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신상사' 신상현 회고록 전격 공개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4.01.06 13: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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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시라소니 "이정재 암살계획 짰다"

[일요시사=사회팀] 조폭이 미화되던 시기가 있었다. 조폭 영화가 흥행하고, 조폭을 꿈꾸는 사람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조폭은 그저 깡패일 뿐이다. 최근 붙잡힌 양은이파 전 두목 조양은 역시 실상은 깡패에 불과하다. 이를 확인하듯 주먹계 원로 신상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지금 주먹세계는 돈과 폭력만 있을 뿐 낭만과 가치가 사라졌다." 그가 직접 밝힌 주먹세계의 빛과 그림자는 어떤 모습일까. 




전국구 조폭 시대가 저물었다. 범서방파 전 두목 김태촌(64)의 사망과 칠성파의 와해, 양은이파 전 두목 조양은(64)의 구속 등으로 이른바 '3세대 조폭'들은 역사에서 퇴장했다. 

전국구 조폭
차례로 몰락

지난달 23일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윤재필)는 사기 대출을 받아 수십억원의 대출금을 가로챈 혐의로 조양은을 구속 기소했다. 조양은은 지난 2010년 8월 서울 강남 일대에서 풀살롱 형태의 P유흥주점을 운영하면서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가장한 22명을 내세워 허위선불금 채권을 담보로 제일저축은행으로부터 29억9600만원의 대출금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조양은은 자신의 존재와 범행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영업사장이나 바지사장 명의로 유흥주점을 인수한 뒤 서류작성자, 모집책, 모집총책 등으로 역할을 나눠 사기 대출을 공모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양은은 이렇게 불법 대출 받은 돈을 유흥주점 인수대금이나 운영자금으로 썼으며 자신의 생활비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조양은은 바지사장에게 "사건을 떠안고 가라"며 협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 허위 진술을 강요한 사실도 적발됐다.


앞서 사정당국은 지난 2011년 6월 중국을 거쳐 필리핀으로 도주한 조양은을 지명수배와 함께 인터폴에 적색수배했다. 조양은의 신병을 추적하던 당국은 필리핀 현지 카지노에서 조양은을 붙잡아 2년여 만에 국내로 압송했다.

마지막 낭만협객이 본 주먹세계 빛과 그림자
자서전 <주먹으로 꽃을…> 발간 뒤늦게 확인

그래도 한때는 전국구 조폭으로 불렸던 조양은. 그러나 그는 필리핀 도피생활 동안 거의 잡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전해진다. 카지노 주변의 관광객이나 교민들을 상대로 소위 '삥'을 뜯으며 연명했다는 것이다.

과거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 조직원은 "그 형님 시대가 끝난 지 언제인데 아직도 이름값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또 그는 "칼로 뜬 사람(조양은)은 건달이 아닌 양아치에 불과하다"고 못박았다.

조양은은 우리나라 주먹사에서 회칼을 처음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양은은 지난 1975년 서울지역 최대의 폭력조직인 신상사파를 기습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연장을 사용했다. 훗날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건으로 조양은은 주먹계의 거두가 됐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주먹계의 진짜 보스는 조양은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그의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김태촌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솔직히 나(김태촌)나 조양은이나 무슨 두목이냐. 우리는 평생 교도소나 다니는 실패한 인생이다. 진짜 두목들은 뒤에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건달은 죽고
양아치 남았다


신상사파 전 두목 신상현(82)씨는 김태촌이 인정한 진짜 두목이다. 195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명동을 거점으로 암약했던 신씨는 전국구 보스 '신상사'로 30년 넘게 막후에서 군림했다.

신씨는 1세대 조폭인 김두한, 시라소니(본명 이성순), 이정재 등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때문에 신씨는 소위 말하는 '낭만시대'의 마지막 남은 증인이다.

지난해 신씨는 자신의 회고록인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를 <월간중앙>과 함께 발간했다. 이 책에서 신씨는 어둠의 세계 한 가운데 있던 비화들을 한 보따리 풀어놨다. 신씨가 경험한 주먹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혹은 영화화나 드라마화 된 것)과 어떻게 다를까.

먼저 낭만시대 주먹은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양은이 칼을 사용한 75년을 전후로 조폭들은 빠르게 '양아치화'됐다.

당시 조폭들은 흉기를 사용하는 일을 치욕으로 여겼다. 또 여러 명이 한 명에게 몰매를 가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다구리(몰매)'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조폭들은 격투기를 직접 익혀 자신의 몸을 단련했다. 맨주먹을 무기로 삼을 뿐 특별한 도구나 흉기를 동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직의 보스가 되기 위해선 이른바 '맞짱' 싸움 실력이 필수였다. 신씨는 주로 상대의 턱을 노려 싸움을 재빨리 끝냈다고 한다.

건달은 감옥서도 호의호식
출소 후엔 재벌들과 어울려

1949년 신씨는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1953년 특무부대 상사로 제대했다. 신씨의 암흑가 별명인 '신상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쨌거나 나랏밥을 먹었던 신씨가 남은 반평생을 깡패로 살았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신씨처럼 나름의 배경을 갖춘 조폭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세대 조폭들은 대의와 명분을 중히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구마적(고희경)과 신마적(엄동욱)은 깡패였지만 협객으로 포장됐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대의와 명분을 앞세웠기 때문에 사회적 평가가 박하지 않았다.

명동·종로 등 번화가에서 이득을 챙기던 조폭들은 광복 후 활동 영역을 넓혔다. 상권은 상권대로 관리하고 정치인과 손을 잡았다. 이중 김두한은 좌익 인사를 상대로 한 백색테러로 의회에까지 진출했다.

김두한이 떠난 주먹계는 이화룡, 시라소니 등이 버틴 명동사단과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이 있던 동대문사단으로 양분됐다. 신씨는 같은 시기 주먹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했다.

신씨가 증언한 1950년대의 서울 주먹은 이른바 3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미관을 중심으로 한 김두한파, 명동 시공관을 중심으로 한 명동파, 동대문시장으로 진출한 이정재파가 꼭지점을 이뤘다.

신씨는 이중 이화룡이 만든 대동강동지회 즉 명동파와 교류했다. 하지만 이화룡 밑에서 일한 적은 없다는 것이 신씨의 주장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명동사단과 동대문사단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승만정권 말기에 다툼은 더 심했는데 이들의 전쟁은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동대만사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정재는 경무대 경찰서장인 곽영주를 후견인으로 삼고 ‘장충동테러사건’을 비롯한 각종 정치테러를 주도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그의 심복 유지광과 연예계 황제 임화수는 이정재와 합심해 독보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어찌 보면 이때가 정치 깡패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이승만정권의 총애를 받던 이정재는 4·19혁명으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군사정권에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신씨는 "이정재의 거대한 야망이 화를 불렀다"고 평했다. 이처럼 권력에 기생한 조폭들은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가장 먼저 사회의 희생양이 됐다.

권력에 빌붙은
정권의 희생양

신씨는 1세대 주먹사의 가장 중요한 비화로 '이정재 암살 계획'을 언급했다. 그는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이정재를 제거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워두었지만 실행 직전 이정재와 김두한이 청요리집인 관수동 대관원에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돼 없던 일이 됐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정재가 그때 살해됐다면 전체 주먹계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란 해석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이 없는 법. 자유당의 비호 아래 철권을 누리던 동대문사단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가장 먼저 패망했다. 반면 자유당의 타깃이 됐던 명동파는 군사정권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화룡이 떠난 명동의 새로운 패자는 '신상사'가 됐다.


5·16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민심을 잡기 위해 각지의 깡패를 잡아들였다. 1961년 한 해에만 모두 1만3000여명이 검거됐다. 하지만 검거된 깡패는 감옥에서 호의호식했다. 신씨는 "형무소의 규칙은 돈 앞에 무력했다"고 적었다.

당시 감옥에는 비리와 뇌물이 판쳤다. 깡패들은 돈만 있으면 담배는 물론이고 술을 마시며 호화 수감생활을 했다. 심지어 한 유명 정치깡패는 복역 중 교도소에서 딸을 갖기도 했다. 이 깡패는 교도관을 매수한 뒤 면회실에서 부인과 둘만의 '특별면회'를 했다.

카지노, 섹스…7공자 전성시대
사보이호텔 사건 진짜 내막은?

공권력은 범죄 집단과 결탁했다. 서울에서 생산한 마약을 전국으로 유통하는 데 그 흔한 단속 한 번 없었다. 단속 전 깡패들이 돈을 뭉텅이로 넣어주면 경찰은 그들의 영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채시장이 성장했다. 채무자를 관리할 조폭의 수요도 늘었다. 많은 조폭들은 앉아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신씨는 같은 기간 마약과 사채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돈이 돌던 때라 범죄행위와 거리를 두면서도 자금을 모을 방도가 있었던 것이다. 비교적 금도를 지켰던 신상사파의 전성기는 10년 넘게 이어졌다.

이 시기 신씨는 권력자의 아들, 재벌의 반열에 들었던 기업인 2세와 어울렸다. '7공자'로 불렸던 이들 무리는 돈과 권력, 젊음으로 무장한 무소불위의 집단이었다. 신씨는 당시 7공자를 따르는 무수한 여자가 있었으며, 당대 최고의 미인들이 7공자와 관계를 맺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명동에서 만나 술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워커힐로 이동해 쇼와 카지노, 섹스를 즐겼다.

태광실업 박동명 대표를 비롯해 D산업 창업주의 아들 L씨, S건설 회장의 아들 J씨, P산업 사장 K씨, 양조회사 창업주의 장남 G씨 등이 7공자 중 5인으로 소개됐다. 나머지 2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척관계인 Q씨, 고위공직자의 아들 K씨였다고 신씨는 주장했다.

그리고 미인들은 몸치장에 드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을 상대로 한 술접대에 동원됐다고 한다. 각 유명 요정과 룸싸롱에는 여자 연예인들의 사진과 전화번호가 걸린 앨범이 비치돼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그 앨범을 보고 자신의 파트너를 선택했다고 전해진다.

또 당시 연예계는 스타급 연예인도 연락을 받으면 달려 나가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고름을 짠 조폭들은 되레 승승장구했다. 돈과 여자를 주무를 수 있는 깡패들은 암울한 시대를 맞아 메뚜기처럼 창궐했다.

사람과 돈이 서울에 몰리다보니 지방에 있던 조폭도 차례로 상경했다. 서울 주먹계의 절대 강자였던 신상사파의 아성도 마침내 흔들렸다.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신상사파의 전성기는 신씨가 명동으로 회귀한 10년째에 막을 내렸다.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을 시작으로 3세대 조폭은 마지막 남아 있던 낭만시대 주먹을 대체했다.

사건 당사자인 신씨는 그곳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이어 명동사단은 보복을 위해 사건 주모자인 조창조·정학모·오종철·조양은을 쫓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합의였다. 이 합의로 '공공의 적'이었던 조양은은 음지에서 양지로 돌아왔다. 이후 조양은은 선배들을 넘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다.

깡패는 깡패
낭만은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씨의 합의는 1세대 조폭인 이화룡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는 득이 됐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력을 얻은 조양은과 김태촌은 곧이어 등장한 신군부의 타깃이 됐다. 이들은 그 대가로 상당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반면 신씨는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었다. 또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명동에서의 영향력을 일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깡패는 깡패일 뿐. 정권의 힘 앞에는 무력했다.

신씨는 '범죄와의 전쟁'을 버티지 못하고 주먹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외제차 사업에 뛰어 들었다가 최근에는 모든 사업을 정리한 상황이다. 비교적 평온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신씨는 "지금의 주먹세계는 돈과 폭력만 있을 뿐 낭만과 가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어쩌면 후배인 조양은이 선배인 신상사에게 칼을 들이댄 순간부터 주먹세계의 마지막 낭만은 끝장났는지 모른다. 겉으로만 형님 찾고 의리 찾는 이들의 표리부동한 행동은 끝내 씁쓸함을 자아낸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소문만 무성한 '김태촌 비망록'

지난 2013년 1월 '주먹계 거물' 김태촌씨가 사망했다. 70∼80년대를 주름잡으며 전국구 조폭으로 불린 그는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인 뒤 영원한 어둠 속에 묻혔다.

생전 김씨는 자신의 삶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30년 넘는 감옥생활 동안 김씨는 건강과 세력을 모두 잃었다. 긴 수감생활을 거치며 김씨가 얻은 것은 본인의 인지도뿐이었다.

대개의 조폭은 음지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김씨는 유독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잦았다고 전해진다. '김태촌'이란 이름값을 노린 '하이애나'들은 그가 죽기 전까지 김씨 곁을 맴돌았다.

이런 자신의 삶이 억울했던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어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김씨는 이른바 '김태촌 회고록' 출간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서울대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김씨는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지난 2012년 본지 기자와 만났던 김씨는 "만약 내가 죽으면 일대기 형태로 모든 것을 공개할 생각"이라며 "(비망록을) 지인들을 통해 집필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씨가 병석에서 지난 사건들을 술회하면 지인들이 메모를 해 책으로 엮어내는 형식이다.

그러나 김씨가 약속했던 회고록(또는 비망록)은 그가 죽은 지 1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연예계는 물론 정·재계와 관련한 각종 비화가 담길 것으로 예상됐던 '김태촌 비망록'은 출간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한편 주먹계 원로인 신상현씨는 김씨에 대해 "거칠었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사내다운 면이 있었다"며 "그가 오랜 기간 보스로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신세 진 정치·경제·연예계 인물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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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목줄 잡은 대법원 막전막후

이재명 목줄 잡은 대법원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선을 앞두고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대권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후보가 또 한 번 판결대에 서야 할 상황에 놓인 것. 그 후보로서는 지난 대선 때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리스크를 떨칠 기회이면서 나락으로 빠질 수 있는 위기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대법원이 있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오는 6월3일 조기 대선이 열린다.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각 당은 최종 대선후보를 뽑기 위한 레이스에 돌입했다. 국민의힘은 컷오프를 거쳐 8명의 후보를 추린 후 1차 경선서 4명을 뽑았다. 2차 경선서 과반 득표자 여부에 따라 추가 경선을 진행해 최종 후보를 선정한다. 민주당은 3명의 후보가 4개 권역을 돌며 지난 27일, 이재명 전 대표가 대선후보로 결정됐다. 압도적 1위 제동 걸리나 국민의힘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악의 악재를 짊어진 상태다. 조기 대선의 책임 소재가 여당인 국민의힘에도 지워진 상황이라 내부가 혼란스럽다. 실제 후보 간에도 탄핵 찬성과 반대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최종 1인이 결정되는 다음 달 3일까지 후보 간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민주당은 ‘1극 독주’ 상황이다. 이 전 대표가 경선 지역마다 압도적인 득표율을 보였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득표율보다 높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경쟁자로 나선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김동연 경기도지사 등은 한 자릿수 득표율을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 지난 27일 마지막 경선서 이 전 대표는 민주당 대선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다자 대결, 양자 대결서도 이 전 대표는 국민의힘 후보를 압도하고 있다. 어떤 후보와 붙어도 15%~20%p 차이로 넉넉하게 앞선다.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재수 끝에 대권을 잡는 데 성공한 문재인 전 대통령 때와 오버랩된다는 의견이 나온다. 당시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표현이 선거를 지배했듯, 이번 대선은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이 유권자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최근 ‘이재명이냐, 아니냐’로 흘러가던 선거 구도에 대법원이라는 변수가 던져졌다. 지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처음 불거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전 대표의 발목에 달려 있던 ‘사법 리스크’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중에서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다시 한번 판결대 위에 올랐다. 이 전 대표는 20대 대선 과정서 고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 1처장과 경기 성남시 백현동 한국식품연구원 부지 용도변경과 관련해 허위 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2022년 9월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로 판결했다. 항소심 유죄, 무죄로 뒤집어 김명수 체제서 7대 5로 회생 이 전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지난달 26일에 나왔다. 이후 헌재가 지난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안을 인용하면서 이 전 대표의 대선 행보를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 공직선거법 재판은 1심은 기소 후 6개월, 2·3심은 3개월 이내에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6·3·3 규정에 따라 대법원 판결은 대선 이후에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 전 대표의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이하 전합)에 회부하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22일 오전, 이 전 대표의 공직선거법 사건을 오경미·권영준·엄상필·박영재 대법관으로 구성된 2부에 배당했다. 주심은 박영재 대법관이 맡았다. 그러나 곧이어 해당 사건을 전합에 회부했다고 밝혔다. 전합은 ▲소부서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기존 대법 판례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 ▲소부서 재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경우 등의 상황에 올리게 된다. 사건이 전합에 회부되면서 조 대법원장과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재판 업무를 하지 않는 법원행정처장, 회피를 신청한 노태악 대법관을 제외한 12명이 최종 판결 선고를 포함해 심리 및 판단을 하게 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 노 대법관은 이해 충돌을 우려해 전합으로부터 빠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지난 22일 사건을 전합에 회부하고 첫 기일을 진행한 데 이어 지난 24일에도 기일을 잡았다. 대법원이 사건 심리에 속도를 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판결 선고 시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동시에 이 전 대표 앞에도 몇 가지 경우의 수가 놓이게 됐다. 먼저 대법원이 상고 기각을 하는 경우다. 항소심 재판부가 이 전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에 대법원이 기각하면 공직선거법 사건은 그대로 마무리된다. 이 전 대표의 대선 가도에 정말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어지는 셈이다. 변수 등장 경우의 수 반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내는 ‘파기환송’ 판결을 내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한다고 해서 바로 형이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확정 판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대선 전에 최종 결론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이 경우에는 이 전 대표의 대선후보 자격 논란이 빚어질 수 있다. ‘파기자판’ 가능성도 나온다. 파기자판은 상급심 재판부가 하급심 판단에 잘못이 있다고 보고 원심을 파기하면서 사건을 돌려보내지 않고 직접 판결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대법원이 판결을 하는 것이다.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이후 보수 진영 등에서 대선 전까지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엔 시간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두고 파기자판 가능성을 거론했던 바 있다. 대법원이 벌금 100만원 이상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다면 이 전 대표는 피선거권 박탈로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다만 대법원은 하급심 판결에 대한 법리해석을 따지는 법률심에 해당하며, 징역 10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사건에 대해선 양형을 판단하지 않는다. 법조계에서는 파기자판 가능성은 작게 보고 있다. 대법원이 심리를 서두르는 것과는 별개로 선고가 대선 이후에 나면 헌법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점화될 전망이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5년 만에 평행이론? 여기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소추’에 대한 해석이다. 기소로 봐야 하는지, 기소와 재판을 합쳐서 봐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 것. 또 이 전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재판 정지 여부도 맞물려 있다. 민주당은 대법원의 행보를 경계하는 듯한 모양새다. 민주당 황정아 대변인은 “이 전 대표는 우리 당 대선 (경선) 후보기도 하지만 선고 결과에 따라 우리 당이 직접적 영향을 받는 사건이라 당 차원의 입장 표명이 불가피하다”면서 “(대법원의)공정한 재판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정청래 의원은 “대법원이 국민 참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SNS에 올렸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전 대표의 운명이 또다시 대법원의 결정에 달렸다는 점이다. 앞서 이 전 대표는 지난 대선 전 대법원의 판결로 ‘기사회생’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 전 대표는 성남시장 재임 시절인 2012년 6월 보건소장, 정신과 전문의 등에게 친형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도록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로 기소됐다. 또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TV 토론회서 ‘친형을 강제 입원시키려고 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허위 발언을 한 혐의(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도 받았다. 1심과 2심 모두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허위 사실 공표에 대해서는 판결이 엇갈렸다. 1심은 무죄, 2심은 유죄였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형량으로 대법원서 확정되면 이 전 대표는 5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상황이었다. 경기도지사직은 물론 대선 가도에도 브레이크가 걸릴 판이었다. 조희대 체제도 12명이 판결 이례적 속도전 대선 전에? 대법원은 이 전 대표의 사건을 전합에 회부했다. 판결에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과 11명의 대법관이 참여했다. 12명 대법관의 의견은 7(무죄) 대 5(유죄)로 갈렸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7명의 대법관은 이 전 대표의 발언이 “상대 후보자의 공격적 질문에 소극적으로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취지의 답변 또는 일부 부정확하거나 다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표현”이라고 봤다. 적극적으로 반대 사실을 공표했다거나 전체 진술을 허위라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반면 박상옥 전 대법관 등 5명은 이 전 대표의 발언이 유권자의 정확한 판단을 방해할 정도로 왜곡됐다면서 유죄 취지의 반대 의견을 냈다. 상대방 후보의 질문이 즉흥적인 것도 아니었고 이 전 대표도 답변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당시 판결이 낳은 후폭풍이다. 7대 5 판결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받는 권순일 전 대법관의 행보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이는 재판 거래 의혹으로 번졌다. 특히 화천대유 실소유주로 알려진 김만배씨가 대법원 선고를 전후해 여러 차례 권 전 대법관의 집무실을 방문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이 확산됐다. 여기에 권 전 대법관은 퇴직 이후 2020년 11월부터 2021년 9월까지 화천대유 고문으로 재직하며 등록 없이 변호사로 활동한 혐의도 받았다. 이 기간 그는 1억5000만원의 고문료를 받았다. 또 대장동 개발업자들로부터 거액을 받거나 약속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른바 ‘50억 클럽’으로 지목된 6명 가운데 1명이기도 하다. 2표 차로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온 이 전 대표는 경기도지사 임기를 마치고 이후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결국 2022년 대선서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지긴 했지만 대법원 판결이 없었다면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할 뻔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 이 전 대표는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다시 출발선에 서 있다. 고비마다 또 한 번? 문제는 이 전 대표의 발목에 달린 모래주머니다. 이 전 대표는 12개 혐의로 5개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중에서 공직선거법 사건만 확정 판결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이번에 대법원이라는 산만 넘으면 이 전 대표 앞에는 ‘꽃길’만 깔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가시밭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건 대법원에 달렸다. <jsjang@ilyosisa.co.kr>