡패는 감옥에서 호의호식했다. 신씨는 "형무소의 규칙은 돈 앞에 무력했다"고 적었다.

당시 감옥에는 비리와 뇌물이 판쳤다. 깡패들은 돈만 있으면 담배는 물론이고 술을 마시며 호화 수감생활을 했다. 심지어 한 유명 정치깡패는 복역 중 교도소에서 딸을 갖기도 했다. 이 깡패는 교도관을 매수한 뒤 면회실에서 부인과 둘만의 '특별면회'를 했다.

카지노, 섹스…7공자 전성시대
사보이호텔 사건 진짜 내막은?

공권력은 범죄 집단과 결탁했다. 서울에서 생산한 마약을 전국으로 유통하는 데 그 흔한 단속 한 번 없었다. 단속 전 깡패들이 돈을 뭉텅이로 넣어주면 경찰은 그들의 영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채시장이 성장했다. 채무자를 관리할 조폭의 수요도 늘었다. 많은 조폭들은 앉아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신씨는 같은 기간 마약과 사채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돈이 돌던 때라 범죄행위와 거리를 두면서도 자금을 모을 방도가 있었던 것이다. 비교적 금도를 지켰던 신상사파의 전성기는 10년 넘게 이어졌다.

이 시기 신씨는 권력자의 아들, 재벌의 반열에 들었던 기업인 2세와 어울렸다. '7공자'로 불렸던 이들 무리는 돈과 권력, 젊음으로 무장한 무소불위의 집단이었다. 신씨는 당시 7공자를 따르는 무수한 여자가 있었으며, 당대 최고의 미인들이 7공자와 관계를 맺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명동에서 만나 술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워커힐로 이동해 쇼와 카지노, 섹스를 즐겼다.

태광실업 박동명 대표를 비롯해 D산업 창업주의 아들 L씨, S건설 회장의 아들 J씨, P산업 사장 K씨, 양조회사 창업주의 장남 G씨 등이 7공자 중 5인으로 소개됐다. 나머지 2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척관계인 Q씨, 고위공직자의 아들 K씨였다고 신씨는 주장했다.

그리고 미인들은 몸치장에 드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을 상대로 한 술접대에 동원됐다고 한다. 각 유명 요정과 룸싸롱에는 여자 연예인들의 사진과 전화번호가 걸린 앨범이 비치돼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그 앨범을 보고 자신의 파트너를 선택했다고 전해진다.

또 당시 연예계는 스타급 연예인도 연락을 받으면 달려 나가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고름을 짠 조폭들은 되레 승승장구했다. 돈과 여자를 주무를 수 있는 깡패들은 암울한 시대를 맞아 메뚜기처럼 창궐했다.

사람과 돈이 서울에 몰리다보니 지방에 있던 조폭도 차례로 상경했다. 서울 주먹계의 절대 강자였던 신상사파의 아성도 마침내 흔들렸다.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신상사파의 전성기는 신씨가 명동으로 회귀한 10년째에 막을 내렸다.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을 시작으로 3세대 조폭은 마지막 남아 있던 낭만시대 주먹을 대체했다.

사건 당사자인 신씨는 그곳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이어 명동사단은 보복을 위해 사건 주모자인 조창조·정학모·오종철·조양은을 쫓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합의였다. 이 합의로 '공공의 적'이었던 조양은은 음지에서 양지로 돌아왔다. 이후 조양은은 선배들을 넘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다.

깡패는 깡패
낭만은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씨의 합의는 1세대 조폭인 이화룡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는 득이 됐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력을 얻은 조양은과 김태촌은 곧이어 등장한 신군부의 타깃이 됐다. 이들은 그 대가로 상당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반면 신씨는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었다. 또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명동에서의 영향력을 일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깡패는 깡패일 뿐. 정권의 힘 앞에는 무력했다.

신씨는 '범죄와의 전쟁'을 버티지 못하고 주먹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외제차 사업에 뛰어 들었다가 최근에는 모든 사업을 정리한 상황이다. 비교적 평온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신씨는 "지금의 주먹세계는 돈과 폭력만 있을 뿐 낭만과 가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어쩌면 후배인 조양은이 선배인 신상사에게 칼을 들이댄 순간부터 주먹세계의 마지막 낭만은 끝장났는지 모른다. 겉으로만 형님 찾고 의리 찾는 이들의 표리부동한 행동은 끝내 씁쓸함을 자아낸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소문만 무성한 '김태촌 비망록'

지난 2013년 1월 '주먹계 거물' 김태촌씨가 사망했다. 70∼80년대를 주름잡으며 전국구 조폭으로 불린 그는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인 뒤 영원한 어둠 속에 묻혔다.

생전 김씨는 자신의 삶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30년 넘는 감옥생활 동안 김씨는 건강과 세력을 모두 잃었다. 긴 수감생활을 거치며 김씨가 얻은 것은 본인의 인지도뿐이었다.

대개의 조폭은 음지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김씨는 유독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잦았다고 전해진다. '김태촌'이란 이름값을 노린 '하이애나'들은 그가 죽기 전까지 김씨 곁을 맴돌았다.

이런 자신의 삶이 억울했던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어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김씨는 이른바 '김태촌 회고록' 출간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서울대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김씨는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지난 2012년 본지 기자와 만났던 김씨는 "만약 내가 죽으면 일대기 형태로 모든 것을 공개할 생각"이라며 "(비망록을) 지인들을 통해 집필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씨가 병석에서 지난 사건들을 술회하면 지인들이 메모를 해 책으로 엮어내는 형식이다.

그러나 김씨가 약속했던 회고록(또는 비망록)은 그가 죽은 지 1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연예계는 물론 정·재계와 관련한 각종 비화가 담길 것으로 예상됐던 '김태촌 비망록'은 출간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한편 주먹계 원로인 신상현씨는 김씨에 대해 "거칠었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사내다운 면이 있었다"며 "그가 오랜 기간 보스로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신세 진 정치·경제·연예계 인물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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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폴 적색수배’<br> 황하나 근황 포착

[단독] ‘인터폴 적색수배’
황하나 근황 포착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마약 투약 혐의로 인터폴 적색수배를 받은 황하나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지난해 1월31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황씨를 형사 입건했다. 앞서 황씨는 2023년 9월, 영화배우 고 이선균을 협박한 유흥업소 실장 김모씨 등과 함께 내사를 받아왔다. 지난해 2월 과천경찰서는 황하나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간이시약 검사 등을 통해 마약 투약 여부를 확인했다. 수사를 받던 황씨는 돌연 태국으로 출국했다. 실제로 황씨는 지난해 3월 와 전화 통화에서 “지금 태국에 있는데, 아파서 병원에 왔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마약과 성매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추가 혐의가 드러나자 태국에 있는 황씨를 검거하기 위해 인터폴 적색수배와 현지 영사 조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폴 적색수배 중인 황씨는 지난 1년 사이 캄보디아로 이동했다. 유튜브 채널 ‘크라임넷’을 운영하는 제보자 A씨에 따르면 현재 프놈펜 소재 한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한국인 남성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지난해 태국으로 도주한 황씨는 자동차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는 현지인 N씨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있다. N씨는 태국 상류층을 뜻하는 ‘하이소(High-Society)’로 분류되는 유명인사다. 황씨의 지인이자 한국에서 모델 활동을 했던 여성 Y씨는 “(자신과 함께) N씨가 클럽, 유흥업소 등에서 황씨와 파티를 즐겼다”고 알려왔다. 태국에서 상위 10% 미만에 속하는 재벌인 하이소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파티를 즐길 뿐더러, 전관예우 등에 따라 현지 경찰의 수사가 어려운 대상이다. 황씨가 N씨의 비호를 받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왔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Y씨를 비롯한 다수의 제보자는 황씨가 태국, 캄보디아 등을 오가며 성매매, 마약 유통 등에 가담했다고 전했다. 황씨는 한국에 있던 Y씨 등을 불러 현지 남성과의 성매매를 유도하기도 했다. 이 밖에 황씨는 과거 방송인으로 활동했던 에이미(이윤지) 등 유명인들과 어울리며 여유로운 삶을 이어갔다. 현지 정보망에 따르면 황씨는 하이소들과 함께 했기에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하이소의 권력이 얼만큼인지 나타내는 실제 사례도 있다. 스포츠음료 ‘레드불’ 공동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야의 뺑소니 사망사건이다. 오라윳은 2012년 9월 방콕 시내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페라리를 과속으로 몰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근무하고 있던 경찰관을 치어 숨지게 한 후 도망쳤다. 그러나 경찰은 사고 후 스트레스로 술을 마셨다는 오라윳 측 주장을 인정하고 음주 운전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오라윳은 불기소됐고, 이후 마약 복용에 따른 처벌도 면했다. 경찰 추적 중에도 호화 생활 동남아 오가며 ‘환락 파티’ 2022년 현지 언론에 따르면 코카인 불법 복용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가 마약법 개정으로 만료됐다고 현지 검찰총장실 대변인이 밝혔다. 1979년 제정된 마약법을 보면 코카인 불법 복용자는 6개월~3년 징역에 처하고 공소시효는 10년이다. 오라윳의 공소시효는 그해 9월3일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21년 12월 발효된 새로운 마약법에 따르면, 코카인 복용은 징역 1년에 공소시효는 5년이다. 이에 따라 오라윳의 코카인 불법 복용 혐의는 자동 기각됐다는 것이다. 오라윳은 이를 틈타 해외로 도주했다. 불기소 결정 뒤 반정부 집회가 열릴 만큼 반발은 심했다. 결국 총리 지시로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검찰과 경찰의 조직적 비호가 있었다는 정황도 포착했다. 검·경은 뒤늦게 부주의한 운전에 의한 과실치사에 코카인 불법 복용 혐의도 추가했다. 하지만 오라윳의 행방은 묘연하다. 검찰은 경찰이 오라윳을 체포해 데려오기 전까지는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할 수 없다고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현재 오라윳에게 남은 혐의는 과실치사뿐이며 공소시효는 2027년 9월3일인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를 종합하면, 황씨는 동남아로 도주하기 전 마약을 투약한 것과 더불어 지인에게 마약을 권하기도 했다. 황씨의 지인 J씨는 취재진과 전화 통화에서 “황하나가 나에게 좋은 거 있는데 해볼래?”라며 팔에 주사로 된 약물을 주입했다. 그는 “좋은 거라길래 설마 했는데, 속이 울렁거리면서 구토를 하게 됐다”며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에 주사기들이 놓여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J씨는 “마약을 투약한 것 같다”고 경찰에 자수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이어 황씨는 지난해 3월19일 취재진과 통화에서 “술은 왜 마셔요? 마약이 더 좋은데”라며 “왜 기자들은 내 기사만 쓰는지 모르겠다. 다른 약쟁이들도 많은데, 좀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황씨의 아버지 황재필씨는 “딸이 적색수배된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카카오 메시지를 읽었지만, 묵묵부답이다. 태국 재벌 ‘하이소’ 조력 “나 잡아봐라” 수사망 피해 한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로 전환된 황하나에 대해 출국금지 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고 말했다. 적색수배가 내려진 황씨가 이번에 귀국하게 되면, 앞으로 1년 이상 태국에 재입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이자, 동방신기 출신 박유천의 전 약혼녀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두 사람은 2018년 9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수차례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를 받았다. 황씨는 2019년 11월 항소심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면서 석방됐다. 앞서 여러 차례 마약 투약으로 처벌받은 이력도 있다. 2015년 5~9월 자택 등에서 필로폰을 세 차례 투약했다. 2018년 4월에는 향정신성의약품을 처방 없이 사용한 혐의로 기소됐다. 집행유예 기간 중인 2021년 7월9일 재차 마약을 투약해 1심 판결로 추징금 40만원에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9년에 마약 투약죄로 선고받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종범죄 재범에 이종범죄까지 저지른 대가로 가중처벌을 받은 것이다. 당시 마약 혐의와 함께 2020년 11월, 시가 500만원 상당의 명품 신발 등을 훔친 혐의도 받았다. 기소된 이후 세 차례 반성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2021년 10월28일 2심 판결서 검찰은 황씨에게 징역 2년6개월을 구형했다. 황씨는 최후 진술에서 “휴대전화도 없애고 시골로 내려가 열심히 살고 제가 할 수 있는 성취감 느끼는 일을 찾아 열심히 살아보겠다”면서 “지난 3~4년간 수면제나 마약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제가 너무 하찮게 다뤘고 죽음도 쉽게 생각하며 저를 막 대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변론했다. 그해 11월15일 2심 판결서 재판부는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년8개월을 선고했다. 추징금은 4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태국서 이동 이후 2023년 이선균 마약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황씨를 포함해 총 8명이 마약을 투약한 단서를 포착하고, 일부는 형사 입건해 내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황씨는 내사자 신분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내사 대상에 오른 인물 1명과 성명불상자 1명을 공갈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사실도 파악했다. 다수의 제보자들은 “황하나는 이선균이 협박당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이선균을 협박해 금품을 뜯은 전직 영화배우 박모씨와 유흥업소 여종업원 김씨의 협박 행각이 검찰 공소장을 통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