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신상사' 신상현 회고록 전격 공개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4.01.06 13: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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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시라소니 "이정재 암살계획 짰다"

[일요시사=사회팀] 조폭이 미화되던 시기가 있었다. 조폭 영화가 흥행하고, 조폭을 꿈꾸는 사람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조폭은 그저 깡패일 뿐이다. 최근 붙잡힌 양은이파 전 두목 조양은 역시 실상은 깡패에 불과하다. 이를 확인하듯 주먹계 원로 신상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지금 주먹세계는 돈과 폭력만 있을 뿐 낭만과 가치가 사라졌다." 그가 직접 밝힌 주먹세계의 빛과 그림자는 어떤 모습일까. 




전국구 조폭 시대가 저물었다. 범서방파 전 두목 김태촌(64)의 사망과 칠성파의 와해, 양은이파 전 두목 조양은(64)의 구속 등으로 이른바 '3세대 조폭'들은 역사에서 퇴장했다. 

전국구 조폭
차례로 몰락

지난달 23일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윤재필)는 사기 대출을 받아 수십억원의 대출금을 가로챈 혐의로 조양은을 구속 기소했다. 조양은은 지난 2010년 8월 서울 강남 일대에서 풀살롱 형태의 P유흥주점을 운영하면서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가장한 22명을 내세워 허위선불금 채권을 담보로 제일저축은행으로부터 29억9600만원의 대출금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조양은은 자신의 존재와 범행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영업사장이나 바지사장 명의로 유흥주점을 인수한 뒤 서류작성자, 모집책, 모집총책 등으로 역할을 나눠 사기 대출을 공모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양은은 이렇게 불법 대출 받은 돈을 유흥주점 인수대금이나 운영자금으로 썼으며 자신의 생활비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조양은은 바지사장에게 "사건을 떠안고 가라"며 협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 허위 진술을 강요한 사실도 적발됐다.


앞서 사정당국은 지난 2011년 6월 중국을 거쳐 필리핀으로 도주한 조양은을 지명수배와 함께 인터폴에 적색수배했다. 조양은의 신병을 추적하던 당국은 필리핀 현지 카지노에서 조양은을 붙잡아 2년여 만에 국내로 압송했다.

마지막 낭만협객이 본 주먹세계 빛과 그림자
자서전 <주먹으로 꽃을…> 발간 뒤늦게 확인

그래도 한때는 전국구 조폭으로 불렸던 조양은. 그러나 그는 필리핀 도피생활 동안 거의 잡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전해진다. 카지노 주변의 관광객이나 교민들을 상대로 소위 '삥'을 뜯으며 연명했다는 것이다.

과거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 조직원은 "그 형님 시대가 끝난 지 언제인데 아직도 이름값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또 그는 "칼로 뜬 사람(조양은)은 건달이 아닌 양아치에 불과하다"고 못박았다.

조양은은 우리나라 주먹사에서 회칼을 처음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양은은 지난 1975년 서울지역 최대의 폭력조직인 신상사파를 기습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연장을 사용했다. 훗날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건으로 조양은은 주먹계의 거두가 됐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주먹계의 진짜 보스는 조양은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그의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김태촌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솔직히 나(김태촌)나 조양은이나 무슨 두목이냐. 우리는 평생 교도소나 다니는 실패한 인생이다. 진짜 두목들은 뒤에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건달은 죽고
양아치 남았다


신상사파 전 두목 신상현(82)씨는 김태촌이 인정한 진짜 두목이다. 195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명동을 거점으로 암약했던 신씨는 전국구 보스 '신상사'로 30년 넘게 막후에서 군림했다.

신씨는 1세대 조폭인 김두한, 시라소니(본명 이성순), 이정재 등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때문에 신씨는 소위 말하는 '낭만시대'의 마지막 남은 증인이다.

지난해 신씨는 자신의 회고록인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를 <월간중앙>과 함께 발간했다. 이 책에서 신씨는 어둠의 세계 한 가운데 있던 비화들을 한 보따리 풀어놨다. 신씨가 경험한 주먹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혹은 영화화나 드라마화 된 것)과 어떻게 다를까.

먼저 낭만시대 주먹은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양은이 칼을 사용한 75년을 전후로 조폭들은 빠르게 '양아치화'됐다.

당시 조폭들은 흉기를 사용하는 일을 치욕으로 여겼다. 또 여러 명이 한 명에게 몰매를 가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다구리(몰매)'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조폭들은 격투기를 직접 익혀 자신의 몸을 단련했다. 맨주먹을 무기로 삼을 뿐 특별한 도구나 흉기를 동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직의 보스가 되기 위해선 이른바 '맞짱' 싸움 실력이 필수였다. 신씨는 주로 상대의 턱을 노려 싸움을 재빨리 끝냈다고 한다.

건달은 감옥서도 호의호식
출소 후엔 재벌들과 어울려

1949년 신씨는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1953년 특무부대 상사로 제대했다. 신씨의 암흑가 별명인 '신상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쨌거나 나랏밥을 먹었던 신씨가 남은 반평생을 깡패로 살았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신씨처럼 나름의 배경을 갖춘 조폭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세대 조폭들은 대의와 명분을 중히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구마적(고희경)과 신마적(엄동욱)은 깡패였지만 협객으로 포장됐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대의와 명분을 앞세웠기 때문에 사회적 평가가 박하지 않았다.

명동·종로 등 번화가에서 이득을 챙기던 조폭들은 광복 후 활동 영역을 넓혔다. 상권은 상권대로 관리하고 정치인과 손을 잡았다. 이중 김두한은 좌익 인사를 상대로 한 백색테러로 의회에까지 진출했다.

김두한이 떠난 주먹계는 이화룡, 시라소니 등이 버틴 명동사단과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이 있던 동대문사단으로 양분됐다. 신씨는 같은 시기 주먹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했다.

신씨가 증언한 1950년대의 서울 주먹은 이른바 3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미관을 중심으로 한 김두한파, 명동 시공관을 중심으로 한 명동파, 동대문시장으로 진출한 이정재파가 꼭지점을 이뤘다.

신씨는 이중 이화룡이 만든 대동강동지회 즉 명동파와 교류했다. 하지만 이화룡 밑에서 일한 적은 없다는 것이 신씨의 주장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명동사단과 동대문사단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승만정권 말기에 다툼은 더 심했는데 이들의 전쟁은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동대만사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정재는 경무대 경찰서장인 곽영주를 후견인으로 삼고 ‘장충동테러사건’을 비롯한 각종 정치테러를 주도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그의 심복 유지광과 연예계 황제 임화수는 이정재와 합심해 독보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어찌 보면 이때가 정치 깡패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이승만정권의 총애를 받던 이정재는 4·19혁명으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군사정권에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신씨는 "이정재의 거대한 야망이 화를 불렀다"고 평했다. 이처럼 권력에 기생한 조폭들은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가장 먼저 사회의 희생양이 됐다.

권력에 빌붙은
정권의 희생양

신씨는 1세대 주먹사의 가장 중요한 비화로 '이정재 암살 계획'을 언급했다. 그는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이정재를 제거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워두었지만 실행 직전 이정재와 김두한이 청요리집인 관수동 대관원에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돼 없던 일이 됐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정재가 그때 살해됐다면 전체 주먹계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란 해석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이 없는 법. 자유당의 비호 아래 철권을 누리던 동대문사단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가장 먼저 패망했다. 반면 자유당의 타깃이 됐던 명동파는 군사정권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화룡이 떠난 명동의 새로운 패자는 '신상사'가 됐다.


5·16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민심을 잡기 위해 각지의 깡패를 잡아들였다. 1961년 한 해에만 모두 1만3000여명이 검거됐다. 하지만 검거된 깡패는 감옥에서 호의호식했다. 신씨는 "형무소의 규칙은 돈 앞에 무력했다"고 적었다.

당시 감옥에는 비리와 뇌물이 판쳤다. 깡패들은 돈만 있으면 담배는 물론이고 술을 마시며 호화 수감생활을 했다. 심지어 한 유명 정치깡패는 복역 중 교도소에서 딸을 갖기도 했다. 이 깡패는 교도관을 매수한 뒤 면회실에서 부인과 둘만의 '특별면회'를 했다.

카지노, 섹스…7공자 전성시대
사보이호텔 사건 진짜 내막은?

공권력은 범죄 집단과 결탁했다. 서울에서 생산한 마약을 전국으로 유통하는 데 그 흔한 단속 한 번 없었다. 단속 전 깡패들이 돈을 뭉텅이로 넣어주면 경찰은 그들의 영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채시장이 성장했다. 채무자를 관리할 조폭의 수요도 늘었다. 많은 조폭들은 앉아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신씨는 같은 기간 마약과 사채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돈이 돌던 때라 범죄행위와 거리를 두면서도 자금을 모을 방도가 있었던 것이다. 비교적 금도를 지켰던 신상사파의 전성기는 10년 넘게 이어졌다.

이 시기 신씨는 권력자의 아들, 재벌의 반열에 들었던 기업인 2세와 어울렸다. '7공자'로 불렸던 이들 무리는 돈과 권력, 젊음으로 무장한 무소불위의 집단이었다. 신씨는 당시 7공자를 따르는 무수한 여자가 있었으며, 당대 최고의 미인들이 7공자와 관계를 맺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명동에서 만나 술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워커힐로 이동해 쇼와 카지노, 섹스를 즐겼다.

태광실업 박동명 대표를 비롯해 D산업 창업주의 아들 L씨, S건설 회장의 아들 J씨, P산업 사장 K씨, 양조회사 창업주의 장남 G씨 등이 7공자 중 5인으로 소개됐다. 나머지 2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척관계인 Q씨, 고위공직자의 아들 K씨였다고 신씨는 주장했다.

그리고 미인들은 몸치장에 드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을 상대로 한 술접대에 동원됐다고 한다. 각 유명 요정과 룸싸롱에는 여자 연예인들의 사진과 전화번호가 걸린 앨범이 비치돼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그 앨범을 보고 자신의 파트너를 선택했다고 전해진다.

또 당시 연예계는 스타급 연예인도 연락을 받으면 달려 나가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고름을 짠 조폭들은 되레 승승장구했다. 돈과 여자를 주무를 수 있는 깡패들은 암울한 시대를 맞아 메뚜기처럼 창궐했다.

사람과 돈이 서울에 몰리다보니 지방에 있던 조폭도 차례로 상경했다. 서울 주먹계의 절대 강자였던 신상사파의 아성도 마침내 흔들렸다.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신상사파의 전성기는 신씨가 명동으로 회귀한 10년째에 막을 내렸다.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을 시작으로 3세대 조폭은 마지막 남아 있던 낭만시대 주먹을 대체했다.

사건 당사자인 신씨는 그곳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이어 명동사단은 보복을 위해 사건 주모자인 조창조·정학모·오종철·조양은을 쫓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합의였다. 이 합의로 '공공의 적'이었던 조양은은 음지에서 양지로 돌아왔다. 이후 조양은은 선배들을 넘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다.

깡패는 깡패
낭만은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씨의 합의는 1세대 조폭인 이화룡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는 득이 됐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력을 얻은 조양은과 김태촌은 곧이어 등장한 신군부의 타깃이 됐다. 이들은 그 대가로 상당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반면 신씨는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었다. 또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명동에서의 영향력을 일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깡패는 깡패일 뿐. 정권의 힘 앞에는 무력했다.

신씨는 '범죄와의 전쟁'을 버티지 못하고 주먹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외제차 사업에 뛰어 들었다가 최근에는 모든 사업을 정리한 상황이다. 비교적 평온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신씨는 "지금의 주먹세계는 돈과 폭력만 있을 뿐 낭만과 가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어쩌면 후배인 조양은이 선배인 신상사에게 칼을 들이댄 순간부터 주먹세계의 마지막 낭만은 끝장났는지 모른다. 겉으로만 형님 찾고 의리 찾는 이들의 표리부동한 행동은 끝내 씁쓸함을 자아낸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소문만 무성한 '김태촌 비망록'

지난 2013년 1월 '주먹계 거물' 김태촌씨가 사망했다. 70∼80년대를 주름잡으며 전국구 조폭으로 불린 그는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인 뒤 영원한 어둠 속에 묻혔다.

생전 김씨는 자신의 삶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30년 넘는 감옥생활 동안 김씨는 건강과 세력을 모두 잃었다. 긴 수감생활을 거치며 김씨가 얻은 것은 본인의 인지도뿐이었다.

대개의 조폭은 음지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김씨는 유독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잦았다고 전해진다. '김태촌'이란 이름값을 노린 '하이애나'들은 그가 죽기 전까지 김씨 곁을 맴돌았다.

이런 자신의 삶이 억울했던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어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김씨는 이른바 '김태촌 회고록' 출간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서울대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김씨는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지난 2012년 본지 기자와 만났던 김씨는 "만약 내가 죽으면 일대기 형태로 모든 것을 공개할 생각"이라며 "(비망록을) 지인들을 통해 집필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씨가 병석에서 지난 사건들을 술회하면 지인들이 메모를 해 책으로 엮어내는 형식이다.

그러나 김씨가 약속했던 회고록(또는 비망록)은 그가 죽은 지 1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연예계는 물론 정·재계와 관련한 각종 비화가 담길 것으로 예상됐던 '김태촌 비망록'은 출간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한편 주먹계 원로인 신상현씨는 김씨에 대해 "거칠었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사내다운 면이 있었다"며 "그가 오랜 기간 보스로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신세 진 정치·경제·연예계 인물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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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전국 한의과대학교에는 ‘졸업준비위원회’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졸업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목상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졸준위)는 졸업앨범 촬영, 실습 준비, 학번 일정 조율, 학사 일정과 실습 공지, 단체 일정뿐 아니라 국가시험(이하 국시) 대비를 위한 각종 자료 배포를 하고 있다. 매 대학 한의대마다 졸준위는 거의 필수적인 조직이 됐다. 졸준위는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체(이하 전졸협)’라는 상위 조직이 존재한다. 자료 독점 전졸협은 각 한의대 졸업준비위원장(이하 졸장)의 연합체로 구성돼있으며, 매년 국시 대비 자료집을 제작해 졸준위에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텐’ ‘의지’ ‘의맥’ ‘의련’ 등으로 불리는 자료집들이다. 실제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국시 준비의 필수 자료’로 통한다. 국시 100일 전에는 ‘의텐’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준위가 없으면 국시 준비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한의계 국시는 직전 1개년의 시험 문제만 공개되기 때문에 시험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시 문제는 오직 졸준위를 통해서만 5개년분 열람이 가능할뿐더러, 이 자료집은 공개자료가 아니라서 학생이 직접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전졸협이 자료들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자료집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 졸준위를 결성하는 것이다. 졸준위가 학생들의 투표로 결성되면 전졸협이 졸준위에 문제집을 제공한다. 이 체계는 오랫동안 유지돼왔고, 학생들도 졸준위를 통해 시험 자료를 제공 받는 것이 ‘관행’처럼 받아들여왔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반드시 결성돼야만 한다는 기조가 강하다. 학생들의 반대로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시 전졸협은 해당 학교에 문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은 모든 학생들의 가입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졸준위 가입 여부는 실질적으로 선택이 아니다. 자료집은 전졸협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에, 졸준위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문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문제집을 받아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학생들의 해당 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한 대학교에서는 졸준위 결성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는데 익명도 아닌 실명 투표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진행했지만 반대자가 나오자 실명 투표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렵다. 실명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데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후 자료 배포·학년 일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 실명 투표로 진행 가입시 200만원 이상 납부 필수 문제는 이 졸준위 가입이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졸준위에 가입하면 졸업 준비 비용(이하 졸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데, 그 비용이 상당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대학교의 졸비는 3차에 걸쳐 납부하도록 했는데 1차에 75만원, 2차에 80만원, 3차에 77만원 등 총 232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이다. 금액 산정 방식은 졸준위 가입 학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인원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된다. 심지어 2명 이상 탈퇴하게 된다면 졸준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은 ‘졸장’의 주도 하에 움직인다. 졸장은 학년 전체를 대변하며 전졸협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졸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 오갔을 정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졸준위가 결성되면 가입한 모든 학생들은 졸준위의 통제를 받는다.<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학교의 규칙문에 따르면 졸준위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다. ▲출석 시간(8시49분59초까지 착석 등) ▲교수·레지던트에게 개인 연락 금지 ▲지각·결석 시 벌금 ▲회의·행사 참여 의무 ▲병결·생리 결 확인 절차 ▲전자기기 사용 제한 ▲비대면 수업 접속 규칙 ▲시험 기간 행동 규칙 ▲기출·족보 자료 관리 규정 등이다. 학생들이 이 규정을 어길 시 졸준위는 ‘벌금’을 부과해 통제하고 있었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규정 위반 시 벌금 2만원에서 5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병결이다. 졸준위는 병결을 인정하기 위해 학생에게 진단서 제출을 요구하고, 그 내용(질병명·진료 소견·감염 여부 등)을 직접 열람해 판단했다. 제출 병원에 따라 병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있었다. 한 병원의 진단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체가 학생의 개인 의료 정보를 열람해 병결 여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 질병이 있어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병결을 얻기 위한 절차가 학습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졸준위는 대면 면담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3:1로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학생이 위축될 수 있는 방식을 행하기도 했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규칙 어기면 벌금도 이 같은 문제로 탈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 A 대학 졸준위 전체 학번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한 학생은 규정에 문제를 느껴 졸준위 측에 탈퇴를 의사를 밝혀왔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탈퇴 의사를 밝힌 학생과의 카톡 대화 전문이 학생들에게 공개됐다. 공개된 카톡 내용에는 탈퇴 과정이 담겨있었는데 순탄하지 않았다. 졸준위 측은 탈퇴 의사를 즉각적으로 승인하지 않았고, 재고를 요청하거나 면담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지연했다. 해당 학생이 다시 한번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힌 뒤에도, 졸장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대화를 공개한 뒤 학우들에게 ‘졸준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졸준위 운영이 조직 이탈 자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 정황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당 학우는 탈퇴 확인 및 권리 포기 동의서에 서명한 뒤에야 졸준위를 탈퇴할 수 있었다. 탈퇴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험 기간 중, 강의실 앞을 지나던 탈퇴 학생은 졸준위 임원 두 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며 불려 세워졌다. 임원들은 이 학생이 학습 플랫폼 ‘퀴즐렛’을 사용한 점을 언급하며, 그 자료 안에 졸준위에서 배포한 기출문제가 포함돼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졸준위에서는 퀴즐렛에 학교 시험 내용이 있다며 탈퇴자가 보지 못하도록 사용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졸협은 10년 전 자체 제작한 문제집으로 논란된 적이 있다. 당시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예상 문제집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시험이 끝난 직후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 60여명을 상대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압수했고, 국가시험원까지 압수수색해 기출문제와 대조 작업에 들어갔다. 기형적 구조 문제가 된 교재는 ‘의맥’ ‘의련’ 등 졸준위 연합체인 전졸협이 제작·배포해 온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교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배포하는 등 통제된 방식으로 유통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학생들이 전졸협을 통해서만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는 구조는 기형적”이라며 “국가고시를 위해 몇백만원씩 돈을 받고 문제를 제공하는 건 문제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